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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57화 (57/178)

57화

“야,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너무 오래 생각에 빠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시끄러운 소리에 정신이 들어 보니, 비밀의 방으로 이어지는 복도가 펼쳐져 있었다. 곁에서는 패닝턴이 터질 듯 새빨개진 얼굴로 오두방정을 떠는 중이었는데, 그의 왼손은 여전히 나의 오른손에 쥐여 있었다.

나는 대개 아주 숙녀적인 사람이었지만, 누군가를 골탕 먹일 기회가 생겼다 하면 완전히 달라졌다. 달튼 저택의 작은 악마에게 사회성과 겸사겸사 장난꾸러기 기질을 길러 준 빌라드 저택에서는 놀리지 않으면 놀림을 당하는 게 당연했던 까닭이었다. 나는 일평생 여자와 닿아 본 적이 없을 가엾은 왼손을 선심 쓰듯 놓아준 뒤, 치욕적이지만 모욕적이지 않은 단어들을 혀끝에서 엄선했다.

“전하께서 조심하라고 하더니 이런 의미였나 보네. 손 한번 잡아 보겠다고 갖은 수작을 다 부렸다 하더니만.”

그러나 기껏 떠올린 완벽한 조롱의 말이 소리가 되어 나가는 일은 없었다. 열 받은 일레스티아의 첩자를 구경할 생각에 실룩거리는 입꼬리를 잡아 누르던 나의 말문이 순식간에 막혔다.

아, 켈란 일레스티아! 천사의 얼굴을 한 악마여!

***

“안색이 안 좋은데?”

“신성 일레스티아가 사람을 다루는 방식에 감격했거든.”

“그가 실례라도 했다면 미안하게 됐어. 아직 어려서 그런지 감정 조절에 서투른 면이 있더라.”

“어리다고? 5학년인데? 입학을 몇 살에 했길래?”

“입학식에 참석한 건 최초의 ‘제임스 패닝턴’이야. 그는 세 번째고.”

기다란 통나무 테이블에 러너를 깔던 켈란이 멍청하게 입을 벌린 나를 보고 슬쩍 웃었다. 속지 않으리라 다짐한 것이 금방인데, 저 번쩍이는 이목구비를 마주하고 있자니 정신이 혼미해졌다.

“제발, 아리엘, 지지 말자.”

“음… 왜 자해를 하는 거야?”

“그런 게 있어.”

스스로의 뺨을 호쾌하게 갈긴 손으로 켈란의 팔에 뒤엉킨 테이블 러너를 뺏어 들었다. 그가 그 직사각형의 직물을 끔찍할 정도로 못 다루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도 이상하더라고.’ 켈란은 머쓱한 듯 뒷목을 주물렀다.

“잘못 깔았으니까 그렇지. 이 부분은 페가수스를 표현한 건데, 뒤집으니 완전 가랑이를 벌린 대머리 남자처럼 보이잖아.”

“그거라는 생각은 못 했는데, 이제 그거로밖에 안 보이겠어. 알려 줘서 고마워.”

“걱정 마. 이렇게 하면, 짠!”

“내가 굉장한 잘못을 저질렀었네….”

켈란이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큰 깨달음을 얻은 모양이었다. 나는 드디어 영광스러운 모습을 되찾은 페가수스를 간지럼 태워 그것이 별처럼 수놓아진 밀루아 소수 민족의 문양들 사이로 날게끔 했다.

페가수스 태피스트리는 달튼 상단의 무역품 중 최고로 비싼 부류에 속했다. 그것을 받친 통나무 테이블과 벤치 의자도 마찬가지였다. 확실히 내 손길이 닿은 공간이라는 느낌이 있었다. 내 손길과, 일레스티아 황가의 자본이 닿은.

참 알뜰살뜰히도 팔아먹었구나. 네가 자랑스럽다, 아리엘 달튼.

“그럼 이제 일 얘기를 해 볼까? 오늘은 어때?”

영원히 이어질 것 같았던 테이블 러너 문제가 해결되자, 켈란은 즉시 본론에 들어갔다. 큰일이다. 뭐가 어떠냐는 건지 전혀 모르겠는데. 등골이 오싹해졌다.

“모르겠어? 내가 널 왜 불렀는지?”

“내가 또 말로 했어?”

“그냥, 그래 보여서.”

여기 켈란이든 저기 켈란이든 남의 속 꿰뚫어 보는 건 비슷하구나. 점술 시간 강사는 미스 프록터가 아니라 일레스티아의 작은 태양이 맡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테이블에 놓인 <패치 노트>가 눈에 들어왔다. 로즈마리 블로썸의 세계에서보다 낡지 않은 것을 보면 확실히 과거의 물건이기는 했다. 대체 나는 왜 플로렌스 벨과 관련된 기억을 잃어버린 걸까? 켈란처럼 드문드문 떠오르는 것도 아니고, 누가 도려내 간 것처럼, 통째로.

책을 집어 들고 넘겨 보았다. 해독을 위해 노력한 흔적들이 보였다. 정갈한 글씨. 켈란 일레스티아의. 그러고 보니 다른 <패치 노트>에는 켈란이 발견하기 이전에 누군가의 손을 탄 흔적이 있었다. 그 페이지를 찢어 간 건 얘였을까?

아무튼 <패치 노트>의 미스터리는 이제 나의 머릿속에서 그리 높은 우선순위를 차지하고 있지 않았다. 카일의 말에 따르면 그건 시스템이 내부적으로 보관하는 기록이었다. 일종의 보수 일지라고 했다. ‘여자 기숙사 건물 지붕의 빗물받이에 난 구멍을 메꾸었습니다’ 따위가 적힌. 거기에 뭔가 대단한 비밀이 섞여 있을 것이라는 판단은 별로 되지 않았다.

찢어진 건, 글쎄, 궁금해서 찢어 봤다거나. 잘못 썼는데 수정액이 없었다거나. 시스템도 실수를 하냐 하면 그건 모르겠지만.

“너, ‘아리’로군.”

부지불식간에 얼굴에 열기가 닿았다. 충만한 신성력 탓에 남들보다 체온이 높은 켈란의 손가락이었다. 양철 심장을 지닌 대리석 조각상 취급을 받는 학생회장치고는 지나치게 따뜻하지 않나 싶어서 아이러니했다.

고개가 들렸다. 호박색 안광이 내게로 쏟아졌다. 볼을 간질이던 머리카락이 섬세한 손가락에 걸려 귀 뒤로 넘어갔다. 뻔뻔스레 너스레를 떨어 보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평소보다 예쁜가?”

“그렇다고 칠게.”

그냥 갑자기 애칭을 부르고 싶어졌을 리는 없었고, 아무래도 켈란은 ‘아리’를 ‘아리엘’과 별개로 치는 것 같았다.

내가 플로렌스 벨의 세계에 처음 떨어졌던 것은 여기 시간으로 유월 말쯤이었다. 지금은 방학 중이니까, 최소 1주 내지는 2주, 최대 한 달가량이 흘렀다고 보면 되었다. 월시가 아무리 걸레여도 일레스티아로 돌아가자마자 바람이 났을 리는 없을 테니 후자의 가능성에 무게가 실렸다.

어쨌든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흐르지는 않았다는 거다. 내가 아직 그의 뇌리 한구석에 자리 잡아 있을 정도로.

켈란의 입장에서 꽤나 인상 깊을 만남이긴 했다. 알던 사람의 알맹이가 갑자기 바뀌고, 괴상한-인정하겠다-거짓말에 당하고, 마법에 걸린 책과 비밀의 방이 나타나고…. ‘아리엘’의 몸을 차지한 ‘아리’는 사랑하는 플로라와 그녀에게 호의적인 세계에 관하여 알고 있는 듯 보이고. 여간 강렬한 경험이 아니었을 테니까.

일단 습관처럼 시치미부터 떼고 봤지만, 따지고 보면 그에게는 내가 먼저 사실을 밝힌 바가 있었다. 숨길 필요도 없고 이유도 없어서, 나는 허리를 펴고 당당하게 답했다.

“안녕, 켈란. 또 만나네.”

켈란이 내가 ‘아리’라는 사실을 금방 눈치채는 것은 당연했다. 애초에 그토록 고대하던 방학을 피츠시몬스에서 날려먹게 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너였던 동안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더라. 내가 ‘아리’라고 불렀을 때 걔가 어떤 표정으로 나를 봤는지 알아?”

켈란이 그답지 않게 살짝 칭얼대는 말투로 투덜거렸다.

“진지하게 기억을 지우는 마법 약 레시피를 알아봤다고.”

그가 붉어진 귓불을 만지작대기에, 나는 앞으로 석 달가량은 웃지 않아도 될 만큼 즐거워졌다.

긍정적인 것만이 장점인 ‘아리엘’은 내가 평행 세계의 자신이라는 사실을 시원스럽게 받아들였다고 했다. 어쩌면 상대가 켈란이어서 그럴 수도 있었다. 걔도 나니까, 뭐, 토 나오게 잘생긴 일레스티아의 황태자를 거절하기 어려웠겠지. 이해는 한다.

“비밀의 방을 개선하는 데 사용한 비용 일체를 지원한다는 조건하에, 아리엘은 정기적으로 나에게 그녀가 ‘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줬어.”

즉, ‘아리엘’은 언제 씌일지 모르는 나를 위해 매일같이 켈란 일레스티아에게 감시를 받아 왔던 것이었다. 방학에. 개미 한 마리 보이질 않는 피츠시몬스에서. 참으로 지긋지긋했다. 또 안타까웠다. 계산을 어떻게 해도 손해인데, 기왕이면 더 벗겨먹었어야지. 샹들리에에 다이아도 박고 막 그랬어야지. 아주 벽과 바닥을 금으로 도배했어야지.

“대체 뭣 때문에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나를 찾았어?”

예의상 물어는 봤지만 돌아올 답이 무언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내가 그의 머릿속에 다양한 물음표를 흩뿌려 두고 사라진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켈란은 고개를 까딱여 테이블 위 <패치 노트>를 가리켰다.

“맨입으로?”

나는 의미심장하게 키득거렸다.

일전의 만남 이후로 내 손에는 켈란이 찾던 것들의-플로렌스 벨의 정체, 세계가 그녀에게 상냥한 까닭 등-거의 전부가 쥐어졌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보다 훨씬 가치가 있으니, 대륙에서 제일 고귀한 스토커에게 시달리게 생긴 ‘아리엘’에게 몇 개의 가구들을 팔아서 낸 수익보다는 보람찬 무언가를 선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욕심이 많군. 장수하긴 어렵겠는걸.”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스무 살까지 살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켈란의 말은 제법 이치에 맞았다.

“좋아. 원하는 게 뭐지?”

어떤 것을 제시해야 일레스티아 황가로부터 안전을 보장받는 동시에 개이득을 볼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별안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온다 싶더니만 눈앞이 색안경을 벗은 것처럼 변했다.

달튼 예비 상단주의 수완과 일레스티아 예비 황제의 금전이 창조해 낸 정경이 순식간에 의식의 틈바구니로 날아갔다. 대신 웬 천장이 나타났다. 익숙한 나무 격자로 장식된 천장. 기숙사였다.

내 방은 아니었다. 거기의 나무 격자는 손바닥 사이에 끼워 비비면 하늘로 쏘아졌다가 뱅글뱅글 돌면서 추락하는 픽시 장난감에 의해 부러진 지 오래였다.

주변을 둘러보고 싶었지만, 몸이 젖은 솜처럼 늘어지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었다. 시야의 일부가 곰팡이라도 핀 듯이 어두웠다. 옆구리는 자그마한 노움들이 날카로운 창으로 찔러 대는 것처럼 시큰거렸다. 간헐적으로 지속되는 고통들 사이를 비집고 따스한 힘이 느껴졌다. 신성력.

부드러운 손길이 어른거렸다. 마디가 다부진 남자의 손이었다. 손톱 끄트머리까지 정돈되어 있어 우아한 느낌을 주었다.

그것이 이마에 닿자 신기할 정도로 금세 안정이 찾아왔다. 물살에 몸을 맡긴 채 하염없이 떠다니는 마나 해파리가 된 기분이었다. 정신이 침잠되어 갔다. 더욱 깊은 곳을 향해….

“아리!”

“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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