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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56화 (56/178)

56화

나의 두 번째 사후 세계는 여자 기숙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익숙한 패턴인데.”

“뭐가?”

두 개의 침대 사이, 작은 테이블 건너편에서 종이 같은 것에 코를 박고 있던 브리아나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나는 그녀가 열심히 색칠하는 분홍색 엉덩이를 보고 그야말로 기함했다.

“‘애덤 윌리?’”

“‘윌리’? 맙소사, 달튼, 너 천재니?”

브리가 감탄하며 분홍색 크레용을 내려놓고 촉이 두꺼운 깃펜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애덤 윌리’라는 글자를 엄청나게 멋 부려 적었다. 그건 종이에 그려진, 월시 머리에 돼지의 몸통을 붙인 초상화와 어우러져 매우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얘는 이제부터 ‘애덤 윌리’야. 천지분간 못하는 걸레 자식에게 완벽하게 어울리는 마스코트 캐릭터지.”

뿌듯해 죽겠다는 듯, 브리는 방금 스스로의 손에서 태어난 걸작을 집어 들고 팔락팔락 흔들었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의복을 걸친 채 엄지를 치켜세운 애덤 윌리의 포스터는 전형적인 연회의 왕 후보 홍보물처럼 보였다. 세련된 암갈색 셔츠 아래 보드라운 분홍색 엉덩이와 깜찍한 발굽이 없었다면 정말 착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보기에는 원래 것보다 훌륭해 보이는 새로운 몸이 불만스러운지, 초상화는 뭐 씹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비죽이는 주둥이를 비집고는 작은 말풍선이 나와 있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제 주식은 그리폰의 변이에요! 취미는 여자 친구 갈아치우기죠!’

월시가 여자 친구를 또! 갈아치우는 것은 방학 중의 일이었다. 아무래도 이번 사후 세계의 시간적 배경은 방학 중인 모양이었다. 근데 그렇다고 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모처럼 방학인데, 아카데미에서 뭘 하는 거야, 나?”

“뭐라는 거야. 방학 중에 할 일이 있다면서 남았잖아. 빌라드가 네 바짓가랑이 붙들었던 거 기억 안 나?”

‘아직 젊은데, 큰일이네.’ 브리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뭐, 나야 잘됐지. 심심하지도 않고. 이렇게 전 여친 연합이 맺어져 복수도 하게 되고.”

내 기억에 월시는 2학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그의 외도가 만천하에 밝혀졌다는 사실을 몰랐으므로, 두 사람은 아직 연인 사이였다. 하지만 브리아나 모슬리는 스스로를 월시의 전 여친이라 표현했다. 즉, 걔는 이미 브리의 심장에서 백 마일은 멀어진 상태라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신난다는 듯이 구는 브리의 눈가가 빨갰다. 그녀는 자신의 냉소적인 모습을 좋아했지만, 그러기엔 마음이 너무 약한 데다가 정이 너무 많은 까닭이었다.

또 내가 생각하기로 브리는 그냥 연애라는 것을 해 보고 싶었던 나와는 달리 정말로 월시를 사랑했다. 그랬기 때문에 마법진의 이해 수업을 대신 들어 주었고, 그랬기 때문에 클리블랜드 사건이나 연회의 여왕 사건을 거치면서도 차마 월시를 버리지 못한 것이었다.

브리는 아주 똑똑한 애여서, 걔도 월시가 구제 불능의 쓰레기이고 그녀의 시간과 감정이 낭비되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사랑하는 구제불능의 쓰레기여서 탈이었지.

어쩌면 브리아나가 아나이스 일에 그토록 매달렸던 것은, 아나이스로부터 피츠시몬스 입학 이전의 의기소침한 자신과 월시를 놓지 못하는 미련한 자신을 동시에 보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녀가 아나이스와 도넬리를 향해 퍼부었던 수많은 질타들은 그녀 스스로를 향한 것일 수도.

괜히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만일 이번에도 무사히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게 되면, 브리아나 모슬리를 꼭 안아 줘야지. 윌리의 볼기짝에 수정액으로 광택을 더하며 아닌 척 훌쩍이던 찰나였다.

어디선가 뻐꾹새가 울었다. 정확히는, 뻐꾹새의 우는 소리를 흉내 내는 사람의 소리였다. 깜짝 놀랄 정도로 엉성했다.

“누군지 몰라도 되게 못한다, 그치.”

대수롭잖게 말하자 브리아나는 엄청 심각해졌다.

“달튼, 진짜 아픈 거 아니지? 널 부르는 신호라며. 어제도 저 소리에 나가 놓고는.”

“내가?”

“너어….”

“그랬지. 내가 그랬어. 작년까진 멀쩡했는데 올해 들어서는 참 오락가락한다니까. 알지? 밀루아인 금방 늙는 거. 제이든 스펜서도, 봐. 그게 어디 열아홉의 몸매니.”

브리는 이제 숫제 울먹이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달래기 위해 아무 말이나 주워 삼키다가, 수습이 되지 않을 것임을 감지하고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녀올게! 그동안 우리의 끝내주게 역겨운 피조물에 치장용 반짝이로 품격을 더해 줘!”

***

기숙사 방문을 열어젖히고 복도에 기대선 사람을 발견했을 때, 나는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뒤로 자빠질 뻔했다. 나를 또 다른 피츠시몬스로 날려 보낸 장본인이 곧바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뭐야? 어디까지 따라온 건데?”

“오늘은 대체 무슨 꿍꿍이야? 말해 두겠는데, 너랑 노닥거릴 마음 없으니까 잠자코 따라 나와.”

패닝턴이 지긋지긋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 빌어먹을 새 흉내 좀 때려치우면 안 될까? 내가 일레스티아의 그림자지 광대는 아니거든?”

“뭐? 내가 시킨 거야, 그거?”

“안! 하면! 안! 나오겠다며!”

패닝턴이 벽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제야 비로소 그가 아까 봤던 지미 패닝턴과는 별개의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죽이기 위해 세계마저 넘어온 암살자라면 저 주먹에 깔린 것이 벽이 아니라 나여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경계하기 위해 뒷걸음질하다가, 그럴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에 어깨를 폈다. 적어도 이 세계에서는 내가 그의 우위를 점한 듯 보였다.

‘맞아.’ 그래서 나는 되게 여유로워졌다.

“모처럼 작전을 수행하는 중인데, 그래야 기분도 나고 그러지 않겠어?”

그러자 패닝턴의 반응이 웃겼는데, 제발 헛짓거리는 한 번만 하라며 치를 떠는 게 아닌가. 말인 즉슨 내가 전에도 비슷한 소리를 한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역시 다른 세계의 나도 나구나. 나는 양 손바닥을 맞부딪쳐 또 다른 아리엘 달튼과 즐거움을 나누었다.

패닝턴은 ‘작전’이라는 단어에 딴죽을 걸지 않았다. 그건 나로 하여금 소중하기 그지없는 방학을 피츠시몬스에서 보내는 것이 어떤 은밀한 작업 때문이라는 사실을 짐작케 했다.

그리고 그 은밀한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하필이면 일레스티아의 첩자가 고용되었다? 뻔하지. 나를 여기다 묶어 놓고, 당장 어제 불러서 부려먹었으며, 오늘도 그럴 만한 사람은 피츠시몬스 아카데미에 단 셋이었다. 무소불위의 학생회장, 대륙 과반을 차지한 신성제국의 황태자, 그리고 켈란 일레스티아.

그럼 이제 확인해야 하는 것은 하나만이 남았다.

“있잖아, 패닝턴. 걔 이름이 뭐더라? 그 왜, 찰랑거리는 금발에, 제비꽃 같은 눈동자에, 도자기 인형처럼 생긴, 학생회 서기.”

“플로렌스 벨?”

빙고.

***

패닝턴을 따라 보조 마법 실습 준비실까지 이동하면서, 개미 한 마리조차 마주치질 못했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방학 때 아카데미에 남는 게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울적할 정도로 고요한 한낮의 피츠시몬스를 거닐자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괜히 쓸쓸해지네. 졸업하면 이런 기분일까?”

“알 바냐.”

패닝턴이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신성력을 감지하는 벽을 마주 보고 섰다. 살짝 움츠러든 등에 어깨뼈가 투박하게 도드라졌다.

확실히 10대의 귀족 남자애가 얘처럼 마르기는 쉽지 않았다. 사교계는 그들에게 어떠한 외모적 잣대를 들이밀지 않았으므로, 오히려 잘 먹고 잘 자란 죄로 피둥피둥 살찌기가 일쑤였던 것이다.

암만 살찌지 않는 체질이라도 뼈와 근육만 남지는 않았다. 성장기에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였지만 지방이 붙지 않은 몸과 애당초 충분한 영양이 주어지지 못한 몸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게다가 그의 자세는 언제나 구부정했다. 눈 밑은 검었다. 알고 보자니 수상한 구석이 꽤나 있었다.

“너, 진짜 이름은 뭐야?”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패닝턴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돌려 나를 잠깐 봤다가, 이내 성의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제레미야 마이어.”

“뻥 치지 마. 그건 일레스티아 궁정 극단의 프리모 우오모잖아. 케이틀린 대제의 애첩 중 하나인. 나도 그 정도는 안다고.”

케이틀린 대제의 다른 애첩을 아버지로 둔 애덤 월시가 심심하면 그를 씹어대곤 했기 때문에 알았다. 뭐랬더라, ‘얼굴만 반반한 걸레’랬나.

걸레가 걸레에게? 돌이켜 생각하면 참으로 재미난 이야기였다.

“들켰네. 그럼 비어트리스 밀러. 베티라고 불러.”

“예쁜 이름이구나, 베티. 너 내가 바보로 보이냐?”

“그딴 게 뭐가 중요해?”

패닝턴이 짜증스레 내 손을 낚아채었다. 그의 손에서 신성력이 흘러 들어오는 동안 나는 어떤 감상에 잠겼다.

처음 9개월이 반복되고 있다고 느꼈을 때 나의 바람은 오로지 졸업뿐이었다. 지금은? 글쎄.

내 안위만 생각하기에 나는 너무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카일이 감내해 온 고통에 대해 알게 되었다. 켈란이 잃어버린 기억에 대해 알게 되었다. 운명이 자아낸 실에 묶여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사람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내가 과연 그들을 등진 채로 졸업할 수 있다고 한들 아무렇지 않게 살 엄두가 날까?

어차피 시스템이 무너지지 않는 이상 반복을 막을 방법은 전무했다. 그래서 카일은 요새 블로썸에게 시달리지 않을 때마다 ‘마녀의 길’에 틀어박혀 ‘운명의 물레’를 멈출 방법을 찾고 있었다(거기에 대한 지원은 내가 전적으로 도맡았다. 규모는 작지만 수완이 좋은 달튼 상단이 구하지 못하는 물건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되었다.).

물리력? 어림도 없었다. 마법? 마나를 뽑아내는 것은 가능했지만 뽑아낸 마나로 진을 그리려고 하면 자꾸만 지워졌다. 마도구? 반입 자체가 불가했다. 확실히 무한한 반복을 경험하고 시스템의 모든 움직임을 꿰고 있었던 카일이, 여태껏 실패만을 되풀이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고 졸업 연회는 가까워져만 갔다. 또 무적의 로즈마리 블로썸은 하루하루 강력해졌다. 이제 카일은 치트를 사용하지 않을 때에도 그녀의 지배력을 느낀다고 했다.

총체적으로 절망적인 상태였는데, 이상하게 포기할 수가 없었다. 개인적인 욕심 때문은 아니었다. 얄팍한 정의감 때문도 아니었다. 우리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손 놓고 있는다고 누가 해결해 주는 게 아니어서.

말하자면 발버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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