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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53화 (53/178)

53화

“이상하지…. 그렇게 끈질겼는데. 낮에도 둥둥 떠 있었다고. 네 얼굴이. 저쯤에.”

내 입장에서는 별로 이상한 일이라고 할 수 없었다. 켈란을 괴롭히던 나는 우리가 훨씬 친밀했던 언젠가의 나였다. ‘버그’로 인해 되살아나고, 뒤죽박죽 섞여 버린, 기억 속의 아리엘 달튼 말이다.

‘버그’가 없어지면, 기억도 없어졌다. 기억이 없어지면, 기억 속의 아리엘 달튼도 없어졌다. 당연했다. 나는 최대한 대수롭지 않은 태도를 꾸며 냈다.

“잘됐네.”

이 말만은 진심이었다. 적어도 켈란은 이제 서로 맞물리지 않는 과거의 조각들에 시달리지 않고 충분한 수면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확실히 요사이 볼턴은 내게 주군의 건강을 염려하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잘된 건가?”

“그럼.”

“근데 왜 이렇게 답답하지?”

나는 옷깃을 거칠게 잡아당기는 켈란의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명백히 신경질적인 행동이었다. 입꼬리는 날카롭게 치솟아 있었다. 아까 느낀 게 틀리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화났어?”

“그래 보여?”

뱀처럼 미끄러운 어조와 낮게 깔린 목소리가 사뭇 위협적이었다. 나는 성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

“글쎄, 그냥… 거슬리는데. 모든 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화났을 때 그렇게 되곤 해. 언제부터 그랬어?”

아무래도 일레스티아의 황태자는 너무나 완벽한 삶을 살아 온 나머지 분통이 터지는 상황을 그다지 겪어 본 적이 없는 것이 틀림없었다. 하긴 그 케이틀린 대제가 몸소 선택한 후계자의 화를 살 만큼 간 큰 자식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라고.

“네가 나를 필사적으로 피해 다니기 시작하면서?”

“나였구나. 그 간 큰 자식이. 나였어.”

“뭐?”

“그, 오해가 있는 것 같다는 뜻이었어. 애초에 마주칠 일이 없잖아, 우리. 겹치는 수업도 없고, 또 별로 친한 것도 아니고.”

마지막은 약간 자조적으로 덧붙였다. 내가 켈란을 피해 다닌 건 맞지만, 켈란이 느끼는 짜증이 온전히 나로 인한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갑자기 사라진 기억과 갑자기 생겨난 운명은 아마도 내가 끼쳤을 미미한 영향이 아니어도 켈란을 혼란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리엘 달튼은, 그러니까 도화선에 불과하다는 거다. 이미 가득 찬 욕조 위로 떨어진 단 한 방울의 불안.

잠시 놀라움 비스름한 것이 켈란의 얼굴을 스쳤다. 하지만 눈을 깜빡이는 사이 그것은 틈 없는 미소로 변했다. 지나치게 훌륭해서 마치 가면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미소 말이다. 나는 그가 어떨 때 그런 식으로 웃는지 대충 알았다.

문득 오랜 옛날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되었다. 내가 켈란 일레스티아의 존재를 최초로 인지한 순간. 입학생 대표로 연단에 선 남자애의 백금발은 그가 등진 창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보다 밝았다. 능숙하게 반으로 접힌 호박색 눈을 마주하며 무슨 생각을 했더라.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를 봐도 저거보단 감흥이 있겠다.

“그래.”

약간의 침묵 끝에 켈란이 말했다. 건조하다 싶을 정도로 산뜻한 대답이었다.

그러고 나서는 아무도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절도범과 동행한 죄로 붙잡혀 있던 마르퀴즈 볼턴과 성난 빗자루 주인이 기다리는 비행장에 도착할 때까지.

***

세상만사 그리 녹록지만은 않았다.

아나이스의 밀회 장면에 용이 있었을 것이라는 나의 추리가 틀린 것은 아니었다. 유능한 제이든 스펜서는 부탁을 받은 지 며칠도 되지 않아서 웬 용과 함께 나를 찾아왔다. 생후 일곱 달이 지났다던 클레이보다 약간 큰 것으로 미루어보아 어린이 용쯤 되는 모양이었다.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는 어린이 용은 사랑의 달 연회 둘째 날에 아나이스를 쫓아 날다가 나를 목격했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아나이스와 그녀의 ‘선생님’ 외에도 키가 큰 수풀에 몸을 숨긴 불청객의 존재 또한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나 그게 누구인지는 여전히 미궁이었다. 제이든의 말마따나 용과의 의사소통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크리스타 에드워즈를 용의선상 최전방에 두고 있었다. 오로지 아나이스를 깎아내리기 위해 신문부에 잠입해서 그들의 신문을 빼돌릴 만한 누군가를 도무지 떠올려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 에드워즈가 지금까지 보여 준 행보가 여간 화려했어야지. 그렇게 말하자 브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걔는 아니야.”

“어떻게 알아?”

“‘늙은 남자 때문에 인생을 말아먹게 생긴 젊은 여자의 이야기는 기사로 쓰고 싶지 않다’고 했다며?”

“에드워즈를 믿어?”

“걔를 믿는 게 아냐. 나를 믿는 거지. 너도 알다시피 내가 일레스티아 사교계에 여간 빠삭한 게 아니잖니?”

준귀족이던 시절 브리아나 모슬리는 세 끼 밥보다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베넷 후작부인의 시녀였다. 그녀가 만족에 대한 보상을 톡톡히 하는 편이었으므로, 브리는 남의 집 쓰레기통까지 뒤져 본 경험이 있다고 했다.

“레이디 에드워즈의 이혼 전 성은 ‘번햄’이야. 그건 일레스티아에서는 제법 권위 있는 성씨거든. 적어도 ‘에드워즈’보다는.”

“하지만 크리스타 에드워즈는….”

“맞아, ‘크리스타 번햄’이 아니지. 걔가 굳이 어머니 성을 따르기로 한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야. 나는 그 이유가 아나이스의 기사를 쓰지 않는 이유랑 같을 거라고 생각해.”

‘번햄 공작은 지독한 개자식으로 악명이 높거든.’ 브리가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사뭇 시원스러운 태도였다.

그리고 나는 자신 있게 말하는 브리아나 모슬리를 따라서 손해 본 적이 없었다. 크리스타 에드워즈에게 드리워져 있었던 의심의 그림자는 이제 완전히 걷혔다고 봐도 되었다.

그렇다면 그 기사는 도대체 누가 썼다는 말인가? 아무리 고민해 보아도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아나이스 오브라이언의 명예를 어떻게든 실추시키고 싶어 하는 사람. 동시에 내가 기척을 읽어 내지 못할 만큼 단련된 사람. 동시에 신문부원들의 눈을 피해 피츠시몬스 타임즈를 감쪽같이 바꿔치기할 정도로 잠입에 능숙한 사람.

“만일 이 사건이 개인적인 원한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내가 머리를 쥐어뜯는 동안 브리는 검지를 턱에 대고 골몰했다. 그녀가 흘리듯 중얼거렸다.

“정치적인 의도가 있다면, 어쩌면….”

“정치적인 의도?”

“오브라이언 공작가는 히스론드 대교구로 대표되는 귀족파의 축으로 알려져 있어. 내 생각에 아나이스의 ‘선생님’은 마빈 도넬리 준남작일 것 같은데, 그는 공작의 오른팔이기도 하거든. 평민 출신이면서 귀족 자제들을 직접 교육할 정도로 똑똑하다던.”

도넬리, 도넬리… 브리아나가 던진 이름을 혀 끝에서 굴려 보았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발음이 퍽 익숙했다. 굉장한 사람이었구나, 그 늙은이. 대충 봤을 때는 그저 범상하기만 했는데. 배도 나오고. 수염도 이상하게 기르고.

“추문이 널리 퍼지면 오브라이언 공작과 도넬리 준남작의 사이는 멀어질 수밖에 없어. 어쩌면 이걸 노린 걸 수도….”

“그렇게 되면 누가 이득을 보는데?”

“당연히 일레스티아 왕당파지. 케이틀린 대제와 그녀의 후계자에게 충성하는.”

“네 말은, 켈란 일레스티아가 사건의 배후라는 거야?”

“황태자 본인이 엮여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어. 가능성은 있지만.”

“으, 고려하고 싶지 않은 가능성인걸. 걔가 그렇게 지저분한 방법을 쓸 거라고는 믿어지지 않거든.”

“아, 순진한 아리엘. 우리의 황태자 전하가 소문처럼 철혈 황제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면 열아홉까지 살아남을 수 없었을 거야.”

브리아나는 빈정거리는 와중에도 손에 쥔 막자를 부지런히 놀려 사발 속 내용물을 빻아 댔다. 이내 적당히 가루가 된 키마이라의 발톱을 휴대용 무쇠솥에 털어 넣자, 녹색과 보라색이 오묘하게 섞인 연기가 피어올랐다.

마법 약 과목은 학기 말에 시험이 없는 대신 직접 조제한 약을 제출해야 했다. 험프리스 교수는 깐깐함의 화신이나 다름이 없었으므로, 브리의 ‘어떤 음식을 먹든 간에 감자 포타주 맛이 나게 하는 마법 약’은 결점 하나 없이 완벽해야만 했다.

“굳이 왕족을 만나야 하겠다면 라모스로 해. 적어도 속이 꼬인 타입은 아니잖니. 살짝 불량하긴 한데, 그것도 나름대로 매력 아니겠어?”

“야, 갑자기 무슨…!”

“다만 네 친구로서 내가 응원하는 쪽은 항상 빌라드였다는 거 알아 두렴. 고작 신분 때문에 탈락되기에는 너무 아까운 애니까.”

“내가 뭘 하면 그 화제에서 벗어나 줄래?”

바닥이 세모지게 가공된 유리병 하나가 손아귀에 쥐어졌다. 방금까지만 해도 무쇠솥에서 끓어오르던 브리아나 모슬리의 마법 약이었다. 나는 혀를 차며 그것을 받아넘겼다. 아주 걸쭉하고 건더기가 없는 감자 포타주를 마시는 기분이 들었다.

***

“마나 서명 알고리즘은 몇 가지나 알고 있어?”

“내가 쓰는 것만… 바르가스의 법칙이었나?”

“이 아저씨 말하는 거야? 네가 무자비하게 찢어 놓은? 겁나 화난 거 같은데?”

마디가 거친 손가락이 내 마과학 교재의 귀퉁이를 짚었다. 에드가의 말마따나 바르가스 박사의 초상화는 코와 입 부분을 제외한 머리통의 반절이 사라져 있었다. 아마 나머지 반은 켈란에게 전해진 언젠가의 쪽지에 포함되어 있을 거였다.

스스로의 모습이 그리 멋지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런가, 초상화의 입매는 엎어 놓은 그릇 같은 형태가 되어 있었다. 얼마나 다행인지. 만약에 남아 있는 부분이 눈이었고 그게 교재를 펼칠 때마다 나를 쏘아봤다면, 차마 공부할 엄두가 나지 않을 거였다.

“그가 슬퍼지지 않게끔 근사한 장식을 해 주자.”

나는 선심 쓰듯 깃펜을 놀려 바르가스 박사의 귓불에 반짝거리는 보석을 달아 주었다. 그러자 가파른 포물선을 그리던 입매가 다소 완만하게 누그러졌다. 하지만 난입한 에드가의 깃펜이 고양이 수염 같은 것을 볼에 그어 대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야!”

“바르가스 박사가 귀여운 걸 좋아하는 타입일 수도 있잖아.”

“아닌 것 같은데.”

제이든이 다시금 바르가스 박사의 초상화를 가리켰다. 그는 이제 무언가를 외치고 있었는데, 마법 잉크가 소리를 담아내지 못하는 한 섣부른 확신은 금물이었지만 입모양만 봐도 대충 욕임을 알 수 있었다.

“미안. 도와주려고 했지.”

에드가가 실실 웃으며 팔꿈치를 어깨 위로 들어 보였다. 태도가 여간 뻔뻔스럽지 않은 게 애초에 깽판을 놓을 작정으로 그 짓거리를 한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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