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켈… 레스티아?”
깜짝 놀라 돌아보니 켈란 일레스티아가 나타났다. 이것저것 생각하는 사이에 중정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살짝 굽이진 금발 위로 달빛이 담겨, 새벽의 켈란은 낮의 켈란보다 두 배쯤 잘생겨 보였다.
“하하, 우리 벌써 그런 사이 됐어, ‘아리엘’?”
켈란이 소리 내어 웃고는 바지를 툭툭 털어 냈다. 방금까지 애용하던 벤치에 앉아 있었는지, 여러 가지 모양새의 나뭇잎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러고 보면 그는 특정 시간만 되면 중정에서 누구를 기다려야 하는 병을 앓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이 분명 새벽은 아니었을 텐데.
더구나 요새 들어서는 아침에도 켈란의 병증을 목격할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끝내 기다리던 사람을 만났나 싶었는데, 단순히 시간을 바꿨나? 의아하여 갸웃대려니, 켈란이 선수를 쳐서 물었다.
“이 시간에 여기는 어쩐 일이야?”
“너야말로, 여섯 시간쯤 뒤에 왔어야 하는 거 아냐?”
내가 그의 기이한 버릇을 언급한 순간이었다. 초승달 조각처럼 반짝이는 속눈썹 아래 눈동자가 순식간에 흐리멍덩해졌다. 로즈마리 블로썸이 전학 오던 날, 마과학 교재 귀퉁이에 글씨를 써서 던졌을 때와 비슷한 표정이었다.
이윽고 그가 조용하게 말했다. ‘그랬나?’ 발성 기관을 거쳐서 나왔다기에 지나치게 굴곡이 없는 어조였다.
“그랬냐니, 너 3월부터 계속….”
“그랬나?”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메아리가 울렸다. 뭔가 이상했다. 당황하여 화제를 돌렸더니 이번에는 평범하게 대화가 이어졌다. 이를테면 그가 차지한 영광-‘연회의 왕’은 올해도 떼어 놓은 당상이었다-이라든가, 다가올 시험, 월시의 예복보다 고급스러운 그의 잠옷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이른 아침의 중정과 낡은 벤치, <패치 노트>나 로즈마리 블로썸에 대해 떠들자 켈란은 다시금 ‘그랬나?’라고 했다.
나는 금방 이른 아침의 중정과 낡은 벤치, <패치 노트>의 공통점을 찾아내었다. 그러자 목구멍 안쪽이 모래라도 삼킨 마냥 까슬까슬해졌다. 속은 마구 울렁거렸다. 누가 내 갈비뼈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내용물을 쥐고 흔들면 이런 느낌일까. 나는 치미는 토기를 참아내며 끔찍스러운 잡념 대신 슬리퍼 밖으로 삐져나온 발가락에 집중했다.
“있잖아, 카일이 그러는데, 너랑 나는 ‘게임’이라는 거의 등장인물이래….”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게 하면 눈꺼풀에 내려앉은 무력감이 떨어져 나가기라도 한다는 듯이.
“그랬나?”
예상하던, 동시에 아니기만을 바라던 대답이 돌아왔다. 완전히 동일한 어조였다. 아마 입술이 그리는 소름끼칠 만큼 매끄러운 호선도, 허리를 곧게 펴고 오른 다리를 약간 구부린 자세도, 고개를 기울인 각도마저 변함이 없으리라.
“제발, 켈란 일레스티아!”
그래서 나는 이제 켈란에게 거의 매달려야만 했다.
“‘마녀의 길’이나 ‘운명의 물레’, 케이틀린 대제는 전부 알고 계셨어! 그녀에게 보낸 편지는 어떻게 된 거야?”
“…….”
“너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억하고 있었잖아!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았던 일들 말이야!”
카일의 밴시 분장이나, ‘애덤 윌리’, 그리고 나를 애칭으로 불렀던 사건 같은 것들을 되뇌는 반대 면에는 다소 못된 마음이 있었다. 부디 네 실에 묶인 매듭이 네 혀를 묶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게 해 줘. 속으로 빌었다. 모든 게 나 때문이라고 말하지 말아 줘.
“그랬나?”
그러나 필사적으로 굴면 굴수록 나는 켈란 일레스티아가 얼마나 망가져 있는지만 실감할 뿐이었다. 삽시간에 짙은 죄악감에 젖어 들었다.
낡은 괴담 속의 우물에라도 빠져 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깊고 또 습해서, 이끼와 곰팡이와 물 썩은 내로 가득한 우물 말이다. 손을 내밀어도 아무도 잡지 않고, 도움을 요청해도 아무도 듣지 않는.
***
‘얼음 여왕’의 권위 잃은 A.오브라이언, 덤불 뒤로 숨겨진 열정이 향하는 곳은… ‘선생님 사랑해요♡’
이변으로 가득했던 사랑의 달 연회가 마침내 막을 내렸습니다. 저희 취재팀으로서는 그야말로 대목이 아닐 수 없었죠. 흥미진진하기 그지없는 ‘연회의 여왕’ 경쟁과, 여기저기서 오가던 분홍빛 시선, 그리고 피츠시몬스 상공에 나타난 마력선 때문에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저희를 열광해 마지않게 만든 소식은 따로 있었습니다. 자그마치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모두를 애태웠던 그녀가, 마침내 피츠시몬스 타임즈에 등장할 준비가 되었나 봅니다. 그것도 아주 제대로요.
그렇습니다. A.오브라이언입니다. 일레스티아의 순결한 장미가 방앗간에 먼저 필 줄을, 누가 알았을까요.
때는 바야흐로 사랑의 달 연회의 사흘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취재팀이 그녀를 발견한 장소는 아주 으슥한 곳이었습니다. 그녀가 ‘선생님’이라 부르는 중년 남성의 품에서, 레이디 오브라이언은 얼굴을 가리기 위해 선택한 덤불의 꽃보다도 가냘파 보였죠.
두 사람 사이에 오가던 기류를 뜨겁게 달구기에, 다소 큰 나이 차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심지어 그녀는 일레스티아 명문가 영애로서의 삶을 버리고 가정 교사의 부인이 되는 미래를 속삭이기도 했습니다.
굴러온 자수정에게 왕좌를 내어 준 ‘얼음 여왕’의 가슴에 이토록 뜨거운 불길을 치솟게 한 장본인은 중년의 가정 교사였습니다. 그녀가 지난 5년간 어떤 남학생과도 염문을 퍼뜨리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죠. 완전히 무르익은 남성과의 농밀한 연애만이 레이디 오브라이언을 설레게 할 터인데, 풋내기 소년들이 어디 상대나 되었겠습니까.
익명을 요구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녀는 언제나 일탈을 꿈꿨어요….’
(후략)
정신이 혼미했다. 피츠시몬스 타임즈가 묘사하고 있는 장면은 며칠 전에 내가 목격한 장면과 정확히 같았다. 그렇다는 건, 당시 내가 있었던 자리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는 거였다.
기사 훈련을 받았으므로, 나는 인기척을 읽는 감각이 남들보다는 발달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근데 곰곰이 돌이켜 봐도 걸리는 게 없었다. 에드워즈에게 자객의 재능이라도 있었던 건지를 심각하게 고민하던 와중이었다.
“미친 자식들!”
브리아나 모슬리가 길길이 날뛰었다. 피츠시몬스 타임즈에 어떤 정신 나간 기사가 실렸을 때보다 과격한 모습이었다. 그럴 만은 했다. 나는 그녀보다 훨씬 많은 기사를 읽었지만 이만큼 지저분한 내용이 담긴 것은 맹세코 처음이었다.
“그렇게 순진한 애한테 이따위 추문을 붙여? 다 죽여 버릴 거야.”
“오, 브리, 지금 네 손에 들린 게 단검이 아니길 바라.”
내가 룸메이트의 베개 밑에서 나온 흉흉한 물건에 겁을 집어먹자, 브리가 핀잔을 놓았다. 새침한 말투였다.
“이건 단검이 맞아, 아리엘. 그것도 날카롭게 날이 섰지. 내 남자 친구가 아무것도 없는 식당 바닥에서 미끄러져 코가 깨지고, 네가 사경을 헤맨 이후로, 아카데미에 도사린 어떤 위험에도 대응할 수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나는 브리아나가 쫑알거리는 말의 반절가량을 쓰레기 언론이 싸지른 배설물을 사정없이 찢는 소리에 묻었다. 그녀는 아직도 월시의 코가 깨진 것이 내가 걔의 발을 걸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월시가 목숨 걸고 허세를 부리는 자식이라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아무튼 브리아나 모슬리가 아나이스 오브라이언을 아끼는 마음이 내 생각보다 큰가 보았다. 나는 브리와 지독하게 사이가 나쁘던 시절에도 이토록 열이 받은 그녀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제2차 여학생 살롱에서 보였던 아나이스의 모습이 브리아나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불러왔을 수도 있었다. 그날 잠들기 직전에 나누었던 대화가 문득 떠올랐다.
“걔를 동경하고 있었어.”
이불을 코끝까지 올려 덮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녀의 발언 중 극히 일부만을 알아들었다.
“뭐? 월시가 동정이라고?”
브리는 살짝 짜증이 난 듯했지만 그 이상 화를 내지는 않았다.
“아나이스 말이야. 일레스티아 사교계에서 걔는 거의 공주님이거든. 하지만 오늘 보니 그냥 여자애던걸. 그것도 슬픔에 빠진 여자애.”
‘그래서 실망했다는 거야?’ 내가 묻자 브리는 되게 발끈했다.
“장난해? 피츠시몬스에서 나보다 절실하게 아나이스의 슬픔을 이해하고 걔를 거기서 건져 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내 말은, 동경은 우정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거야.”
말인즉슨, 이제 아나이스의 추종자가 아니라 친구가 되기를 택하겠다는 뜻이었다. 나는 브리의 절친 경력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므로, 그녀가 스스로의 팔꿈치 안쪽에 둔 사람들에게 얼마나 극진한지 충분히 알았다. 그리고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게 의미하는 건 하나였다.
어떻게 캐낸 건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지만, 크리스타 에드워즈는 곧 브리아나 모슬리의 무거운 분노를 감당해야 할 것이었다. 덤으로 아리엘 달튼과 엘리자베스 맥카시와 켈리 라미레즈의 분노 또한.
***
한밤중의 침입 사건이 석연치 않게 마무리되었기 때문에, 스태포드 교수는 마법 자물쇠 이상의 무언가로 온실의 경비를 강화할 필요성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녀는 모나한 교수를 통해 삼두견 한 마리를 분양받았고, 그것의 이름을 짓기 위해 공모전을 열었다. 삼두견에게는 이름이 세 개나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샴쌍둥이처럼 붙어 다니는 월시와 그의 친구들을 생각하며 ‘애덤’과 ‘마누엘’, 그리고 ‘페드로’를 적어 내었다. 켈리는 나의 일차원적인 사고방식에 완전히 실망했다고 했다. 그녀는 이름이란 누군가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요소라고 엄숙하게 말했다.
“내 이름이 ‘클라라’가 아니라 ‘켈리’였으니까 아버지가 이민국에 한 자리를 얻은 거라고.”
“나돈식 이름이 아니긴 하지.”
나는 적당히 수긍하며 토룻을 흙과 마나로 잘 덮어 주었다. 그러자 뿌리가 불만스럽게 들썩거렸다. 아무래도 내가 불어넣은 마나의 양이 적절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억울하면 나보다 마법을 잘 쓰는 학생의 화분에 담겼어야지. 화가 났는지 바들바들 떠는 잎을 쿡 찌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얼마나 굉장한 이름을 지은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