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카일은 블로썸에게 켈란 일레스티아의 ‘버그’를 잡을 때 나의 것도 함께 처리했다고 거짓말했다. 즉 블로썸은 내가 켈란처럼 실에 묶여 있는 줄로만 알고 있다는 거다.
그녀의 입장에서 그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갔다는 뜻이 되었다. 켈란은 블로썸의 상대역 자리로, 나는 갈색 머리칼에 파란 눈동자를 지닌 배경 인물의 자리로. 그래서 블로썸은 요즘에 나에게 그다지 박하지 않았다.
한 번은 주변에 아무도 없었는데 갑자기 아는 체를 하기도 했다. 나는 그녀를 자극하지 않기 위하여 지극히 배경 인물답게 굴었다. 입꼬리를 엄지손톱만큼 올린 뒤, 더도 덜도 아닌 두 음절만을 내뱉은 것이다. 안녕, 하고.
불상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카일은 나에게 되도록이면 블로썸과 마주치지 말 것을 부탁했다. 지금 상황의 우리에게는 블로썸에 대항할 만한 무기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대개 나는 싸움을 피하기를 선호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얌전히 그의 말에 따랐다. 쓸 만한 핑계라고 생각해서였다. 내가 블로썸에게서, 그리고 블로썸과 깊게 엮인 켈란과 카일에게서 거리를 두는 것에 대한.
카일은 그의 충동적인 고백이 나에게 어떠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게끔 노력하겠다고 했다. 허세는 아니었다. 그날 이후에도 카일과 나의 사이는 제법 괜찮았다.
물론 항상 괜찮지는 않았다. 하지만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카일은 정말 눈치가 빠른 애여서, 내 눈썹이 약간이라도 일그러졌다 싶으면 즉시 가벼운 태도를 취했다.
문제는 나에게 있었다. 나를 짓누르는 바윗덩이에.
그러니까, 죄책감이었다. 줄 생각은 없으면서 받는 기분에 취하는 게 맞나 싶어서.
더구나 나는 아직도 중정에서 만난 켈란 일레스티아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나로 인해, 카일의 손으로, ‘고쳐진’ 모습을.
켈란은 나와 같은 수업을 듣지도 않았고, 수업이 없는 시간에는 주로 블로썸과 팔짱을 끼고 다녔다. 그래서 켈란과 멀어지기 위해서는, 카일과 달리 별로 기를 쓸 필요가 없었다.
나는 혼잡한 복도를 지나가지 않는 것만으로 그와 얽히지 않을 수 있었다. 켈란도 블로썸도 어지간한 인기인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이 함께하는 장소는 언제나 사람으로 붐비곤 했다.
인파 너머 켈란과 시선이 맞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 눈맞춤이 부자연스레 늘어지는 경우도. 하지만 내가 먼저 고개를 돌리고 나면 그것은 어김없이 끊어졌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이다.
다행이었다. 동시에 쬐끔 실망스러웠다. 복잡스러운 기분이었다.
모두가 선망하는 학생회장과 은밀하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우리가 어느 정도의 친밀감을 쌓았다는 착각에 빠졌다. ‘패치 노트의 해독’이라는 공동의 목표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말이다. 그 목표가 켈란의 의식에서 지워진 지금에 와서야, 모든 것이 명백해졌다.
아무튼 그랬다. 시험을 몇 주 앞둔 시점에 나는 내가 아는 가장 똑똑한 사람들과 가까이 지낼 수 없게 되었다. 그 다음으로 똑똑한 건 나의 룸메이트 브리아나였는데, 브리는 요새 아나이스 건으로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나 있어서 시험 같은 거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녀가 죽고 못 사는 월시마저도 문전박대를 당할 정도였으니 어지간했다.
그리하여 나는 제이든 스펜서에게 매달렸다. 제이든이 성적이 좋다는 소문은 들어 본 기억이 없으나, 그도 엄연히 밀루아인이었다. 낙제가 간당간당한 나보다는 마과학에 일가견이 있을 게 분명했다.
“제이든, 나 좀 도와줘.”
오늘의 검술 수업에서, 무어 교수는 드디어 그의 ‘용감한 밀루아 소녀’ 레파토리가 식상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나를 평소처럼 일레스티아의 성기사와 붙이지 않았다. 대신 밀루아의 영웅과 붙였다.
제이든은 볼턴 같은 변태와는 다르게 약점만을 공격하는 짓거리는 하지 않았다. 재빠르게 뒤로 돌아 내리찍는 목검을 가까스로 막아 내고 나니 속닥거릴 만한 자세가 되었다. 내 말에 제이든이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뭔지는 알고 도와준다는 거야?”
웃느라고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제이든의 굳은 입매에도 슬그머니 미소가 번졌다.
“국가 전복 계획이야?”
“당연히 아니지!”
“그럼 도와줄게.”
나는 제이든이 말하는 사이 그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검을 돌릴 여유가 없었으므로 손잡이 뒷부분으로 명치 쪽을 쳤다. 제이든이 몸을 뒤로 빼자, 순간적으로 근육에 힘이 들어간 탓인지 면 상의가 팽팽하게 달라붙었다.
어디선가 휘파람이 나왔다. 내가 아는 후배 중에 제일 발칙한 켄드라 브래들리임에 전 재산을 걸 수 있었다.
“기사다운 태도라고 할 수는 없겠는데.”
“용병에게 검을 배워서 그래. 여기가 야외였으면 눈에 모래라도 끼얹었을걸.”
말만 들어도 시린지 제이든이 눈을 끔뻑거렸다. 다시금 그의 빈틈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제이든은 그의 검으로 나의 검을 밀어내듯이 쳤다. 그가 평소에 아이의 키만 한 대검을 몽둥이처럼 썼으므로 가능한 동작이었다.
예상치 못한 충격에 손아귀에 힘이 풀렸다. 내 손을 떠난 연습용 목검은 정확히 두 바퀴하고 반을 돌고 페드로 캔트렐의 이마를 쳤다. 그의 이마가 시뻘겋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캔트렐은 월시 패거리 중 하나였으므로 나를 아주 싫어했다. 또한 지독한 계급주의자였기 때문에, 눈만 맞으면 나와 달튼을 모욕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뭐라고 변명하건 간에 그는 내가 일부러 자신을 노렸다고 굳게 믿을 게 분명했다. 툭 튀어나온 주둥이를 실룩거리는 모양새가, 이미 고오귀한 백작가 후계를 상처 입힌 괘애씸한 자작가 계집애의 만행을 고발할 단어들을 장전해 놓은 듯했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내가 억울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캔트렐, 야, 이마가 그만큼 나오니까 입이 덜 나와 보인다. 축하해!”
정답은 캔트렐의 불행을 진심으로 즐김으로써 그의 기대에 부응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면 캔트렐의 오해는 오해가 아니게 되므로, 내가 억울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너, 이 미친….”
고오귀한 백작가 자제의 목구멍에서 처언박한 욕설이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웬 목검이 내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여유롭게 날아 캔트렐의 부어오른 이마를 강타했다.
아무리 뭉툭하게 마감된 나무토막일지언정 맞은 데를 또 맞았으니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었다. 캔트렐은 이마를 싸쥐고 신음했다. 훈련장에 모인 이십여 명의 고개가 느릿하게 돌아갔다.
“아리엘 말이 맞는 것 같았거든.”
이목이 집중되자, 제이든은 성실히 답했다. 너무 진지한 표정이라서 농담인지 아닌지 헷갈렸다. 캔트렐은 갖은 꼬라지를 부릴 양으로 바닥을 차며 일어섰다가, 상대가 고오오귀한 공작가의 후계이며 대륙 유일의 용기사임을 깨닫자 무력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근데 다시 보니까 아니네. 미안.”
전의를 상실한 캔트렐에게 제이든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요만큼도 미안함이 느껴지지 않는 동작이었다.
***
페드로 캔트렐의 이마를 깨뜨린 죄로, 나와 제이든은 검술 수업의 뒷정리를 도맡았다. 무어 교수는 우리가 캔트렐의 피가 묻은 목검을 정성스레 닦으면서 어떤… 전우의 소중함 같은 걸 느끼기를 바란 모양이었다.
제이든은 어떨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캔트렐의 핏자국에서 다른 것을 느꼈다. ‘파란 피가 아니네.’ 심드렁하게 중얼거리자 제이든의 입매가 둥글어졌다.
“그래서 내 부탁이 뭐였냐면… 혹시 마과학에 뛰어난 편이야?”
내 질문에 그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 되물었다.
“어느 정도면 뛰어난 거야?”
“음… 일단 나보다는….”
“뛰어나.”
퍽 단호한 대답이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왔다. 나는 손날로 쓸어 담던 쌀알 한 줌을 씩씩거리며 집어 던졌다. 분을 삭이지 못한 캔트렐의 목검에 무참히 꿰뚫린 더미의 내장이었다. 그것들은 제이든의 두툼한 팔뚝에 사정없이 튕겨 바닥의 돌이 깨진 틈새로 끼어 들어갔다.
“내 마과학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는구나?”
“로건이 내 사촌형이라는 걸 잊지 마.”
그제야 마과학을 담당하는 휴스턴 교수의 풀 네임이 로건 스펜서 휴스턴이고 그가 밀루아의 최고위 귀족이라는 사실을 떠올려 냈다. 밀루아 중앙 사교계에서 스펜서 공작가와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은 가문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반박 대신 바닥의 균열을 손톱으로 찌르기를 택했다. 쌀알들이 튀어나왔다.
“시험 범위가 어디까지야?”
“확장 가능성 계산식부터 마나 서명 암호화까지.”
“그중에 네가 자신 없는 부분은?”
“확장 가능성 계산식부터 마나 서명 암호화까지.”
제이든은 둔화 주문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멍해졌다. 그러고는 이내 잘못 말한 거냐고 물었는데,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듯했다. 나는 힘주어 고개를 저었다.
마과학은 나에게 언제나 미지의 영역이었다. 나는 휴스턴 교수의 수업을 다섯 번이나 들었지만 아직도 흡수-배출 구조를 설명할 수 없었다.
애초에 마법 회로라는 게 마나를 흘리지 않고 목적한 대로 동작시킬 수만 있다면 장땡인 것이 아니던가. 나는 남들보다 긴 시간 동안 아카데미를 다니면서 다양한 탐구에 몰두하였지만 굳이 어떠한 법칙에 맞게 마법 회로를 설계해야 하는 이유는 찾지 못했다.
또 나는 잠이 많은 편이었으며 마과학 수업은 언제나 아침 댓바람부터 있었다. 카일은 자는 사람을 온갖 방법으로 숨기는 데에 천부적이었다. 그렇게 말하자 제이든은 갑자기 턱을 쓰다듬었다. 어디로 보나 긍정적인 제스처는 아니었다.
“분명히 도와준댔어. 무르기 없기야.”
“네가 간절하다면 내가 베풀어 줄 수도 있는데.”
우리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는지, 마르퀴즈 볼턴이 안경을 추켜올리며 다가왔다. 나는 그와 대거리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실수를 가장하여 그의 새하얀 튜닉에 캔트렐의 피를 묻혔다. 볼턴은 비명을 지르면서 사라졌다.
“마과학이라면 확실히 나보다는 마르퀴즈가 성적이 좋을 거야.”
“너 내가 쟤한테 춤 배우는 거 봤어, 못 봤어?”
이제 제이든이 돌바닥에 낀 쌀알들을 구출해 냈다. 그건 나와 제이든의 사이에서 더는 할 말이 없다는 신호인가 보았다.
나는 승리감에 취해 깔깔거렸다. 볼턴이 도망치고 나서 검술 훈련장에는 아무도 없게 되었으므로, 웃음소리는 높고 굽은 천장을 타고 조용한 공기를 뒤흔들었다.
“아, 그리고 내친김에 이것도. 혹시 사육장의 용들한테 뭐 하나만 물어봐 줄 수 있어?”
“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