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에드가로부터 첩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니 머릿속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나이스 오브라이언의 명예를 어떻게든 실추시키고 싶어 하는 사람. 동시에 내가 기척을 읽어 내지 못할 만큼 단련된 사람. 동시에 에드워즈와 차베즈의 눈을 피해 피츠시몬스 타임즈를 감쪽같이 바꿔치기할 정도로 잠입에 능숙한 사람. 최소 일레스티아의 첩자. 최대 마르퀴즈 볼턴이나 켈란 일레스티아 본인.
“그럴 수도 있지. 안 그럴 이유도 없고. 나는 아나이스를 제법 좋아하지만 내가 켈란이었어도 똑같이 했을 테니까.”
“너무해. 나라면 그러지 않았을 거야.”
발끝에 닿는 돌멩이를 걷어차며 투덜거리자, 에드가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래, 너는 그러지 마.”
***
사실 지금 시점에서 아나이스를 흠집 내려고 한 게 누군지가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스캔들은 낭설인 것으로 마무리되고 있었고, 범인을 잡는다고 해서 아나이스가 갑자기 바닥난 자존감을 회복하고 실연의 아픔을 떨치게 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말하자면, 개인적인 만족을 위해서였다. 나에게는 브리처럼 아나이스와 공감할 만한 경험이 없었다. 켈리처럼 노래 한 곡으로 아나이스를 웃기지도 못했다. 리즈처럼 조언하거나 달래는 데에 소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살면서 달래 본 사람은 빌라드 저택의 울보 도련님뿐이었는데, 얘는 쉽게 우는 만큼 달래기도 쉬웠다.
경험과 가창력과 포용력이 없는 내가 내세울 만한 것은 튼튼한 몸뚱어리뿐이었다. 튼튼한 몸뚱어리로 나의 거푸집 자매를 도울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았고. 그것들은 내가 꼭두새벽에 기숙사를 빠져나오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사실 내가 제일 패 버리고 싶은 건 마빈 도넬리였는데, 그건 솔직히 불가능했다. 물리적으로도 그랬지만, 한낱 밀루아 자작가 영애가 일레스티아 공작의 오른팔-잽싸게 행동한 덕인지, 도넬리 준남작은 아직 그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을 패 버렸다간 어떤 외교적 문제가 생길지 몰랐기 때문이다.
일레스티아의 첩자를 패 버리는 건, 글쎄, 가능할 수도 있을 거 같았다. 첩자는 신분의 특수성 때문에 도넬리 준남작처럼 외교적 뭐시기를 만들기 어려웠으니까. 나야 물론 패 버리기는커녕 늘씬하게 두들겨 맞기나 하겠지만, 나의 든든한 용기사는 두들겨 맞은 친구를 위해 기꺼이 복수해 줄 것이었다.
만일 너무 착한 제이든이 차마 손에 피를 묻히기를 거부한다면, 천재 마법사 에디라는 선택지도 있었다. 나는 아직 그에게 마땅한 소원을 빌지 않았다.
어쨌든, 그래서 나는 며칠째 공책 한 권, 검 한 자루 그리고 돋보기와 함께 여자 기숙사 근방의 수풀들 사이에 끼여 있었다. 공책은 시험을 앞둔 학생으로서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였고, 검은 혹시 모를 비상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돋보기는 그냥 멋이었다.
빌라드 저택의 유일무이한 책벌레 코넬리아 빌라드는 폭력과 살인, 서스펜스와 미스터리에 심취해 있었다. 또한 대문호라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녀는 눈만 마주쳤다 하면 상대에게 자신이 구상 중인 추리 소설에 대해 떠들기를 즐겼다.
코넬리아도 빌라드여서, 그녀 역시 매우 끈덕진 성격이었다. 끝내 카일을 제외한 모든 빌라드가 코넬리아에게 완전히 질려 버렸을 때, 나는 성실하게 호응한 죄로 대문호 코넬리아 빌라드의 하나뿐인 이해자, 영감의 원천으로 점 찍히고 말았다(카일은 명탐정 코넬리우스에게서 느껴지는 작가의 비대한 자의식을 견디기 힘들다는 혹평을 퍼부어 코넬리아로부터 투명 인간 취급을 받는 중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추리 소설의 여러 클리셰에 정통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범인은 언제나 현장에 다시 나타난다’라든가.
더구나 브리아나 모슬리의 무시무시한 능력 때문에 범인은 아나이스의 평판에 타격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범인이라면 지금쯤 확실한 증거를 찾아내고 싶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거였다. 만일 다른 밀회를 목격한다면, 그 현장을 마법 잉크로 담아낼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텐데. 그런 마음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이것저것 생각하며 돋보기로 풀잎에 앉은 손톱만 한 벌레를 들여다보던 와중이었다. 문득 젖은 흙을 밟는 자박자박 소리가 귀에 걸렸다. 명백히 발걸음이었다. 아주 가볍고, 지나치게 조심스러우며, 점점 가까워지는.
명탐정은 빌라드 저택이 아니라 피츠시몬스 아카데미에 있었다. 나는 스스로의 추리력에 감탄하며 힘차게 몸을 일으켰다.
“제임스 패닝턴?”
“아리엘 달튼?”
“맙소사, 넌… 밀루아인이잖아.”
철자법도 제대로 모르는 노먼 케이시라도 밀루아인이 일레스티아의 첩자가 될 수 없다는 것쯤은 알았다.
“무슨 뜻이야?”
밀루아 출신 5학년 남학생. 팔꿈치와 무릎에 뼈가 튀어나올 정도로 마른 소년. 미역 줄기처럼 늘어지는 검은 머리에 처진 입꼬리. 날다람쥐 사육장에서 만났던 제임스 ‘지미’ 패닝턴이 당황한 듯 얼굴을 붉혔다.
그제야 내가 어마어마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애초 패닝턴이 밀루아인이고 자시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점술 시간 강사 미스 프록터, 이제 커크패트릭도 ‘메이브 프록터’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그가 정말 ‘제임스 패닝턴’이 아니라면, 날다람쥐 사육장에서 마주친 것도 나처럼 포크너의 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면, 내가 방금 내던져 버린 말로 스스로의 위장이 들통났음을 모르기 어려웠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표정이 일변했다.
“베일리 쪽 하수인인가?”
“아냐! 나는 그냥…!”
일단 부정해 보았지만 별로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나는 재빨리 검집에 손을 얹었다. 당초 내 계획은 첩자가 누군지 확인하고 얼토당토 않는 시비를 걸어 자해 공갈을 시전하거나, 운이 좋으면 몇 대 먹이는 거였다. 하지만 상대가 패닝턴인 이상 그건 무리라고 봐도 되었다.
지미 패닝턴은 날다람쥐 사육장에서 ‘정어리 마녀’에게 습격당한 일로 아리엘 달튼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다. 의심의 소지를 제공하기까지 했으니, 나를 무사히 보낼 리가 만무했다.
“죽일 거야?”
빌어먹을 베일리가 누군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다고 주장해 봐야 먹힐 리가 없었다. 나는 천천히 뒷걸음질하며 패닝턴을 살폈다. 그의 허리춤에서 짧고 약간 굽은 형태의 단검이 튀어나왔다.
“일단은 생포해야겠지. 네 정체가 확실한 것도 아니고. 또 전하께 보고는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너를 제법 마음에 들어 하시거든.”
“켈란이?”
“나는 전부터 네가 싫었어. 어딜 봐도 로즈마리 블로썸이 낫잖아. 걔한테 비빌 만한 거라고는 작위가 전부인데, 뻐길 수준도 아니고.”
“미안하게 됐네, 뻐길 수준의 작위가 아니어서.”
참지 못하고 빈정대고 말았다. 그러자 패닝턴은 단검을 손가락과 손목을 이용해 묘기 부리듯 휘두르며 대꾸했다.
“미안할 건 없지. 오히려 고마운걸, 네 발로 걸려들어 주니. 이제 전하께서도 알게 되겠지. 네가 얼마나 역겨운 인간이었는지.”
“오, 지미. 역겨운 건 네 주둥이에서 쏟아져 나오던 썩은 생선들이, 고!”
결국 먼저 달려든 것은 내 쪽이었다. 내 검은 그의 것에 비해 사정거리가 길었으므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정석이었지만, 나에게 검을 가르친 매튜 영감이 무엇보다 선빵을 중히 여겨서 그랬다. 선빵은 언제나 옳다. 선빵은 지지 않는다!
“검을 다루는 방식마저 지저분하구나, 달튼!”
확실히, 패닝턴과 나의 실력 차는 꽤나 컸다. 그는 황태자의 그림자였고, 나는 촌 동네에서 검깨나 쓴다는 기사 지망생에 불과했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패닝턴의 허벅지에 얕은 자상을 남기고 잠시간 그를 압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패닝턴이 나를 얕보았기 때문이다. 흥분한 나머지 동작이 커져 일순 무게 중심을 잃었을 뿐인데, 즉시 전세가 역전되었다. 이후로는 일방적인 구타가 이어졌다. 내가 그에게 먹일 수 있었던 유효타는 방심을 틈타 갈긴 선빵이 전부였다.
죽이지 않고 생포하겠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그는 검집에서 검을 꺼내지도 않고 나를 가지고 놀았다. 새삼 볼턴과 제이든이 용감한 밀루아 소녀에게 얼마나 많은 기회를 주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팔뚝이며 허리를 정신없이 맞다 보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기절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패닝턴의 움직임이 갑자기 멎었다.
“패닝턴?”
움직임만 멎은 것이 아니었다. 거칠게 몰아쉬던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어깨나 배가 오르내리지도 않았다. 나를 걷어차기 위해 다리를 뒤로 뺀 자세로, 패닝턴은 우뚝 서 있었다. 마치 찰나의 순간에 박제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 기묘한 광경에 나는 홀린 듯 패닝턴에게 다가갔다.
[치명적인 오류가 VMM+00002F20의 0028:C0003F20에서 발생하였습니다.]
별안간 오른쪽 옆구리에서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마르퀴즈 볼턴이 허구한 날 지적하던 나의 약점이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구부리자 살을 찢고 들어오는 쇳덩이의 감각이 생생했다. 눈앞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감염된 코드를 즉시 제거합니다.]
뭐라고 중얼거리는 패닝턴의 목소리가 이상했다. 그건 적어도 패닝턴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아니, 아니지. 그 누구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건 여자의 목소리이기도 했고, 남자의 목소리이기도 했다. 아이의 옹알이처럼 들렸으며, 동시에 노인의 신음 같기도 했다. 사람이라면 그런 소리를 낼 수 없었다. 사람이라면.
패닝턴… 패닝턴이었던 무언가의 손에 들린 검날에서 검붉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아니 그녀는, 아니 그것은 다른 손으로 흐르는 피를 훔치고는 다시금 검을 치켜들었다.
먹먹한 귓가에 끔찍한, 비명 같은 소리가 스쳤다. 조금 생각하니 그건 내 비명이었다.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 흐린 시야로 마주한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무슨 기계처럼.
이번에야말로 죽나? 진짜? 이렇게 허무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