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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59화 (59/178)

59화

“마르퀴즈는 오늘 아카데미에 없어. 꼬마 케이트가 열이 난다는 이유로 그녀의 오빠를 찾았거든.”

꼬마 케이트-케이틀린은 마르퀴즈 볼턴이 목숨처럼 아끼는 막냇동생이었다. 걔를 위해서라면 볼턴은 수업 서너 개를 빼먹고 징계를 받는 짓쯤은 충분히 저지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약간 겁이 나기도 했다. ‘그럼 저건 누구야?’ 속삭이듯 물었더니 켈란은 검지를 입술에 대고 ‘쉿’ 했다.

[전하.]

이제 두 개의 목소리는 하나가 되었다. 두 개만이 아니었다. 수십, 수백의 목소리가 합쳐졌다. 영원히 타오르는 지옥의 업화 속 망자들의 아우성 같다는 생각을 했다. 최근에 비슷한 소리를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한여름의 습기에 노출된 등줄기와 뒷목이 식은땀으로 젖기 시작했다. 멀찍이 서 있던 켈란이 조심스레 침대가로 다가왔다.

“임프인가?”

그가 중얼거렸다. 임프는 픽시처럼 장난을 좋아하는 작은 요정이었지만 비뚤어진 성정 탓에 도통 친절하게 굴 줄을 몰랐다. 그들의 장기는 인간을 놀라게 함과 동시에 우울하거나 화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근데 그건 죽이는 것과는 천지차이였다. 임프는 장난꾸러기 요정이었지 괴물이 아니었으니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패닝턴이야.”

“뭐?”

“나를 찌를 때, 저런 목소리를 냈어. 패닝턴이 말이야….”

[미스 블로썸이 전하께 용건이 있는 듯합니다.]

내가 말하는 동안에도 그것의 기세는 점점 흉악해져 갔다. 이윽고 기존의 목소리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가해졌다. 가벼운 소음이었던 그것은 점차 거센 굉음이 되었다. 낡은 문짝이 들썩거렸다. 켈란은 바들바들 떠는 나를 부드럽게 달래는 한편 바깥을 향해 외쳤다.

“누구냐!”

[전하.]

[켈란 전하.]

“질문에 답하라!”

[미스 블로썸이.]

[블로썸이 전하께 용건이 있는 듯합니다.]

잘 갈린 소리의 칼날들이 귀를 틀어막은 내 손등을 찢어발겼다. 켈란이 강하게 나를 끌어안았다. 그의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체온 때문인지, 조금씩 안정이 되었다. 더운 물로 가득 찬 욕조에 몸을 담근 기분이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문득 모든 소란이 완전히 잦아들고 적막이 찾아왔다. 그러자 방금과는 다른 이유에서 뺨이 달아올랐다. 아까의 기괴한 경험을 반추할 겨를도 없이, 나의 신경은 모조리 켈란에게로 쏠렸다. 그가 나를 용맹하게 지켜 주었다는 사실에 말이다.

일순 한낱 배경 인물이 아니라 그의 상대역이 된 듯한 기분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다음 순간에는 그러지 않았다. 왼쪽 가슴 위로 늘어진 푸석푸석한 갈색의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고마워.”

손끝으로 가슴팍을 살짝 밀어냈더니 켈란은 즉시 멀어졌다. 하지만 그의 ‘천만에’ 라는 대답은 약간 묘하게 들렸다. 얼핏 피곤한 거 같기도 했고, 틱틱대는 거 같기도 했다.

뇌리 어디쯤에 묻어 두었던 빌라드 백작가의 새침데기를 다시금 끄집어내 일레스티아의 황태자와 겹쳐 보던 와중이었다. 문득 다급한 발걸음이 가까워졌다.

“달튼!”

월시와 볼턴 다음으로 등장한 손님은 여자였는데, 특이하게도 켈란이 아니라 나를 부르고 있었다. 고작 수십 초가 지났을 뿐인 공포가 되살아났다.

“당장 꺼져!”

또 무슨 수작인지 몰랐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이를 악물고 신경질적으로 받아치자, 여자는 당황스러운 듯이 딸꾹질을 하다가 ‘무례하기는!’ 이라고 말했다. ‘블로썸에게 가야 한다’거나 ‘블로썸이 찾는다’는 내용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상했다.

“포크너?”

브리는 일레스티아 귀족들 특유의 젠체하는 말투를 제대로 따라하는 법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문을 두드린 것이 재클린 포크너라는 사실을 바로 깨달았다. 포크너는 항상 자신이 낮은 신분임에도 고귀한 오브라이언 공작가를 수행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으므로, 그녀가 모시는 아나이스보다 훨씬 귀족적인 말투를 사용하곤 했다.

“빨리 나와, 달튼! 이러다 안나가 대머리가 되겠어!”

“대머리라고?”

만일 내가 사악한 존재라면 나를 꾀어낼 미끼로 하필이면 포크너를 택하진 않을 것 같았다. 켈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포크너가 던진 흥미진진한 화두에 달라붙었다. 그러자 그녀가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네 룸메이트가 우리 아가씨 머리채를 쥐어뜯고 있단 말이야!”

***

여자 기숙사 2층 복도는 언제나 아나이스의 구애자로 인해 북적거리곤 했지만 오늘만큼은 다른 이유로 붐볐다. 내가 도착했을 때, 아나이스의 방 근처는 이미 구름 같은 인파로 난리였다.

“말하면 되잖아, 이 답답아! 너 때문에, 너 때문에…!”

피츠시몬스의 소문난 기차 화통 브리아나 모슬리의 사자후가 두꺼운 인간 장벽을 막힘없이 넘었다.

“외모만이 네 전부는 아니라고, 너는 실패하지 않았다고, 수도자가 되기 싫다고! 직접 말하란 말이야!”

“나도 그러고 싶어, 하지만…!”

“‘하지만’이 뭐야, 시도해 본 적도 없는 주제에! 겁쟁이!”

부추기는 무리와 말리는 무리를 헤치고 나아갔다. 브리아나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아나이스의 금발이 야무지게 얽힌 것이 보였다. 놀라운 점은, 아나이스 역시 브리의 머리카락을 쥐고 있었다는 거였다. 포크너의 말대로 싸움이 아니라 일방적인 폭력이었다면 곧바로 현장에 개입했겠으나, 그게 아니어 보여서 우선 멈춰 섰다.

마침 근처에 미아 페터슨이 있었다. 검술 수업을 함께 듣는, 손재주가 좋은 4학년 여자애였다. 사랑의 달 연회 때 그 유명한 <몽마의 목을 치는 아리엘 레베스크>를 그려 낸 장본인이기도 했다. 나는 그녀에게로 다가가 팔꿈치로 옆구리를 찔렀다. 조그마한 미아는 너무 놀란 나머지 그녀의 키의 반절은 되는 높이를 뛰어올랐다.

“아, 아, 아….”

“맞아, 미아. 네가 제일 존경하는 아리엘 선배란다.”

내 말에 미아가 몸을 배배 꼬며 얼굴을 붉혔다. 그 모습을 보자니 사뭇 드는 의문이 있었는데, 얘처럼 수줍음이 많은 애가 어쩌다가 견고한 인간 장벽을 뚫고 싸움 직관 1열에 서게 된 걸까? 잘못 휘말려 들어왔다가 못 나간 건가?

“서, 선배도 거셨어요?”

“뭘?”

“내기 말이에요… 저는요, 오브라이언 선배에게 유월 용돈을 전부 걸었어요.”

미아의 둥그런 턱끝이 가리키는 곳에서 스테판 커크패트릭이 구경꾼들로부터 금화를 걷고 있었다. 그의 반걸음 뒤에서 종이 같은 것을 나눠주는 호세 소토도 보였다. 아마 무슨 일이 발생해도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겠지. 그건 나와 카일이 마시멜로 동물들로 비슷한 짓을 할 때에 쓰곤 하는 수법이었다.

수전노로 이름난 커크패트릭은, 장난은 즐거운 단계에서 마무리되어야 마땅함을 지론으로 하는 우리와는 달리 돈만 관련되면 눈이 돌아가기 일쑤인 자식이었다. 하필이면 내 친구들을 가지고 노름판을 여는 꼴이 아니꼬왔으나, 곧 화려하게 망할 예정이라는 것을 아니 굳이 손을 댈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올해도 가짜 점술사의 엉터리 족보를 비싼 가격에 팔아치웠다.

다만 미아가 커크패트릭의 수작질에 넘어갔다는 것이 의외였다. 어쩌면 얘가 1열을 차지한 경위도 미스터리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켈리 라미레즈의 날카로운 통찰이 다시금 승리하는 순간이었다.

“난 아카데미가 참 좋아. 나만 또라이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 주거든.”

“시비도 모슬리 선배가 먼저 걸었고, 머리채도 모슬리 선배가 먼저 잡았는데, 진정한 고수는 오브라이언 선배더라고요. 보이세요? 구레나룻 쥐고 계신 거?”

“애초에 어쩌다 시비가 걸린 건데?”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부끄럽지만, 처음부터 여기 있었던 게 아닌지라.”

보통 그 부분이 부끄럽나? 나는 잠시 어안이벙벙해졌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브리와 아나이스를 살폈다.

“야, 비겁하게 울지 마! 자기는 남의 구레나룻 당기고 있으면서!”

“흐윽, 미안, 해,. 그치만 네가…!”

“사과하지도 마, 미련퉁이야! 싸우는 도중에 사과하는 사람이 어딨니?!”

“미, 미련하다니….”

“기분 나쁘니? 열받니? 그러면 그렇게 말하란 말이야!”

“그럼, 놔 주는 거야…?”

“아니!”

브리가 단호하게 외치며 다른 손마저 아나이스의 뒷머리로 올렸다. 아나이스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밝은 금발 한 움큼이 후두둑 떨어졌다. 모시는 아가씨의 머리숱을 오매불망 걱정하던 포크너가 어디선가 절규했다.

“놔 주진 않아도, 너를 ‘미련퉁이’라고 불렀을 때 네가 화를 낸다는 걸 알게 되겠지!”

“그런 식으로는, 나는….”

“몰라!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네 감정 따위는 알아주지 않는다고!”

아나이스가 충격을 받은 듯 휘청거렸다. 머리카락 뭉치들이 나뒹구는 바닥에 눈물로 웅덩이가 생겼다. 척하는 만큼 매정하지 못한 브리아나 모슬리 역시 조금씩 훌쩍이기 시작했다.

슬슬 개입해야 할 때였다. 나는 얇은 반팔 블라우스 위에 대충 걸친 카디건을 추슬러 올리고 발을 떼었다.

정확히는, 떼려고 했다.

“어디 가, 아리?”

등 뒤에서부터 뻗어져 나온 긴 팔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머리 위로 작은 웃음이 내려앉았다.

“카일!”

“징계 중이라며? 보조 마법 실습실에 네가 없어서 얼마나 쓸쓸했는지 알아?”

아무래도 온 피츠시몬스를 통틀어 내가 어떤 사건에 휘말렸는지 정확히 아는 것은 켈란과 브리뿐인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아는 사건의 전말이 같지는 않을 터이나, 아무튼, 그랬다.

카일은 안 그래도 생각이 많은 성격이었고, 고민할 거리는 내가 굳이 더하지 않아도 차고 넘쳤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내 옆구리에 일어난 대참사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케이시 대신 시험도 쳐 주지 그러냐.”

“그건 연습 빼는 걸로는 수지가 안 맞잖아.”

낄낄대던 카일이 허리께에서 흔들거리던 내 손을 쥐어다가 제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뒤 검지를 잡아 폈다.

“네가 나서서 해결하지 않아도 되는 일은 세상에 많아, 아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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