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사랑의 달 연회의 대미를 장식하는 저녁 메뉴는 카일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닭고기 요리였다. 그는 이것을 위해 오후 시간을 전부 할애해서 닭을 손질했다. 또한 브레넌이 빌린 마력선이 너무 작아서 화덕의 크기도 터무니가 없었으므로, 카일은 거기에 다섯 마리의 닭을 굽기 위해 같은 일을 다섯 번이나 반복해야 했다.
“장식은 끝난 거야?”
조리복을 입은 카일 빌라드는 제법 그럴듯하게 보였다. 가니쉬로 올라갈 야채들과 버섯을 썰다가 주방에 얼쩡거리는 나를 발견한 카일이 물었다.
“문제없어. 만일 리즈가 저것 중 하나라도 불만스러워 하잖아? 군말 없이 딱 7할 환불해 줄게.”
“왜 7할이야?”
“나도 먹고는 살아야지. 음악은?”
그는 대답 대신 주방의 구석을 턱짓했다. 거기엔 바로 전날 보았던 마법 인형 악단이 가지런히 앉아 있었다.
“맙소사! 저거 어디서 났어?”
“내가 마법 인형 권익 증진 협회원인 건 알고 있었지?”
“진심이야?”
“아니. 회로를 약간 손봤지.”
뿌듯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나는 마법 인형 악단의 매끄러운 연주에 즐거워할 리즈의 모습을 상상했다. 다음으로 마법 인형 악단의 부재에 길길이 날뛸 드와이어 교수의 모습을 상상했다.
“아, 나의 자랑스러운 소꿉친구. 널 좋아해.”
“우연이네, 나돈데. 이제 사귈래?”
웃기지도 않는 농담에 코웃음을 치는 사이 브레넌 스톡스가 등장했다. 예복을 전부 전당포에 갖다 바쳐서인지 교복 차림이었다. 나는 그의 셔츠와 바지가 그렇게 깔끔한 것을 처음 보았다. 브레넌은 턱에 구멍이라도 났는지 매 식사마다 음식을 흘리곤 했지만, 동시에 냅킨을 두르는 행위를 나약함의 상징이라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브레넌, 혹시 점심 걸렀어?”
“어떤 단단한 신념도 부드러운 사랑을 이기지는 못한다오.”
“그러니까 냅킨을 했다는 거구나. 평범하게 말해 주라.”
팔뚝에 오소소 돋아난 소름을 긁적이며 핀잔을 던졌다. 그러자 브레넌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그저 금화나 셀 줄 아는 상인 나부랭이가 어떻게 시인의 감성을 이해하겠느냐 떠든 뒤 손아귀의 수첩에 무언가 끄적이며 사라졌다. 나는 그가 보이지 않게 되자마자 카일에게 바짝 붙어 속삭였다.
“쟤 저러는 거 벌써 꼴 보기 싫은데 어떡하지.”
“견뎌야지 별수 있나. 그래도 저 짓거리 하다가 진짜로 시집을 내긴 하더라. 진로 중엔 그게 제일 적성에 맞아 보이던데, 잘됐지 뭐.”
카일은 마치 모든 상황을 꿰뚫고 있기라도 한 듯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가 전에도 엘리자베스 맥카시와 브레넌 스톡스를 위해 다섯 마리의 닭을 꼬챙이에 끼운 적이 있었음을 직감했다.
“나는 이런 난리가 처음인데, 넌 아닌가 봐?”
“당분간은 조심할 줄 알았는데, 또 치트를 남발했더라고. 걔가 피니건 거리에 금화를 풀면 밀루아 남부의 물가는 치솟고, 밀루아 남부 물가가 치솟으면 맥카시 백작의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버리니까.”
“‘걔’? 로즈마리 블로썸? ‘치트’는 무슨 뜻이야?”
“곧 알게 될 거야. 내가 닭들의 행복에 기여하고 나면 말이야. 빌라드 특제 양념과 양배추가 없으면 얘네는 너무 추울 거라고.”
잘 구워진 닭들을 가리키며 카일이 말했다. 내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부드럽게 감싼 축객령이었다.
하릴없이 밖으로 나왔다. 마력선은 이제 슬슬 아카데미 상공에 접어들고 있었다. 험프리스 교수를 설득하지 못했다면 지금쯤 아카데미의 방어 결계에 막혀 산산조각이 났겠지. 그녀는 내게서 대륙의 열한 살 고양이 중 최고로 귀여운 릴루를 반드시 졸업 연회에 동반하겠노라는 다짐을 거듭 받고 나서야 정박 허가서에 서명해 주었다.
솔직히 나는 험프리스 교수가 그보다는 중요한 것을 요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농담의 달에 절대로 그녀의 분장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라든가. 하지만 죄 많은 고양이 릴루의 영향력은 그야말로 지대했다.
차가운 밤바람이 느리게 얼굴을 때렸다. 마력선이 광장에 가까워지면서 속도를 늦춘 것이었다.
브레넌은 뒷짐 진 손아귀에 꽃다발을 쥐고는 선수 쪽 갑판에 섰다. 내게는 등짝만이 보이는 각도였지만, 과하게 힘이 들어간 자세에서 그의 긴장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애매한 고도가 불러일으키는 공포를 최대한 줄이기 위하여 고개를 멀리 빼어 내려다보았다. 브리아나-확성기-모슬리가 맡은 일을 톡톡히 했는지, 상당히 거대한 인파가 웅성이고 있었다.
곧 노먼 케이시가 그리폰을 타고 나타났다. 볼을 발그랗게 물들인 엘리자베스 맥카시와 함께였다.
“고마워, 케이시.”
그의 도움을 받아 갑판에 발을 디디며, 리즈가 말했다.
“고맙다고 할 필요는 없고, 켈리나 좀 단속해 줘.”
케이시가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빈정거렸다. ‘걔 때문에 미쳐 버릴 것 같아.’ 그러나 그런 말을 하면서도, 초콜릿인 줄 알고 건포도를 씹은 사람처럼 얼굴을 구긴 케이시에게서는 딱히 누군가 자신의 전 여친을 어떻게 하리라는 기대를 찾기 힘들었다.
내 생각에 로즈마리 블로썸의 신묘한 능력으로도 켈리 라미레즈의 분방한 영혼을 묶어 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리즈는 선뜻 그러마고 대답하지 않았으며 그냥 웃기나 했다. 어색한 미소였다.
“브레넌 스톡스! 도대체 언제 이렇게 깜찍한 걸 준비했담?”
연인의 품에 안긴 엘리자베스는 그녀가 느끼는 흥분감만큼이나 커다랗게 말했다. 그러자 그녀의 외침이 시동 주문이라도 되는 듯이,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접시를 든 카일이 왈츠 음악을 연주하는 마법 인형 악단을 꽁무니에 달고 등장했다.
나는 사람 셋과 마법 인형 넷 그리고 두 마리의 따뜻한 닭을 선루에 마련된 테이블로 안내한 뒤 재빨리 조타실로 몸을 숨겼다. 마력선이 구름 위로 떠오르기 전에 모든 조명에 마나를 주입해야 했다.
***
리즈와 브레넌이 객실에서 만찬을 즐기는 동안 나와 카일은 연인의 잔에 주스를 채우거나, 샐러드 위에 레몬즙을 뿌리기 위해 번갈아 주방을 드나들면서 남는 닭고기 요리를 야금야금 먹었다.
그러는 동안 작은 싸움이 벌어졌는데, 분명히 세 마리 닭의 여섯 개 다리가 자취를 감췄건만 서로 두 개밖에 안 먹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리즈는 내가 카일의 머리채를 잡아 흔들고, 카일이 내 옆구리를 꼬집기 시작하자, 정신이 사납다며 우리에게 선루 접근 금지령을 내렸다.
“샐러맨더의 무지개 비늘에 맹세코, 내가 네 개 먹었으면 카일 빌라드가 아니라 카일 달튼이다.”
“거기서 갑자기 달튼이 왜 나와? 코넬리아가 드레스 그 꼴 난 거 알았어? 빌라드로 돌아오면 죽여 버리겠대?”
“너네 데릴사위 하고 싶어서 그러지.”
“열받게 해서 화제를 돌리려는 수작인 것 같지만 넘어가지 않겠어. 다리만 네 개 처먹은 거 너 맞잖아.”
카일은 휘파람을 불며 선미 쪽으로 걸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사랑의 달 연회 전야제의 하이라이트가 바다 슬라임이라면, 뒤풀이의 하이라이트는 고도로 응축된 마나를 쏘아올림으로써 허공에 빛으로 무늬를 새기는 행사였다. 선미 부근의 갑판에서는 그게 아주 잘 보일 것 같았다.
사실 나는 아득한 파열음을 듣자마자 선루에서 뛰쳐나가고 싶어서 안달이 났었다. 그래서 일부러 소란을 피운 것도 있었다.
카일의 행선지를 보아하니, 나와 같은 속셈이었던 게 분명했다. 가끔 그와는 마음이 잘 통하다 못해 그가 나고, 내가 그인 듯한 착각이 들 때가 있었다. 단순히 알고 지낸 세월만이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치트’는 로즈마리 블로썸만이 쓸 수 있는 마법의 이름이야.”
색색의 빛무늬가 수놓아진 하늘을 멍하니 보던 와중에, 카일이 대뜸 지껄였다. 그러더니 블로썸이 하던 것처럼 손끝으로 어디를 두드렸다. 그러니까 저게 ‘치트’란 말이지.
“기본적으로는 소지금이나 능력치 그리고 호감도를 올리는 것만 가능하지만, 짧은 시간 동안 호감도가 지나치게 오르면 상승폭에 제한이 걸리는 대신 잠깐 그녀를 따르게 되거든.”
“지금 밀루아어로 말하고 있는 거 맞지? 대륙 공용어나?”
‘제4의 벽’이 사라진 덕에 카일의 목소리는 전처럼 뭉개지지 않았다. 부자연스럽고 불쾌한 졸음이 몰려오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단어들을 조금도 소화할 수 없었다. 내가 띄운 물음표가 그의 눈에도 들어왔는지, 카일은 답답한 듯 머리를 헝클어 댔다.
“막상 설명하려고 해도 뭐부터 해야 될지 모르겠네. 그냥 네가 궁금한 걸 말할래? 가능한 만큼 풀어서 답해 줄게.”
“좋아. 로즈마리 블로썸은 왜 ‘치트’를 쓸 수 있어? 걔의 정체가 뭐야?”
“블로썸은 이 세계의 주인공이야. 그러니 이 세계는, 우리 ‘캐릭터’는 오로지 그녀를 위해 살아 숨 쉰다고 할 수 있지.”
블로썸이 ‘주인공’이라는 것은 케이틀린 대제로부터 들어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보다, ‘캐릭터’라니. 정말로 피츠시몬스 아카데미가 블로썸의 로맨스 소설이고, 학생회는 그녀의 남자 주인공이라도 된단 말인가. 그렇게 물었더니, 정답은 아닌데 영 틀려먹은 접근도 아니라고 했다.
“로맨스 소설… 그래, 이해하기엔 쉽겠네. 엄밀히는 ‘게임’이긴 한데, 여기엔 그 개념이 없으니까.”
“‘게임’이 뭔지 엄청나게 궁금하지만 들어도 모를 거니까 넘어갈래. 우리가 소설 속 캐릭터라면, 네 역할은 뭐야?”
“대부분의 게임, 그러니까 로맨스 소설에는 주인공의 사랑을 물심양면으로 응원하는 캐릭터가 있잖아. ‘햄의 노래’로 따지면 ‘베이컨’ 말이야. ‘햄’의 도살장 탈출을 돕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쉬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던 내용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누군가의 창작물임을 막연히 상상하는 것과 확인받는 것은 전혀 다른 감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믿지 않고서는 내가 겪은 불가해한 현상들이 설명되지 않았다. 또한, 소꿉친구의 더없이 진지한 태도에서 명백한 진정성을 느꼈다. 그래서, 토할 거 같은 기분을 가까스로 가라앉힌 뒤에 이렇게 말했다.
“블로썸이 ‘햄’이라면 너는 ‘베이컨’이란 말이지. 이해했어…. 그래서 알고 있는 거야? ‘치트’라든가. 너에겐 ‘제4의 벽’도 무용지물인 것 같던데.”
“치트뿐만 아니라, 나는 학생회의 다섯 명이 로즈마리 블로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어. 또 걔네랑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지. 그런 것들을 전해 주려면 제4의 벽 같은 제약을 가져선 안 되잖아. 결론은, 맞아. 나는 이 게임에 대해 모르는 게 없고, 전부 기억하고 있어.”
전부 기억하고 있다는 말은 내게는 그다지 즐겁게 들리지 않았다. 그가 전부 기억하는 사이 그를 제외한 모두가 그것들을 잊었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