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잊을 리가 있나. 나는 맹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버그’는 실을 갉아먹는 존재야. 실이 끊긴 캐릭터는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게 되지. 켈란의 운명은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는 거고….”
“그래서 걔가 블로썸을 냉대했던 거구나.”
카일의 설명에 따르면, 버그의 발생 조건 중 하나는 잦은 치트의 사용이었다. 켈란의 실은 블로썸이 사용하던 치트로 인해 어느 순간 가늘어졌다. 그러자 블로썸은 자신에게 마땅한 호감을 보이지 않는 켈란을 불안 요소로 여겨 더 많은 치트를 사용하고 말았다. 그것이 그의 실을 끊어 버릴 거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악순환이었다.
켈란 일레스티아는 카일 빌라드 같은 서브 남주가 아니라 메인 중의 메인 남주였다고 했다. 게임의 패키지, 책으로 따지면 표지에도 그려져 있을 정도로 말이다. 로즈마리 블로썸은, 무지하게 초조했을 거였다. 일개 배경 인물의 목숨쯤은 별 게 아니라고 여길 만큼.
그렇게 따지면 그녀의 분노에는 정상 참작의 여지가 아주 약간은 있었다. 나라고 해도 표지에 그려진 남주 얼굴에 혹해서 책을 샀는데, 걔가 여주랑 안 이어지면 죄다 불태우고 싶을 거였다.
“근데 왜 나한테 그러는 거야?”
그렇다고는 해도 불태울 대상이 하필이면 나라는 점은 이상했다.
“블로썸은 네가 켈란에게서 발생한 버그의 원인이라고 생각해.”
너무 억울해서 턱이 벌어졌다. 내가 켈란이 잘 때마다 걔 귓가에다가 ‘절대 블로썸 좋아하지 마’라고 속삭인 것도 아니고, 애초에 버그는 그녀가 남발한 치트에서 발생하지 않았던가.
“너희가 최근에 제법 친하게 지냈잖아. 걔 운명에는 네가 없는데. 또 라모스 이벤트를 뺏어 간 것도 있고.”
“뭘 뺏었다고?”
“실습용 마도구 보관실 말이야. 원래 라모스의 운명대로라면 블로썸과 만났어야 했는데, 네가 선수를 치는 바람에.”
그날 새벽, 별관 2층의 복도에서 내 발목을 잡던 원망은 제비꽃 색이었다. 나는 순식간에 많은 것을 이해했다.
“내가 자기를 ‘방해한다’고 여겼던 게….”
“그렇지. 로즈마리 블로썸의 목표는 모든 공략 대상의 호감을 사서 진엔딩을 보는 거니까.”
손가락에 켈란의 실을 걸어 보았다. 단단하게 묶인 매듭이 손마디에 닿았다. 나는 쪼그려 앉아 이것을 묶고 있었을 카일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때의 카일은 눈물을 흘렸으려나? 울보니까, 아마도, 그랬겠지.
카일은 켈란의 실이 끊어졌다는 걸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로썸을 포함한 누구에게도 그것을 알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소꿉친구의 목숨이 경각에 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건 카일에게 그만큼 극단적인 상황에 처하지 않고서는 켈란을 ‘고칠’ 생각이 전혀 없었음을 의미했다.
하기는 나였어도 똑같이 했을 거였다. 카일은 켈란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로즈마리 블로썸의 상대역으로 사는 것을 지켜봐 왔다. 과연 카일이 겪은 많은 ‘가능성’에서 켈란 일레스티아는 언제나 그의 역할에 만족했을까?
사랑하는 플로렌스 벨로 인해 혼란에 빠진 켈란 일레스티아와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글쎄,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켈란이 벨에게서 느껴지는 소름 끼치는 위화감을 감내하는 이유는 오로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근데 사랑의 감정마저 스스로가 아니라 신의 것이라니. 내게 적어도 네 명의 거푸집 자매가 있는 것처럼, 진실이란 건 언제나 잔인하기 마련인가 보았다.
실을 묶는 것으로 켈란을 얼간이가 되게끔 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도로 끊을 수는 없나 싶어 그의 실을 말아 쥐고 당겨 보았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얼굴에서 열기가 느껴질 때까지 안간힘을 쓰다가 포기했다. 그리고 물었다.
“그 ‘공략 대상’에 너도 포함되는 거지?”
내가 알고 있는 몇 번의 졸업 연회에서, 로즈마리 블로썸은 분명히 카일에게 바라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카일이 그녀의 요구를 들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을 돌렸다. 겸사겸사 내게 과일 펀치도 끼얹고.
불현듯 아까 나눴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카일은 그의 회중시계를 전지전능한 로즈마리 블로썸을 꾀는 데에 사용하라고 했다. 블로썸에게 있어 회중시계가 눈엣가시인 나를 치우는 것 이상의 가치가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졸업 연회장의 블로썸은 카일에게서 어떤 것을 받아 내고 싶어 했다. 고릴라여도 유추해 낼 수 있었다. 나는 질문을 바꾸었다.
“블로썸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네 회중시계가 필요해?”
“스티아 신의 티아라, 성녀 에이레네의 묵주, 고룡 이그나스의 비늘, 로즈마리 왕비의 귀걸이….”
그가 내 손아귀에서 켈란 일레스티아의 운명을 털어내며 말했다. 손바닥에 새빨간 자국이 남았다.
“공략 대상들은 공략이 완료되었을 때 그 증표로 자신의 보물을 건네게 되어 있어.”
“네 ‘보물’이 다미앙 할아버지의 회중시계인 거고.”
“맞아. 블로썸의 진엔딩 조건이 충족되기 위해서는 졸업 연회 시점까지 그것들을 전부 손에 넣어야 해.”
“하지만 지금껏 계속 실패해 왔지. 그건 네 탓이야?”
“내 탓이기도 하고, 네 탓이기도 하고, 블로썸, 혹은 켈란의 탓이기도 하고.”
“거기서 나랑 켈란이 왜 나와?”
“‘켈란’?”
아차. 내가 ‘켈란’이라고 부르기로 한 상대는 로즈마리 블로썸이 아니라 플로렌스 벨의 켈란 일레스티아였다. 근데 지금 그게 엄청나게 중요하진 않을 텐데. 적당히 웅얼거리니까, 카일은 바닥에 깔린 실들을 내려다보던 자세에서 고개만 비스듬히 돌려 나를 봤다. 마녀의 솥을 달구는 녹색 불꽃처럼 안광이 일렁였다. 목소리는 잇새로 나왔다.
“중요하지. 왜냐면 그 자식은….”
거기까지 하고 갑자기 침묵이었다. 나는 지나치다고 느껴질 시간 동안 남은 말을 기다렸지만 뚝 잘린 말에 꼬리가 붙는 일은 없었다.
다시 아무렇게나 걸어 돌아가는 길에, 나는 바로 직전의 9개월에서 카일과 켈란 간에 쌓인 역사를 캐내기 위해 애썼다. 카일이 하필이면 우리의 뜨거운 감자 켈란 일레스티아를 두들겨 패서, 형장의 이슬이 될 뻔했던 사건 말이다.
그러자 카일은 갑자기 그의 과도하게 두꺼운 기억의 책에 꽂아 둔 책갈피를 찾지 못하는 척을 했다. 찰나 가엾다고 느끼기도 하였으나, 완전히 속아 넘어가기에 나는 얘가 거짓말하는 표정을 너무 많이 봤다.
‘고집 하고는.’ 정강이를 아무리 걷어차도 카일은 앵무새나 된 것처럼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너는 언젠가 그 고집 때문에 폭삭 망할 거야.”
내가 저주를 퍼붓자 그는 낄낄대며 웃었다.
“이미 폭삭 망한 지 오래인걸. 그 고집 때문에.”
***
도로 마력선으로 돌아왔을 때, 두 마리의 사랑앵무는 선미 쪽 갑판에서 마나탄의 폭발을 구경하고 있었다. 나와 카일은 선루 상부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며 그들을 지켜보았는데, 속삭이는 와중이기도 하고 주변 소음이 크기도 해서 손 고깔을 만들어 귓가에 대도 뭐가 들리지를 않았다.
나는 앉은 자세에서 상반신을 쭉 빼다가 하마터면 굴러떨어질 뻔했다. 카일이 붙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목이 부러지고도 남았을 것이었다.
“야, 그러지 마. 정 궁금하면 더빙해 줄게.”
“너한테는 저게 들려?”
“안 들리지. 근데 뭐라고 하는 건지는 대충 알거든. 전에 봤어서.”
이윽고 그는 높낮이의 폭이 큰 목소리를 번갈아 모사했다. 리즈는 그녀의 기특한 남자 친구가 준비한 것들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브레넌은 갖은 수줍은 척을 하면서도 카일과 나의 공마저 스스로의 몫으로 돌렸다. ‘브레넌 스톡스,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내가 이를 갈자 카일이 쪽쪽거리는 소리를 내다 말고 웃음을 터트렸다.
뽀뽀를 서른 번쯤 하고 나서, 브레넌은 더듬거리며 여자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마침내 ‘결’로 시작하고 ‘혼’으로 끝나는 단어를 입에 담을 각오가 되었나 보았다. 그런데 자꾸만 아무래도 좋은 것들에 가로막혔다. 엄청나게 웃긴 일인극을 보는 것 같았다.
브레넌의 첫 번째 시도는 리즈가 선미의 난간에 정교하게 양각된 세이렌을 발견하여 실패했다. 두 번째 시도는, 클리셰라면 클리셰지만, 마나탄이 터지는 소리에 묻혔다. 세 번째 시도만에 브레넌은 엘리자베스 맥카시의 주목을 받는 것에 성공했다. 모르는 사이에 다시 아슬아슬한 데까지 나갔는지, 카일이 허리를 감싸 당김으로써 나의 추락을 저지했다.
“제발 참아 주라. 내가 너 때문에 무슨 짓까지 했는데.”
끄트머리에 웃는 소리가 붙었지만 별로 웃을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나는 머쓱하게 카일의 옆모습을 곁눈질했다. 그러다가 깨달은 건데, 카일은 계속 연인의 실루엣이 아니라 거기서 한 뼘 정도 떨어진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사흘 전의 무도회에서도 그랬더랬다. 실은 무도회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었고. 카일이 종종 남들의 머리 위를 확인하곤 한다는 것은 그와 며칠만 어울려도 충분히 알았다. 거기에 뭐라도 있는 마냥.
아다만티움은 달았을 때 두드리라는 말이 있었다. 기왕 이렇게 된 마당에 가능한 많은 궁금증을 풀어 둬야 후회가 없을 듯했다. 사람들 머리통에 달라붙은 유령이라도 마주친 듯이 구는 까닭을 묻자, 별로 숨길 필요가 없었는지 카일은 쉽사리 답했다. 간단한 인적 사항과 블로썸에 대한 호감도, 즉 조력자 캐릭터로서 알아 둬야 하는 정보들이 쓰여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칭호’.
“이름과 별개로, 별명이라든가. 이를테면 지금 브레넌은 ‘엘리자베스 맥카시의 남자 친구’에서 ‘엘리자베스 맥카시의 약혼자’가 되려는 참이야.”
카일이 막 분위기를 잡기 시작한 브레넌을 턱짓했다. 어찌나 긴장을 했는지, 손을 떠는 모양새가 멀리서도 보였다. 낮부터 열심히도 끄적이던 작은 수첩을 쥔 채였다.
리즈는 브레넌이 낭만적인 글귀를 읊는 동안 아주 즐거워 보였다. 자작시의 낭송이 끝나자 그녀는 남자 친구의 구김 없이 다려진 교복 바지가 널빤지에 닿기 직전에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닌가!
“브레넌 그레고리 스톡스, 나랑 결혼해 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