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역사와 신화 속에서 몇몇 필멸자는 불멸을 꿈꿨지만 모든 불멸자는 필멸을 염원했고 거기에는 까닭이 있었다. 반복되는 다섯 번의 9개월 동안, 혼자만의 기억에 매달리다가 뒤따르는 고독에 시달렸던 경험이 나에게도 존재했다. 카일의 9개월은, 아마도 다섯 번만 반복되지 않았을 것이었다.
“알고 싶지 않을 거라고 했지?”
카일이 가볍게 웃었다. 나는 마나탄이 시끄럽게 터지는 소리와 소리 사이의 끔찍한 정적에 소중한 친구가 집어삼켜지기 전에 재빨리 질문을 얹었다.
“켈란 일레스티아를 ‘고친다’고 했던 걸 들었어. 그러고 나서 꽤나 큰 변화가 있었나 보더라고. 걔한테 뭘 한 거야?”
“고쳤지. ‘버그’를.”
씹듯이 내뱉고 나서, 카일은 선루 외벽에 놓인 짧은 줄사다리를 오르더니 손을 내밀었다. 나무타기 경력이 다수 있는 달튼의 말괄량이는 도움 없이도 줄사다리를 탈 수 있었으나, 그가 잡기를 바라는 것 같아서 그렇게 했다.
선루 상부 갑판을 잠시 걸었다. 별과 달과 구름을 지나니 새까만 불꽃 같은 것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마나탄의 폭발은 아니었다. 그걸 굳이 사람들 머리 위로 쏘는 건 멀리서도 잘 보이게 하기 위함이었으므로, 상식이 있다면 밤하늘에 묻힐 만한 색을 쓰지는 않을 것이었다.
“‘마녀의 길’?”
어안이 벙벙하여 멈춰 서자, 카일은 거기 한 발을 걸친 채 나를 돌아보더니 대수롭잖게 어깨를 으쓱였다.
“설정상으로는. 나는 ‘터미널’이라고 부르지만.”
***
마녀의 길, 카일의 표현을 빌리자면 터미널은 막상 내부에 들어서자 밖에서 봤을 때처럼 공포스러운 느낌은 아니었다. 발끝이 가리키는 방향을 알 수 없을 만큼 깜깜했고, 영원처럼 이어져 있었는데도 이상하게 그랬다.
사방에 희끄무레하게 빛나는, 문자의 파편 같은 것들이 있었다. 그게 별처럼 느껴져서 그런가 보았다. 밤하늘에 발을 디딘 것 같아서.
그러나 한편으로는 걸음수를 착실히 세고 있다가 백 걸음이 되었을 때 코가 굽지 않았는지를 확인하기도 했다. 카일은 내가 은근슬쩍 콧대를 문지르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순진한 아리, 그건 우리 같은 캐릭터가 시스템에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지어낸 말이야.”
그가 말했다.
“네 말이라고 전부 믿을 수는 없어.”
나는 민망한 마음에 괜히 더욱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내가 창작물 속 등장인물이라는 걸 알게 된 지 고작 십 분이 지났다고.”
무한히 확장된 공간을 걷는 동안, 카일은 내게 ‘게임’이나 ‘시스템’, ‘버그’의 개념을 반복해서 설명했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에 대해 아예 처음 듣는 사람보다 손톱만큼 나은 이해도를 지니게 되었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여서, 이내 매우 울적해졌다.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로즈마리 블로썸의 학교생활을 그린 ‘게임’에서 나는 주연도, 조연도 아니었다. 심지어는 단역조차 아닌 모양이었다. 원래는 배경으로나 언급되는 인물이었단다. 누군가 카일을 가리키며 ‘소꿉친구가 여기 다닌대’라고 했을 때의 ‘소꿉친구’ 말이다.
나는 카일 빌라드의 소꿉친구가 아니라 아리엘 달튼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카일 빌라드의 소꿉친구가 아닌 아리엘 달튼이 ‘게임’이나 ‘시스템’에게 얼마나 보잘것없었냐면, 나처럼 갈색 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 배경 역의 여자애를 찍어 내는 거푸집이 있을 정도였던 것이다.
같은 거푸집에서 나온 애들은 외모나 성격, 과거 설정의 일부를 공유하니 쉽게 알 수 있다고 했다. 그걸 듣자마자 떠오르는 이름들이 있었다. 아나이스 오브라이언, 미케일라 메이나드 그리고 이제는 메이브 커크패트릭이 된 메이브 프록터. 다섯 살에 감탕나무에 올랐다가 떨어졌다던. 전원이 갈색 머리에 파란 눈이었다.
뭐라도 반박해 보고자 입술을 달싹거렸다. 지나온 추억들의 일부가 그저 절대적인 존재가 지어낸 설정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황당하기 짝이 없고 동시에 끔찍스러운 주장은 확실히 거부감 없이 수용이 불가능했던 까닭이었다.
발버둥쳐 봐야 더욱 깊은 늪에나 빠진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 나는 다른 궁리를 했다. 나의 거푸집 자매들에게도 알리사와 로한과 릴루가 있으려나. 그렇다면 과연 그들 중 어느 쪽을 진짜라고 칠 수 있을까. 릴루가 여럿이라면 걔는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고양이가 아니게 될 텐데.
실은, 진짜이긴 할까. 어느 쪽이든, 어떤 것이든, 어디서부터든. 땅을 파기 시작하니까 묫자리였다. 카일은 내가 죽상이 된 것을 곁눈질로 보더니 막 너스레를 떨었다. 그에게는 스스로의 실존에 대한 사유 같은 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가 보았다.
어쩌면 당장의 절망 따위에는 면역력을 갖춘 지 오래일 수도 있었다. 어차피 넘쳐나는 게 시간이었으므로. 알고 싶지 않을 만큼 기나긴 시간.
“아나이스 오브라이언은 금발이잖아.”
“염색이래.”
“와, 그쯤이면 모근이 노력해서 금발로 자라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켈리랑 똑같은 소릴 하네.”
아무튼 카일 빌라드는 아리엘 달튼을 웃기는 데에 통달해 있었다. 나는 잘 보니 아나이스와 닮은 것도 같다는 말을 듣자 꽤나 즐거워졌다. 아나이스 오브라이언은 내가 본 사람 중에 제일 예뻤기 때문이다. 그녀의 청초한 아름다움을 떠올리고, 아침에 거울에 비치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까 아나이스도 나처럼 눈매가 동그란 것 같기도 했다.
“‘연회의 여왕’ 말이야, 왜 블로썸한테 줬어? 내 말은, 꼭 누구한테 줘야 하는 건 아니지만, 블로썸하고는….”
나는 이제 카일에게 약간의 놀림은 받아도 될 정도로 기분이 나아졌다. 그래서 물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혹시 기대했어?”
“아니!”
도무지 약간의 놀림으로 그칠 표정이 아니어서 즉시 발을 빼 보았다. 근데 그러기엔 늦은 시점이었는지, 카일은 되게 신이 나서는 갑작스레 쏟아지는 관심에 취해서 여왕 후보 퍼레이드에서 꼴사납게 굴던 나의 모습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스스로의 짧은 판단력이 개탄스러웠다.
“‘여왕의 관’은 1학기에 얻을 수 있는 아이템 중 최고거든. 내가 누굴 줬어도 걔가 뺏었을 거야…. 어떤 수를 써서든.”
“뭐, 걔는 거의 모든 수를 쓸 수 있으니까.”
“맞아. 어차피 훨씬 중요한 건 이미 네가 가지고 있기도 하고.”
그는 다시금 머리채를 잡히기 직전까지 내 약을 올린 다음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카일이 흘리듯 언급하는 ‘중요한 것’이 다미앙 할아버지의 회중시계임을 직감했다. 어느 순간 내 가방의 가장 깊숙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예쁘고 무거운 황동 덩어리 말이다. 나는 카일만큼 다미앙 할아버지를 좋아했지만, 카일이 할아버지의 유품이라는 이유만으로 고장 난 시계를 품고 다니는 까닭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실수로 두고 간 줄 알았다. 근데 며칠이 지나도 찾으러 오지 않기에 실수가 아님을 확신했다. 카일은 그걸 정말 목숨처럼, 가끔은 목숨보다 더욱 아꼈기 때문에 잃어버렸다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까, 다미앙 할아버지의 회중시계가 내 수중에 들어오게 된 경위도 미스터리였다. 따져 묻자, 그는 명백하게 딴소리를 지껄였다.
“혹시 로즈마리 블로썸이 너를 위협하는 일이 생기면, 그걸 넘겨.”
이윽고 분주하게 움직이던 발이 멈추었다. 목적한 것을 발견한 까닭이었다. 카일이 마녀의 길, 그러니까 터미널에서는 어느 방향으로 가든 한 곳에 도달하게 된다고 했으므로 우리는 지금껏 아무렇게나 걸었다.
솔직히 나는 그의 말을 반신반의했었다. 그러나 모르는 게 없다는 카일 빌라드는 허튼소리는 할지언정 거짓말은 일언반구도 않았다.
거대한, 물레였다. 어찌나 거대한지 물레바퀴의 살 하나가 내 키만 한 것 같았다. 아무도 그것의 손잡이를 돌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물레는 여기저기 흐트러진 문자의 파편들을 흡수하여 스스로 실을 자아냈다.
실패에 감긴 실은 사람의 손가락보다 굵었고, 보는 각도에 따라 총천연색으로 빛났다. 엄청난 양의 마력이 물레바퀴의 회전에 맞춰 사방으로 튀었다.
어디서 어떻게 봐도 평범한 물레는 아니었다. 애초에 ‘물레’라고 할 수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물레’가 뿜어내는 위압감에 짓눌리면서도, 나는 그것의 이름을 쉽사리 입에 담을 수 있었다.
“운… 명의… 물레.”
“혹은 ‘스크립터’. 가끔 ‘세계의 이치’라고도 불리더라, 케이틀린 대제가 다녀간 이후로는.”
“케이틀린 대제는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
“글쎄, 마녀가 되고 싶었나?”
카일이 촘촘하게 펼쳐진 오색의 그물을 더듬으며 말을 이었다.
“재밌게 됐지. 가장 허무맹랑해 보이는 일레스티아의 신학이 진실에 가장 가깝다니.”
글쎄. 나는 그에게 완전히 동의하지 못했다. 일레스티아의 신학에서 운명의 물레는 스티아 신의 왼손 검지였으며 그의 뜻에 따라 자유자재로 변화했다. 하지만 이건, 그것과는 별개의 물체처럼 보였다. 지성체의 일부로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움직인다기보다는, 그저 입력받은 내용을 그대로 출력해 내는 도구에 가까운 느낌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카일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운명의 물레가 뽑아내는 실에는 각자의 운명이 새겨져 있을 것이었다. 나는 무질서하게 뻗어져 나오는 실들 사이에서 아리엘 달튼의 실을 찾아 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모든 실이 너무나 눈부시게 반짝였으므로, 나는 계속해서 아까 쥔 실과 손아귀 안의 실을 헷갈렸다.
문득 실들 중 하나에 군데군데 매듭이 묶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가리키자, 카일은 눈썹을 형편없이 일그러뜨렸다.
“켈란 일레스티아의 실이야. 기억하지? 내가 그를 ‘고칠 수 있다’고 말했던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