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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58화 (58/178)

58화

복잡하게 짜인 나무 격자가 사라진 자리를 복잡하게 조형된 얼굴이 메웠다. 가로로 긴 아몬드 형태의 눈이 우뚝 선 콧대를 대칭으로 훌륭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너무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입술은 완벽한 수분량을 유지하는 듯 보였다. 옅은 금색의 속눈썹이 움직일 때에는 금가루가 떨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눈이 부셨다. 인상을 찌푸렸다.

“괜찮아?”

켈란이 물었다. 나는 어느샌가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었고 그는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서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놀란 도마뱀처럼 잽싸게 기어 그에게서 멀어졌다.

“엄청 빠르네.”

“밀루아 북부에서 매년 엉덩이 달리기 경주가 열리는 거 알지? 나는 고작 열두 살에 챔피언의 영예를 차지했다고.”

“거짓말이지?”

“물론이지. 잠깐만 이러고 있을게.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서.”

그러자 켈란은 망설임 없이 나를 안아 들어 의자에 앉혀 주었다. 고맙긴 한데 이게 맞는 건지 잘 모르겠다. 시스템이 주입시킨 것일지언정 켈란이 플로렌스 벨에게 느끼는 감정은 명백히 사랑인 탓이었다. 남의 남친과 어울리지 않기란 여자애들 사이의 불문율이었다. 비록 그녀의 남친이 다섯이래도 말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고민할 여유는 별로 없었다. 돌아갈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명탐정 아리엘의 번뜩이는 추리에 따르면 나는 심한 부상을 입어 정신을 잃을 때마다 플로렌스 벨의 세계로 튕겨 나가고,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면 로즈마리 블로썸의 세계로 빨려들어 가는 것이 틀림없었다.

블로썸의 세계로 돌아갈 때의 전조는 두통이었다. 전에 그랬던 것처럼. 또 방금 겪은 것처럼. 내 판단이 맞다면, 나는 원래 세계의 켈란이 퍼부은 치유 주문에 의해 잠시 깨었다가 도로 잠들었다. 아마 완전히 의식을 찾는 것도 머지않았을 거였다.

“얼마나 기절해 있었어, 나?”

“길지 않아. 한 3분?”

“좋아. 모든 걸 말해 줄게.”

“갑자기?”

“장난이나 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거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카일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눈에 보이는 증거-운명의 물레라든가-를 들이밀 수 없었으므로 말할 것이 산더미였다.

카일은 공략 대상처럼 게임 속 이야기에 깊게 관여하고 있는 인물은 마녀의 길에 접근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시스템이 거기까지 용납할 것 같지는 않다나(그럼 나는 뭐야. 그렇게 묻자 어색하게 웃던 것이 떠올랐다. 어차피 배경 인물이다 이거지.).

“아마 무지하게 충격적인 이야기일 거야. 특히 너에게는.”

“평행 세계의 연인이 나타나는 것만큼이나?”

“하하, 정말 재밌다. 실은 안 재밌어. 집중해 줄래?”

자신의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순간 미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어느 세계의 켈란이든 그가 상처 받지 않기를 바랐으므로, 내 목소리는 아주 조심스럽게 나왔다.

“일단, 너도 짐작하고 있다시피 세계는 찰랑거리는 금발에, 제비꽃 같은 눈동자에, 도자기 인형처럼 생긴, 학생회 서기를 위해 움직이고 있어. 내 경우에는 ‘로즈마리 블로썸’, 네 경우에는 ‘플로렌스 벨’이 되겠지….”

내가 ‘주인공‘ 과 ‘치트’, 그리고 ‘캐릭터’에 대해 떠드는 동안, 켈란의 입술은 수도 없이 꿈틀거렸지만 끝내 열리지 않았다.

“믿고 안 믿고는 네 자유지만, 내가 아는 진실은 이거야.”

설명이 끝나자, 켈란은 기나긴 침묵에 잠겼다. 전할 만한 것은 전했으므로, 나는 끈기 있게 기다리기로 했다. 그의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최악이네.”

한참 만에 내려진 결론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래. 너무나 능숙했어. 신기할 정도로 말이야. 플로라의 입에서는 언제나 내가 듣고자 했던 말이 막힘없이 나왔거든. 마치 답지가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

“나의 진심. 마르퀴즈의 문제. 브라이스의 약점과 에드가의 트라우마. 제이든의 비밀까지. 우리는 기를 쓰고 숨겨 왔던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에게 공개했어. 알고 지낸 지 고작 한 달이 되었을 때 말이야.”

예술적인 각도로 패인 옆 볼을 타고 작은 물방울이 굴러떨어졌다. 켈란의 어조는 평온했지만 마음은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카일이나 다른 애들에게 하던 ‘울지 마’라는 말을 그에게는 차마 하지 못했다.

내가 켈란과 완벽하게 같은 상황이 아니므로 나는 감히 그가 느끼는 바를 짐작할 수 없었다. 다만 그것들이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눈물에 씻기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그는 원래 감정에 인색한 편이었으므로 더욱 그랬다.

“나는 그걸… 사랑이 만들어 낸 기적이라고 착각한 거야. 순진하게도. 낭만적이게도. 멍청하게도.”

켈란이 신경질적으로 눈을 비벼 대는 동안 나는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럴 만도 했다. 그가 벨을 의심한 것은 그녀를 마음 놓고 사랑할 명분을 찾기 위해서였는데, 내가 들이민 것은 그녀를 사랑할 수 없는 이유였으니.

누군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기란 그다지 달가운 경험이 아니었다. 더구나 켈란 일레스티아는 평소에 등에 검이 꽂혀도 산뜻하게 미소 지을 것만 같던 남자였던 것이다. 아마도 검보다 아픈 것이 장미 가시였던 모양이었다. 나는 장미 가시가 박힌 것이 내 심장이라도 되는 마냥 괴로워졌다.

“유감이야.”

어설픈 위로를 건네 보았다. 그러자 켈란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끔해졌다. 눈물은 자취를 감추었고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하지만 전부 네 주장이 진짜라는 가정하에지.”

맞는 말이었다. 나는 내가 굳이 그에게 거짓말을 지껄일 필요가 없음을 켈란이 이해하길 바랐지만, 동시에 그건 엄연히 내 입장이므로 켈란이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고 느꼈다.

켈란에게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었다. 내가 주인공의 삶을 빛낼 조미료조차 되지 못하는 처지를 받아들이기까지 걸렸던 며칠보다 훨씬 긴 시간이.

“다음엔 언제 올 수 있지, 아리?”

엄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자, 다소 조급한 물음이 떨어졌다. 그도 내가 원래 세계로 돌아갈 때의 패턴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글쎄,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것저것 감수할 게 많아서….”

“기다릴게.”

생색을 미처 다 내기도 전에, 켈란이 끼어들었다. 평소처럼 다듬어져 있지 않고 투박하게 뱉어진 말이었다. 괜히 속이 간질거리는 기분에, 나는 어깨를 약간 움츠렸다.

그러자 커다란 파도 같은 고통이 나를 내리쳤다. 나는 얼기설기 쌓은 방파제마냥 무너졌다.

***

다시금 내 눈에 들어온 나무 격자는 육각형의 한 변이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브리…?”

“미안, 나야.”

창문을 등지고 걸터앉은 사람은 확실히 브리아나 모슬리가 아니었다. 귀가 얼마나 좋은지, 그는 나의 작은 속삭임을 놓치지 않고 대꾸했다. 남자 목소리. 스펀지케이크처럼 촉촉했다.

“다행히 상처가 많이 깊지는 않았어. 다른 조치는 필요 없을 거야. 겉으로 보기에도 티 나지 않을 거고. 너무 과격하게 움직이지만 않는다면 말이지.”

어느새 갈아입혀진 잠옷을 들춰 보았다. 켈란의 말대로 패닝턴에게 찔린 옆구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짱했다. 단, 손으로 더듬으면 잘못 꿰매진 솔기처럼 울퉁불퉁했고 고통이 느껴졌다. 진짜 피부보다 감쪽같다던 고가의 마법 붕대를 감아 놓은 모양이었다.

“셔츠는 수선해서 돌려줄게. 모슬리에게는 나를 노린 암살자에게 당했다고 설명했어.”

“네가 푼 암살자인데 말이야. 그러고 보니까 걔는 어떻게 됐어?”

“어떻게 하고 싶어?”

‘네가 원하는 대로 처리할게.’ 켈란이 웃음기라고는 요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덧붙였다.

‘처리’라. 그건 목적어를 사람으로 둔 단어치고는 과하게 딱딱한 면이 있었다.

나는 패닝턴을 잘 몰랐지만 그가 처리해 마땅한 존재냐고 하면 의문이었다. 플로렌스 벨의 세계에서 나를 위해 뻐꾹새 흉내를 내 주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에게 있어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행위인 것 같았다.

새를 흉내 내기 위해 용기를 내야 하는 사람은 단연코 위협적인 사람이라 할 수 없었다. 그가 나를 단검으로 쑤셨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문제의 사건이 발생한 순간 패닝턴은 패닝턴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신원에 대한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내 옆구리에 구멍을 내는 동안 그는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이 보였다. 아직도 그 소름 끼치는 소리들의 잔해가 남아 있는 것 같아서, 귓바퀴를 긁적거렸다.

결론적으로, 내 생각에, 지미 패닝턴에게 마땅한 벌은 통한의 죽빵이었다.

“검소하네.”

재미있는 소리였다. 최근에 나는 평행 세계의 동일인에게 완전히 반대의 평가를 들었다.

“너도 내가 단명할 것 같니?”

“너보다 훨씬 강한 상대에게 덤벼드는 짓을 앞으로도 계속 한다면, 그러겠지.”

켈란이 짐짓 친절한 말투로 대꾸했다. 그는 내가 깨어난 이후로 잠깐도 기분이 좋아 보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내게 너를 걱정할 자격이 있을까? 우리는 그다지 친한 사이가 아닌데 말이야.”

나는 켈란의 빈정거리는 태도에서 어떤 것을 직감했지만 섣불리 언급하지는 않았다. ‘토라진다’는 게 일레스티아의 황태자에게 갖다 붙이기는 너무나도 어색한 개념인 탓이었다. 나는 빌라드 중 가장 잘 토라지곤 하는 신시아가 그러는 것처럼 팔짱을 끼고 볼에 바람을 불어넣은 켈란 일레스티아를 상상하기 어려웠다.

“있잖아, 너, 혹시….”

“전하.”

고민 끝에 말을 꺼냈는데, 정중한 노크에 의해 방해받았다. 곧 웬 목소리가 낡은 나무 문짝의 틈새로 새어 들어왔다.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월시인 것 같았다. 그는 누구보다 격렬히 케이틀린 대제의 발바닥을 핥고 있었으므로, 후계자의 전서구 노릇을 자처한다 하더라도 그리 의외는 아니었다.

“미스 블로썸이 전하께 용건이 있는 듯합니다.”

“뭐라고 말하려고 했어?”

“어… 별건 아닌데. 가 봐야 하지 않을까?”

“로즈는 착한 애야. 나랑 친하기도 하고. 충분히 기다려 주겠지.”

“전하.”

켈란의 장담과는 달리, 재촉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마르퀴즈 볼턴의 목소리였다.

“미스 블로썸이 전하께 용건이 있는 듯합니다.”

“대사에 창의성이 없지 않아, 네 부하들?”

“…마르퀴즈가 아냐.”

내가 코웃음을 치자 켈란은 문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입매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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