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바람의 방향이 바뀐 탓인지, 아니면 엘리자베스 맥카시가 흥분으로 목소리를 키운 탓인지, 나와 카일은 그녀의 멋들어진 청혼 대사를 토시 하나 빼놓지 않고 귀에 담을 수 있었다. 치켜세운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작은 상자를 여는 리즈의 긴 머리가 그림같이 휘날렸다.
여자 친구의 돌발 행동에 굳어 있던 브레넌은 졸다가 들킨 마냥 파뜩 떨더니 이내 입을 틀어막았다. 상자 안에는 수수한 디자인의 반지가 들어 있었다. 보석에 반사되는 빛이 조잡하게 흐트러지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청혼에 사용될 만한 품질의 물건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레넌은 망설임 없이 그것을 집어 들어 손가락에 꼈다. 나는 시야를 좁게 하고 브레넌의 정수리쯤에 집중했다. 찰나 반짝인 것 같았는데, 잘못 본 것 같기도 했다. 아무튼 눈을 암만 비벼도 글씨가 나타나지는 않았다.
카일에게는 아니었나 보았다.
“약혼자가 아니라 피앙세였네. 뭐, 뜻은 통하니까.”
그가 중얼거렸다. 피츠시몬스 최고 정보통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네 능력을 가질 수만 있다면 크리스타 에드워즈는 트롤 엉덩이에 입이라도 맞출 거야.”
“걔라면 그러고도 남지.”
우리는 진흙이 덕지덕지 묻은 회색 엉덩이에 경건하게 입을 맞추는 에드워즈를 동시에 상상하고 숨 죽여 웃었다.
“아, 엘리자베스! 나의 마시멜로, 내 입술에 앉은 나비!”
감격에 찬 브레넌이 약혼자를 얼싸안았다. 리즈의 맑은 웃음소리가 별들 사이로 퍼졌다. 마법 인형 악단이 자아내는 선율에 맞추어 뱅글뱅글 도는 연인은 오르골을 장식하는 도자기 인형 같았다.
어찌나 낭만적인 그림이었는지, 마나탄의 시끄러운 파열음도 그들의 사랑을 널리 퍼뜨리는 축포처럼 느껴졌다. 사랑의 달 연회의 마무리로써 그야말로 완벽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별안간 속이 되게 간지러워졌다. 그래서 카일 쪽을 봤더니, 그도 그렇게 했다. 비단 내 시선을 느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우리는 묘한 기분이 들 정도로 오래도록 마주 보았다. 쉬지 않고 번쩍이는 빛이 그의 녹색 눈동자를 여러 색깔로 물들였다. 눈썹 뼈 아래와 콧대 왼쪽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도무지 줄 수가 없었어. 할아버지의 회중시계 말이야.”
그가 대뜸 지껄였다. 충동적으로 나온 말이었는지, 들쭉날쭉한 어조였다.
“로즈마리 블로썸?”
“로즈마리 블로썸이든, 다른 이름이든.”
“언제부터? 내 말은, 네 실에도 운명이 적혀 있었을 거잖아.”
“음, 내게는 실이 없어. ‘제4의 벽’이 없는 것처럼.”
말하자면, 카일은 세계가 허락한 범위 내에서 어느 수준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것이 그의 역할인 까닭이었다. 얼핏 듣기에 그의 상황은 다른 남자 주인공보다 나은 것 같았다. 그러니까, 삶의 모든 순간 실에 매여 있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의 팔다리가 매여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으므로, 카일의 처지가 그들에 비해 정말로 나은지에 대해서는 확신하기 어려웠다. 몇몇 진실들은 모르는 편이 훨씬 좋았고, 운명을 짜내는 물레의 존재는, 내가 느끼기로, 몰라야 마땅한 진실에 속했다.
더구나 실이 없다고 해서 카일의 삶이 매여 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스태포드 교수의 온실에서 목격했던 핏줄기가 뇌리에 되살아났다. ‘제4의 벽’이 없더래도, 세계가 드리운 어떠한 올가미 속에 그가 놓여 있음은 틀림이 없었다.
“실이 없으니, 시스템은 내 감정을 강제할 수 없었어. 하지만 아무리 서브 캐릭터라도 공략 대상이잖아. 방법이 필요했지.”
“모든 공략 대상은 블로썸을 사랑해야 하니까.”
“지극히 잠깐, 고통은 좋은 수단이 되는 것처럼 보였어. 하지만 곧 문제가 생겼지.”
“문제?”
“언젠가 무뎌진다는 거.”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5학년에, 카일은 블로썸을 떠올리지 않을 때마다 찾아오는 통증에 마침내 익숙해졌다고 했다.
“‘언제부터’가 아냐, 아리엘. 한 번도 사랑한 적 없어.”
그가 씹어뱉듯이 말했다. 악문 잇새로 어느새 핏기가 비치고 있었다. 황급히 손수건을 꺼내 들이밀자, 카일은 고개를 돌려 피하고 나서 내 손목을 세게 틀어쥐었다.
“야, 뭐 하는 거야!”
“내 심장은 애초 다른 사람의 손아귀에 있었어. 회중시계는 줄곧 걔 거였다고. 아무리 블로썸이라도 그거까지 욕심내서는 안 됐어.”
부러진 나뭇가지의 단면처럼 거칠게 쏟아지는 말투였다. 우리는 코끝이 닿아도 이상하지 않은 거리에 있었으므로, 내게는 그가 오로지 내 모습만을 눈에 가득 담은 것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채 갈무리하지 못한 열기가 일렁이는 것도. 그제야 가슴의 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의문을 지워 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카일이 블로썸에게 품은 감정은 결코 사랑이 아니었다. 그렇게 될 수도 없었다. 그러기에 그는 이미 틈 없이 벅찬 상태였다. 고집은 터무니없이 셌고. 어쩌면 내가 아는 누군가가 카일을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었다. 내가 아주 잘 아는 누군가 말이다.
나는 곧 죽어도 눈치가 빠른 편은 아니었으나 멍청하진 않았다. 삼류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처럼 순진한 척을 하기에 가쁘게 내쉬는 카일의 숨이 너무 뜨겁기도 했다.
“맞아. 블로썸이 진엔딩을 보지 못하는 건 내 탓이야.”
“카일.”
“내가 블로썸을 사랑하지 않아서.”
“카일!”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해서.”
“카일 다미앙 빌라드!”
“내가, 너를….”
힘겹게 꺼낸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둔중한 몸이 느리게 고꾸라졌다. 나는 가까스로 카일을 받아 냈다.
불현듯 그가 빌라드 저택의 울보 도련님이던 시절이 기억났다. 천둥이 무섭다고 난리기에, 꼭 지금처럼 안아서 달래었던 날이. 희미하게 풍기던 약 냄새와 우유 비린내, 깨끗하게 세탁한 옷감의 냄새가 아직도 선했다. 품에 쏙 들어오던 자그마한 소년도.
그날의 소꿉친구는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바람을 타고 훅 끼치는 땀 냄새에 피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여기에 있는 건 어깨가 완전히 여물고 가슴팍이 단단한, 남자였다.
아마도 나를 사랑해 온.
알고 싶지 않을 만큼 기나긴 시간 동안.
***
잠이 오지 않았다. 찬 바람이 절실해서 가능한 오래 걸을 수 있는 산책 코스를 짰다. 아카데미 본관과 별관 건물이 둘러싸는 중정은 이런 상황에서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내 방을 나와 광장을 건너고, 본관을 반쯤 돌아 별관 사잇길까지 가는 동안 들끓는 속이 약간은 가라앉을 것 같았다.
카일은, 걔는 옛날부터 사람 착각하게 만드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심지어, 마베릭을 만나 지옥불 같은 감정에 휩싸이기 전의 일이긴 한데, 내 마음마저 카일에 의해 달궈지던 시절이 있었으니 어련할까.
근데 막상 다가서려 하면 무안하리 만치 벽을 치는 것도 카일 빌라드였다. 그래서 확신할 수 있었다. 피츠시몬스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에 그는 나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가장 친한 친구였고, 친형제보다도 가까운 의형제였고, 항상 서로의 허물을 지적할 준비가 되어 있는 앙숙이었다. 하지만 단연코 연애 대상은 아니었다.
블로썸의 상대역으로써 휘둘리는 와중에 깨닫게 된 걸까? 아니면 그 전에? 무언가 계기가 있었던 건가? 그랬다면 과연 어떤? 솔직히 카일의 입에서 나온 모든 이야기가 충격이었고 밤새도록 고민해 마땅한 것들이었지만, 내 의식은 자꾸만 그의 고백에 사로잡혔다.
그냥 놀리려고 해 본 소리겠지? 걔가 정말로 나를 좋아할 리가 없는데. 지금껏 줄곧 최고의 우정 상이라도 타려는 마냥 해 놓고.
아리엘 달튼의 오십 가지 그림자 중 가장 부정적인 그림자가 떠들었다.
놀리려고? 거기까지 가서? 피까지 토해 가면서? 말도 안 되지. 몇 년을 봤는데 걔를 몰라? 카일은 다른 장난은 다 쳐도 남의 감정 가지고 노는 짓거리는 안 한다고.
긍정적인 그림자가 즉시 반박했다.
야, 네가 2학년이야? 그 대단한 진실들을 보고 듣고 나서 남은 게 그거밖에 없어? 철 좀 들어라.
이성적인 그림자가 힐난을 퍼붓자 감성적인 그림자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기분이 좋았는걸. 뭐가 어찌 되었건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다는 건 10대 여자애를 우쭐하게 한다고. 더구나 상대가 그런대로 잘생기고, 제법 몸이 좋고, 인기는 아주 많은 남자애라면!
맙소사, 아리엘. 마침내 애덤 월시와 헤어질 쯤에 변사체로 발견되었던 낭만적인 그림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였다. 네 생에 그만큼 극적인 사랑 고백이 어디 있겠어! 이건, 그러니까, 계시야. 망망대해에 떠오른 부표라고. 꽉 붙잡지 않으면 20년 전 떠나간 여자 얘기를 아직까지 하는 버트 삼촌처럼 되고 말 거라니까!
하지만 열세 살 이후로 내 안에서 카일이 소꿉친구 외의 존재였던 적은 단연코 없었다. 또 나는 카일을 진심으로 소중하게 여겼으므로, 그를 동정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없었던 감정을 만들어 낼 생각일랑 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걔였어도 그런 거는 바라지 않을 거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채프먼 교수의 애정 어린 싸대기 세 대만에 정신을 차린 카일은 내게 아주 산뜻하게 굴었다. 나의 심중을 얼추 꿰고 있었던 게 분명했는데, 그가 무수히 겪은 ‘가능성’의 어느 갈래는 아닌 듯했고, 그냥 우리는 바라만 봐도 서로의 생각을 대충 알았다.
그래서 나 역시도 내가 어떻게 나오든 그의 마음이 꺾이는 경우는 없으리라는 걸 충분히 이해했다.
“이기적이어서 미안한데.”
꽤나 그럴듯한 개소리였다. 유령처럼 창백한 꼴을 해 가지고는.
“그건 내가 누릴 수 있는 최고로 값진 자유거든.”
나는 비겁하게 울지 않기 위해서 입꼬리를 당겼다. 살짝 심통 난 듯이 목소리가 나왔다.
“멋대로 해. 어차피 내 말은 안 들을 거면서.”
그러자 카일은 대답 대신 씨익 웃었다. 시원한 미소였다.
솔직히 조금 설렜지? 낭만적인 그림자가 다시금 속살대었다. 고려라도 해 봐. 지금까지 없었던 감정이라고 해서 앞으로도 아예 없을 거라는 보장은 없잖아. 어찌나 집요한지 골이 아플 정도였다. 참다못해 소리를 빽 질렀다.
“닥쳐!”
“안녕, 달튼. 괜찮다면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 물어봐도 될까?”
문득 장대비가 그친 직후 맨발바닥에 닿는 흙처럼, 부드럽지만 온도가 낮고, 물기 있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