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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54화 (54/178)

54화

도움 좋아하시네. 나는 입술을 비죽거리며 깃펜을 수정액에 담갔다. 하지만 고양이 수염을 단 바르가스 박사의 초상화를 눈에 담자 저항 없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윽고 도서관의 사서인 미스터 브래드쇼가 엄숙한 얼굴로 나타났다.

“제가 교수가 아니라서 정숙하지 않는 건가요? 아니면 인간이 아니라서? 조그마한 드워프라서?”

그가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우리는 이 우울한 드워프의 말도 안 되는 자격지심에 힘을 실어주고 싶지 않았으므로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저녁부터 허리가 쑤시기 시작하면 미스터 브래드쇼가 저주용 제단에 나를 올린 거라고 보면 되겠네. 불청객 때문에 이게 무슨 일이람.”

핀잔을 던지고 싶었지만 말꼬리에 웃음이 섞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불청객이라니, 말이 심하네. 말했잖아, 기가 막힌 디저트를 가져왔다고.”

짐짓 싸늘하게 대꾸하는 에드가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이든은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이었는데, 눈썹이 살짝 처져 있었다.

“말 잘했다, 그 기가 막힌 디저트. 너 지금 내 혀에서 감자 포타주 맛밖에 안 난다고 놀리는 거지?”

브리아나-똑똑이-모슬리의 솥에서 탄생한 마법 약이 어찌나 효과적이었는지, 나는 아직도 침을 삼키는 순간마저 감자 포타주의 맛을 느꼈다. 연애 사업으로 분주한 형제 때문에 무료하기 짝이 없던 에드가와 그가 싸들고 온 로쿰-나돈식 젤리는, 그러므로, 나에게 전혀 반가운 존재가 될 수 없었다.

더구나 나와 제이든은 엄연히 기말 시험을 대비한 마과학 스터디 중이었던 것이다. 마과학을 듣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에드가 라모스가 초대된 바 없는. 그것에 대해 따지자 에드가는 과장스레 우는 척을 했다.

“오늘도 잔인하시군요, 미스 달튼. 당신이 레몬수에 녹말을 풀어 끓이고 설탕과 과일 향을 입힌 다음 사흘간 굳혀 쫀득하고 달달한 로쿰의 맛을 즐기지 못할 줄 제가 알았을까요.”

“침 고이니까 묘사하지 마. 감자 맛 때문에 돌아 버릴 지경이란 말이야.”

내가 진저리를 치자 제이든이 집어 들던 로쿰을 도로 내려놓았다. 나는 혀를 차며 이 거대한 천사의 솥뚜껑만 한 손아귀에 로쿰 한 주먹을 얹어 주었다.

그러고 나서는 드물게 면학 분위기가 찾아왔다. 제이든 스펜서가 훌륭한 선생감이라는 나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그는 사촌형인 휴스턴 교수보다 흡수-배출 구조에 대해 훨씬 자비롭게 설명할 줄 알았다. 에드가는 구색을 맞추기 위해 챙긴 마법진의 이해 교재에 밑줄을 치다가, 간간이 무언가를 나와 제이든의 어깨 사이로 던졌다.

나는 로쿰이 날아오면 제이든에게 넘겨주었고, 구겨진 종이가 날아오면 도로 쳐 내었다. 나돈의 막내 왕자는 그의 유치한 장난이 통하지 않자 턱을 괴고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볼이 따끔거렸다.

“아리엘.”

한참이나 이어진 대치 상황은 내 이름이 불리며 소강되었다. 묘하게 늘어지는 말투였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까딱였다. 떠들어 보라는 뜻이었다.

“너 그러면 뽀뽀해도 감자 맛만 나겠네?”

확실히 흥미로운 주제였다. 나의 입술은 릴루가 달튼으로 돌아간 이후 잠정 휴업 상태였으므로 그러한 가능성에 대해서는 고려한 적이 없었다. 나는 깃펜 끄트머리로 입술을 간질이며 생각에 잠겼다. 침을 삼켜도 감자 맛이 날 정도면, 아마도….

“시험해 볼래?”

아주 짓궂은 농담이었다. 발화자가 아카데미 최고의 난봉꾼이어서인지 살짝 유혹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나는 요사스럽게 빛나는 나돈의 불꽃(크리스타 에드워즈가 쌍둥이의 적자색 눈동자를 묘사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었다.)을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대륙에 에드가 라모스만큼 몽마라는 별명이 어울리는 왕자가 또 있을까.

“헛소리 마.”

어, 내 목소리가 이렇게 굵었나?

“공부 안 할 거면 그만 가.”

뭐라 말하려던 자세 그대로 목만 움직여 제이든을 쳐다봤다.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정작 폭탄을 떨어뜨린 장본인은 대표적인 마나 서명 알고리즘을 정리해 놓은 공책이나 보고 있었는데, 입가에 설탕 알갱이를 묻힌 와중에도 기세가 흉흉했다.

얘가 왜 이래. 나는 빌라드 백작부인이 애지중지 기른 꽃들을 외나무다리에서 마주친 원수마냥 물어뜯던 릴루를 목격했을 때만큼 당황했다. 이런 애가 아닌데. 우리 애가 원래는 순해요. 더듬더듬 변명하려니 이를 악물고 웃던 백작부인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허.”

에드가는 잠시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가, 이내 기가 차다는 듯한 소리를 냈다. 턱을 괸 손바닥에 볼이 눌려 볼썽사나운 꼴을 하고서도 만만찮은 위압감이 느껴졌다. 삶의 거의 모든 순간 절대 다수의 머리통을 밟아 온 사람다운, 느긋한 권위. 이러니저러니 해도 왕족은 왕족인 모양이었다.

“뭐냐, 너.”

“…….”

“이제 내 일에 끼어들지 않기로 한 거 아니었냐, 힐랜드 후작?”

그리고 암만 타국이래도 왕족이 대놓고 작위를 운운하고 나오면 나 같은 잔바리 귀족은 비굴하게 엎드리는 것 말고는 가능한 게 없었다. 암요, 그러믄요, 삼류 악당처럼 알랑거리면서 말이다.

“라모스 공작 전하의 일이 아니라 미스 달튼의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펜서의 소가주면서 힐랜드의 후작, 밀루아의 영웅이자 대륙 유일의 용기사는, 아주 침착하게 대들기를 택했다. 에드가가 그를 찍어 누르기 위해 일부러 후작위를 언급한 것을 알면서도 개의치 않는 듯했다.

“딱히 ‘라모스 공작 전하’인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여기 있는 이상.”

그러자 에드가는 짧은 웃음으로 답했는데, 내 귀에 그건 사람의 웃음보다는 짐승의 짖음에 가깝게 들렸다. 이내 깃펜이 짓이겨지는 빠드득 소리가 소름이 끼치도록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학생 간의 불화고 자시고 그저 세상이 증오스러울 뿐인 드워프는 긴장이 최고조에 달해서야 모습을 보였다. 우리는 짠 듯이 얌전해져서 각자의 교재에 코를 박았다. 뭐가 어찌 되었건 나는 마과학 공부를 해야 했고, 제이든은 나에게 두 개의 마나 서명 알고리즘을 더 설명해야 했으며, 에드가는 그의 형제를 기다리며 시간을 때워야 했기 때문이다.

***

제이든을 그리폰 크리켓 훈련장까지 배웅하고 돌아가는 길에, 에드가는 나에게 아나이스의 안부를 물었다. 하긴, 얘는 올해도 시작의 달 연회에서 아나이스를 에스코트했었지.

어쩌다 생긴 친분인지 궁금할 것도 없었다. 일레스티아와 밀루아, 나돈은 서로 국경을 맞댄 것치고도 교류가 잦은 편이었다. 라모스 공작과 힐랜드 후작 사이에 달튼 자작가 영애가 모르는 약속이 있듯이 레이디 오브라이언 또한 미스 달튼으로서는 겪기 어려운 경험을 했을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 계략의 희생양도 되고 그러는 거겠지. 밑바닥 귀족으로 사는 설움보다 최고위 귀족으로 사는 설움이 적을 거라는 편견은 에드가와 그의 형제들을 보며 씻어 냈다. 또 아나이스는 어떻던가. 이름 뒤에 ‘오브라이언’이 붙었다는 이유만으로 하염없이 깎아내려진 자존감은 아나이스로 하여금 기대지 않고는 서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지 않았던가.

비열한 가정 교사 마빈 도넬리는 아나이스의 버팀목을 가장하는 한편 그녀를 옭아맸다. 그가 능력을 인정받고 작위를 수여받아 승승장구할수록 오브라이언의 장미는 더욱 좁은 화분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저울에서 아나이스가 가지는 무게가 그녀의 아버지만 못하게 된 순간, 도넬리는 구실을 찾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재클린 포크너의 편지 같은.

도넬리 준남작은 포크너의 편지가 오브라이언 영지에 다다르기도 전에 아나이스에게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했다. 그때에 아나이스는 나와 브리, 켈리와 리즈가 번갈아 가며 설득한 끝에 가까스로 기숙사 문 밖을 나설 수 있게 되었던 참이었다.

전보는 아나이스가 브리아나의 손에 이끌려 참석한 마법 약 수업을 마치자마자 도착했다. 가엾은 아나이스는 그걸 읽자마자 겁먹은 새끼 사슴처럼 기숙사로 뛰어 들어갔다. 나는 걔가 그렇게 발이 빠른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다.

아무튼 그랬다. 아나이스는 다시 그녀만의 화분에 틀어박혔고 여학생 살롱 멤버들의 모든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잘 지내지는 못했다.

“그러니까 그 늙은이랑은 작작 놀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내 말이! 애초에 아나이스가 뭐가 아쉬워서… 잠깐, 너, 알고 있었어?”

발 없는 말을 천 마일 보내는 데에 무한한 재능을 가진 브리아나 모슬리의 활약으로, 근래 아카데미 내부의 여론은 아나이스를 둘러싼 의혹들이 그녀를 음해하고자 하는 무리가 퍼뜨린 허무맹랑한 거짓이라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나돈의 정보망을 뭘로 보는 거야. 너 내가 진짜 그냥 천재 마법사 에디인 줄 아는 건 아니지? 라모스 공작이 아니라?”

“첩자들이 학생의 연애사도 캐내고 그래? 막 국가 기밀 이런 것만 다루는 거 아니었어?”

“내가 어제 보고받은 정보 중 하나는 커크패트릭의 첫사랑이 여장한 남자라는 거였어. 별개로 학생의 연애사도 기밀이 될 수 있지. 아나이스 오브라이언 같은 거물이라면.”

아나이스가 일레스티아 사교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그녀 스스로가 묘사하는 것보다 지대한 모양이었다. 에드가는 아나이스의 한마디로 일레스티아의 귀족 여인들이 향수 대신 개똥을 바르고 다니는 꼴을 볼 수도 있을 거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브리아나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일레스티아 사교계에서 케이틀린 대제 다음으로 고귀한 여자가 바로 오브라이언의 장미랬나.

확실히 그녀에게는 귀족들이 흠모할 만한 기품이 있었고 그게 외모에서만 비롯되는 건 아니었다. 신문부실 문짝을 두드리며 분노하던 학생들만 봐도 알았다. 아나이스를 제일 과소평가하는 건 아나이스 스스로였다.

“커크패트릭이 여장남자를 사랑하게 된 경위가 너무너무 궁금하지만 다른 것부터 물을게. 그럼 너도 켈란 일레스티아가 아나이스를 음해했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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