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사랑의 달 연회 둘째 날에 여자 기숙사 뒤쪽에서 나를 본 적이 있는지.”
아카데미를 걷다가 하늘을 올려다보면 높은 확률로 용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린 용들이 사육장에 얌전히 있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기 때문이다. 걔네는 온종일 피츠시몬스의 구석구석을 누비다가 배가 고프거나 졸리면 사육장으로 돌아가는 게 일과였다. 즉, 어쩌면 내가 아나이스를 목격한 순간에도 용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다.
클레이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용의 지성은 인간 그 이상이었다. 수백, 수천 년의 시간을 살아온 고룡들이 현자로서 활약하는 전설을 당장 세 가지는 댈 수 있었다. 만일 용이 아나이스를 음해한 자식의 얼굴을 보기라도 했다면,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물어볼 수는 있겠지만… 너도 알다시피, 나는 지금 우리가 하는 것처럼 용과 ‘대화’하지 않아. 어렴풋이 의사를 전달받을 뿐이지. 네가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할 수도 있어.”
제이든의 말투는 조심스러웠다. 나는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단서 하나하나가 소중한 상황이라고도 덧붙였다. 제이든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혹시, 이게 본론이었어?”
나는 돌과 돌 사이를 열정적으로 긁었다.
***
마르퀴즈 볼턴은 친구가 없는 걸까, 주말에 만날 친구가 없는 걸까, 주말에 만나서 마법 빗자루 비행장까지 같이 가 줄 친구가 없는 걸까?
“네가 이해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 정도 위치에 있으면 아무나 만나지 않아.”
“이런, 나의 마음의 소리가 들렸나?”
“너는 마음을 입 밖으로 내놓고 사나 보지?”
볼턴이 빈정거리며 직원의 손에서 빗자루를 낚아채었다. 떡갈나무 몸체에 만티코어 갈기를 엮어 솔로 사용한 빗자루였다. 매장 내에서 가장 쿠션감이 좋은 제품이라고 하길래, 나도 같은 것으로 받았다. 조금 비싼들 무슨 상관이리. 어차피 내 주머니에서 돈이 나가질 않는데.
죽음의 문턱에서 되살아난 이후에도, 아리엘 달튼은 여전히 마르퀴즈 볼턴의 데이트 코스 실험용 개구리였다.
로즈마리 블로썸의 정체를 깨닫고 나니, 나는 볼턴의 애달픈 짝사랑을 도무지 응원할 자신이 없어졌다. 어차피 진엔딩을 목적으로 한 만큼, 볼턴이 가질 수 있는 것은 블로썸의 1/6에 불과했던 것이다.
어쩌면 1/6이 과분할 수도 있었다. 내가 보기에 블로썸은 볼턴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카일은 블로썸을 자극하지 않고 학생회의 누군가와 어울려야 한다면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셋이라고 했다. 에드가, 제이든 그리고 볼턴. 뭐랬더라, 에드가의 경우 그의 형제가 블로썸의 ‘잡아 놓은 물고기’라 문제가 없을 거고, 제이든은 아직 때가 아니라나.
볼턴을 꼽은 이유는 그가 블로썸의 ‘최애’도 ‘차애’도 아니라는 점에 있었다. 나는 ‘최애’나 ‘차애’가 뭘 의미하는지 몰랐지만 볼턴에게 그다지 좋은 뜻이 아니라는 건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법 빗자루에 올라탔다. 주말에, 볼턴과 함께, 언제 있을지 모를 데이트를 위해. 어떠한 계기도 없이-있었지만, 대외적으로는-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바꾸는 건 이상하게 느껴질 것 같아서 그랬다. 덤으로 떨어지는 빵 조각도 주워 먹고 말이다. 내가 지극히 속물적인 사람이 아니었다면 볼턴의 애정 전선에는 폭풍우가 일었을 거다.
비행이나 순간 이동 마법이 보급된 후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나의 부모님 대에도 비행용 빗자루는 구시대의 유물이었다. 피니건 거리에 빗자루 비행장이 우후죽순 생긴 건, 그래서 자연스러운 사회 현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유행은 항상 두 바퀴를 돌아서 오곤 했으니까.
전에도 이맘때 한바탕 붐이 일었더랬다.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 내가 거기서 금화를 쓴 만큼의 재미를 뽑아낼 수 없을 거라고 판단했으므로, 당시에는 별 흥미가 없었다. 열리는 지갑이 남의 것이라면 사정이 달라졌다.
“달튼, 그게 최선이냐?”
“시끄러워. 난 나만의 스릴을 즐기고 있다고.”
비행장에 들어서자마자 땅을 박차며 사라졌던 볼턴이 나를 놀리러 돌아왔다. 내 빗자루가 바닥에서 고작 8피트가량 떠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긴 했는데, 나름대로는 재미를 느끼는 중이었으므로 대꾸할 말이 많았다. 빈약한 마나 보유량으로 인해 비행은커녕 부유조차 어려운 나로서는 드물고 귀한 경험이었다.
“재작년에 태어난 내 막냇동생이 너보다 잘 타겠다.”
“과연 재작년에 태어난 네 막냇동생에게 이렇게 화려한 곡예비행이 가능할까?”
내 비행은 고도가 낮을 뿐이지 실력이 떨어지는 게 아니었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크게 원을 그리자, 볼턴은 코로 웃었다. 그러더니 나의 회심의 기술을 손쉽게 훔쳐 냄은 물론이요, 배면 비행에, 급상승, 급하강, 아주 생난리를 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잔뜩 약이 올랐다. 치솟는 분함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볼턴의 구레나룻이라도 당겨야 했다. 주변을 뱅글뱅글 돌며 얄밉게 나부끼는 회색 머리채를 쥐기 위해 허우적대던 와중이었다. 방심한 순간 몸의 중심이 확 무너졌다.
“헉, 달튼!”
“악!”
마력선의 항로를 침범한다든가, 질서를 지키지 않고 위험하게 비행한다든가 하는 문제로 마법 빗자루는 비행장 외부에서의 사용이 권장되지 않았다. 모든 비행장에 안전 요원과 치료사의 고용이 필수적인 이유였다.
하지만 그게 당장의 고통이 줄어든다는 뜻은 아니었다. 8피트 낙하도 낙하였고. 또 채프먼 교수는 빨래를 짜는 주문과 어긋난 뼈를 맞추는 주문이 근본적으로 동일하다고 했다. 나는 곧 빨래 꼴이 될 척추뼈를 상상했다.
상상만 했다.
딱딱한 자갈들 대신에 단단한 팔뚝이 내 날갯죽지와 오금을 받쳤기 때문이다.
어깨에 따뜻한 체온이 닿았다. 꼭 감았던 눈을 슬며시 떠 보았다. 5할 이상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연회의 왕으로 자리매김한 학생회장의 눈부신 미소가 지척에 있었다.
“조심해야지.”
“어, 어….”
“나도 반가워, 아리엘. 오랜만이지?”
플로렌스 벨의 세계에서 알게 된 건데, 얘는 기분이 나쁠수록 웃는 경향이 있었다. 나는 켈란이 꽤나 화가 난 상태임을 직감했다. 블로썸이랑 싸웠나? 그의 품에 안긴 채 시답잖은 생각이나 하다가, 별안간 비행장의 인공 하늘을 누비던 사람들의 시선이 어디로 향했는지를 깨달았다. 볼이 화끈거렸다.
“오랜만, 음, 잘 지냈어? 나는 잘 지냈는데… 이제 내려 줄래?”
내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조그마해졌다. 켈란의 입꼬리는 그에 반비례하여 올라갔다.
“싫어. 내려 주면 도망갈 거잖아.”
뻔뻔하게 굴기에는 근래 내가 금색만 봤다 하면 꽁무니를 뺐던 터라 면목이 없었다. 나는 섣불리 대답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눈을 굴려 빠져나갈 경로를 탐색했다. 출입구가 두 곳이니까, 잘만 하면….
“도망갈 방법 찾는 거 다 알아.”
턱에 눈이 달렸나? 앞만 보고 있으면서 어떻게 알지?
“턱에 눈이 달렸나? 라고 생각하는 것도 알아. 너도 내가 인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좋겠네.”
“와, 씨.”
손가락 하나로 누군가의 삶을 조져 버리는 것이 가능한 남자의 다정한 협박에는 어떤 저항 의지도 꺾이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었다. 나는 발버둥치는 대신 머리를 최대한 켈란에게 붙였다. 그렇게 하면 얼굴이 조금이라도 가려질까 봐서였다. 팔은 죽은 듯이 늘어뜨렸다. 잘하면 아주 심각한 부상자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켈란의 걷는 박자에 맞추어 몸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보다 빠르게 박동하는 심장 소리를 이백쯤 세었을 때 손끝에 우툴두툴한 감촉이 닿았다. 나무 같았다. 기다란 게 줄지어 놓인 형태로 미루어보아 빗자루 진열대를 지나치는 중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기회는 지금이었다. 나는 손끝을 스치는 빗자루 중 가장 가까운 것을 움켜쥐고 켈란에게서 벗어났다. 잽싸게 올라탄 뒤에는 미리 봐 두었던 출입구를 향해 달렸다. 완벽한 도움닫기였다.
자유다!
***
“아리엘.”
“응….”
“비행용 빗자루는 비행장 밖에서 속도가 제한된다는 안내문 못 봤어?”
“응….”
희대의 탈출극이 벌어진 정확히 십 분 뒤, 나는 켈란의 약 2피트 위의 하늘에서 그와 나란히 가고 있었다. 빗자루에 아무리 마나를 쏟아부어도 가속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오랜 지병으로 인해 나는 8피트보다 높은 고도에서 비행할 수 없었다. 그건 켈란의 키가 대충 3피트보다 작지 않은 이상 그의 시야를 속이기란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시무룩하게 대답하자 켈란이 웃겨서 죽으려고 했다. 꽤나 오랜 시간을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호흡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바람을 맞아 뒤집어진 앞머리 사이로 근사하게 드러난 이마 역시 물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약간의 경외감을 느끼며 빗자루를 늦춰 그가 걷는 속도에 맞추기로 했다. 아예 빗자루에서 내려오지 않은 것은 일말의 자존심이었다.
“왜 도망쳤어?”
“너는 왜 쫓아왔는데?”
순순히 ‘전지전능한 능력을 지닌 로즈마리 블로썸이 눈에 불을 켜고 너나 나를 감시하는 중이다’라고 말하기에 우리 사이에 놓인 시스템의 장벽은 8피트보다 훨씬 높았다. 내가 되물을 줄은 몰랐는지, 켈란은 일순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 왜 그랬을까?”
“그게 뭐야. 여기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고?”
“내 부관이 좀 충성스러워야지.”
“개자식.”
“방금 속마음이 나온 거 같은데.”
“겉마음이야.”
나는 켈란이 등장하자마자 인공 하늘의 별이 되어 사라진 마르퀴즈 볼턴의 작태를 곱씹으며 이를 갈았다. 내가 다음에 걔랑 또 어딜 가면 삼두견의 왼쪽 머리통이다.
“꿈에 네가 나오질 않아.”
저주용 돼지 피와 까마귀 깃털이 서랍 어디쯤에 있던가를 생각하고 있는데, 켈란이 대뜸 말을 던졌다.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린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