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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44화 (44/178)

44화

“연회장의 벽에는 반드시 귀가 있으니까, 이 얘기는 내일 하자고. 준비는 완벽하지?”

우리는 내일 피츠시몬스 상공에 나타날 마력선에서 봉사하기를 자처했다. 사랑스러운 연인의 낭만적인 경험을 위해서였다.

사람은 착한데 다소 모자란 구석이 있는 브레넌 스톡스는, 그가 오로지 마력선 ‘만’을 대여했음을 연회 직전에나 깨달았다. ‘어쩐지 너무 싸더라니!’ 혀를 녹이는 음식도, 아름다운 음악도, 과거의 기법을 사용해 더욱 근사하게 만들어진 촛대도 없이 청혼을 하게 생긴 브레넌의 울먹거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다행히 카일은 요리를 할 수 있었다. 귀족 도련님이 요리라니 웃기긴 한데.

지금이야 지나치게 건강해서 돌도 씹어 먹고 막 그런다지만, 어렸을 때 카일은 아픈 만큼 예민했어서 그가 입에 대는 음식은 지극히 적었고 그마저도 마음에 들게 조리되지 않았다면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빌라드 백작 부부는 그들의 허약한 둘째 아들에게 하염없이 후했다. 하지만 단 하나의 규칙만은 엄격하게 지키도록 했다. ‘반찬 투정만은 빌라드의 식탁에 존재해서는 안 되었다.’.

어느 날, 백작 부인은 카일이 식사 시간마다 심통을 부리는 꼴을 견디지 못했다. 그녀는 이렇게 외친 뒤에 아들을 주방에 가두었다.

“다른 사람이 정성스레 만들어 준 음식이 그렇게 먹기 싫다면 네가 해 먹도록 하렴!”

아마 백작 부인의 의도는 카일로 하여금 조리장의 노고를 깨닫게 하려는 것일 터였다. 자신의 그릇된 행동으로 상처를 받았을 사용인에게 직접 사과하는 겸손함을 갖추길 바랐던 것 같기도 했다.

타고난 기질은 순하지만 고집은 센 카일은 결코 그녀의 기대에 부응할 생각이 없었다. 대신 스스로의 접시에 올라갈 고기를 알맞게 굽는 법을 배웠다. 어머니의 일갈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하여 빌라드 백작 부인은 슬프게도, 그녀의 둘째 아들이 검보다는 요리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통감하게 되었다. ‘아리엘, 나는 로티세리 조리법의 달인이 됐어.’ 그의 편지에서 그 문장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웃었던지.

아무튼 그렇다는 거다. 카일은 요리를 할 수 있었고 나는 그가 요리를 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었다. 또 엘리자베스 맥카시가 좋아하는 골동품들로 마력선을 가득 채울 수도 있었다. 물론 상인에게 공짜는 어불성설이었으므로 나는 모든 물건에 합당한 가격을 매겨 흑수정 광산의 수익에서 나누기로 했다.

계약서에는 브레넌의 지장이 찍혔다. 그는 우정을 위해 손해를 감수하며 확실하지도 않은-나에게는 확실했지만-가능성에 투자하는 친구의 모습에 감동받은 듯했다. 사정을 다 아는 카일은 재채기를 하는 척하며 몇 번이나 ‘양아치’라고 말했다.

하지만 상업이란 그런 거였다. 나는 허리에 손을 얹고 어깨를 으쓱였다.

“달튼 상단의 일처리는 언제나 완벽하지.”

***

아나이스 오브라이언은 정확히 내가 초대장에 기재한 시간이 되었을 때 문을 두드렸다. 곧 하늘거리는 레이스 잠옷을 입은 그녀가 베개를 안고 나타났다.

“그 베개는 뭐야?”

내 물음에 그녀는 약간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금방 턱을 치켜들고 이렇게 말했다. ‘밤샘 살롱에서는 보통 베개로 서로를 때리는 경기를 한다고 들었어.’ 덕분에 나는 아나이스 오브라이언이 또래의 여자애들과 어울린 경험이 전무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 화장실 갔다 올게.”

“여기도 화장실 있지 않아?”

“그, 나는 안심할 수 있는 곳에서만 볼일을 보거든. 아마 너도 그럴걸?”

“나? 아닌데?”

“그리고 지금 화장실이 너무 가고 싶을 테고.”

눈치 빠른 엘리자베스 맥카시가 귓불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리고 눈치 없는 켈리 라미레즈의 멱살을 잡아서는 끌고 나갔다. 나는 두 사람이 문간에서 사라지자 잽싸게 내 베개를 챙겼다. 브리도 그렇게 했다.

“아나이스 오브라이언이야.”

“아, 아나이스 오브라이언! 맹세컨대 네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피츠시몬스에 아무도 없어. 게다가 나는 일레스티아인이라고! 이제 보니까 머릿결이 정말 곱다. 어떻게 관리했는지 물어봐도 될까? 아참, 아나이스라고 불러도 되지?”

오브라이언 공작가의 장미가 방에 들를 거라는 걸 알고 나서부터 줄곧 흥분 상태였던 브리아나 모슬리가 정신없이 말을 퍼부었다. 그녀의 맹렬한 기세에 아나이스 오브라이언은 잠깐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하지만 그 행동이 귀족답지 않다고 느꼈는지, 금방 우아하게 허리를 세우고는 가지고 온 주전부리를 늘어놓았다.

“마음대로 해. 나도 너희들을 브리아나, 아리엘이라고 부를게. 이건 내가 즐겨 마시는 차야. 실크 주머니에 알맞은 양이 소분되어 있어서, 통째로 우리면 완벽한 향을 느낄 수 있어.”

“세상에! 내 이름을 알아?”

“브리, 진정해. 네 이름은 내가 초대장에 써 넣었다고 했잖아.”

“그게 아니어도 네가 브리아나 모슬리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어. 백부님께서 서품한 사제들 중 너희 아버지가 계셨거든.”

“아, 빌어먹을 아버지. 기대하지 않은 방향에서 제게 도움을 주시는군요.”

브리아나가 냉소적으로 중얼거리자 아나이스는 놀란 듯했다. 브리와 브리의 ‘아버지’가 지독하게 사이가 나쁘다는 사실을 몰랐나 보았다. 안 그래도 새하얀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빠져나갔다. ‘미안해.’ 아나이스가 속삭였다. 가련한 목소리였다. 일전에 그 남자의 품에 안겨 내었던.

“사과할 필요 없어. 나는 그 양반 얘기를 즐기거든. 남의 욕 하는 거 꺼려하는 사람 별로 없잖아.”

“쟤 진심이야, 아나이스. 안심해도 돼.”

“그래도….”

아나이스는 눈을 질끈 감고 속삭였다.

“나는 항상 모든 것을 망치곤 해. 그래서 최대한 다른 사람과 말을 섞지 않아야 한댔어. 하지만 이런 데 초대받은 건 처음이라….”

“잠깐, ‘한댔어’? 어떤 개자식이 너한테 그런 소리를 지껄였어?”

브리아나 모슬리는 마치 제가 모욕을 당하기라도 한 듯이 험악해졌다. 각자의 베개와 함께 막 돌아온 켈리와 리즈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검지를 입술에 대고 고개를 저었다.

“모두가. 그럴 만도 하지. 나는 정말 멍청하거든. 소심한 데다, 외모가 봐줄 만하면 뭐해, 금발도 아니고….”

‘금발 아냐?’ 켈리가 끼어들었다.

“염색이라고? 하지만 뿌리 끝까지 감쪽같은데.”

“원래는 갈색 머리야. 재클린은 솜씨가 정말 좋아.”

피츠시몬스에 사용인을 들이는 것은 아카데미의 규칙상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허락되지 않았지만, 일부 고위 귀족은 암암리에, 혹은 대놓고 동년배의 가신을 그들의 자식과 함께 입학시키며 눈 가리고 아웅을 하곤 했다.

포크너 준남작가의 재클린은 아나이스 오브라이언의 룸메이트였다. 굳이 왈가왈부하지 않더라도 그녀가 오브라이언 공작가에서 아나이스에게 붙인 시녀임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포크너가 지나치게 아나이스를 떠받들고 다녔던 까닭이었다.

아나이스는 볼을 붉게 물들이고 포크너를 칭찬했다. 그녀 스스로에 대해 말할 때와는 천지 차이였다. 켈리가 혀를 내둘렀다.

“금발이 너무 찰떡이어서 몰랐어. 이쯤이면 네 모근이 알아서 금발로 자라 줘야 하는 거 아냐? 눈치가 있으면 말이야.”

“켈리, 모근은 너처럼 눈치가 없어. 그리고 아나이스는 어떤 머리색을 하든 환상적일 거라고.”

“그건 인정이지.”

브리아나가 던진 핀잔에 켈리 라미레즈는 양손을 번쩍 들었다. 항복의 제스처였다. 그러자 이번에 말을 꺼낸 것은 리즈였다.

“네가 뭔가 망친다고 여겨 본 적은 없는데, 왜 그렇게 느끼는 거야?”

“네가 나의 문제를 느끼지 못했다면 그건 나와 길게 얘기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야. 나는 누군가에게 한심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최대한 말하지 않기를 택했거든.”

“하지만 지금도 모르겠는걸. 그리고 만에 하나 네가 진짜 한심하다고 한들, 그런 모습을 보이면 안 될 이유는 뭐야? 오브라이언 공작가가 일레스티아 황가의 방계라서? 피츠시몬스에 차고 넘치는 황족이나 왕족이 다 대단한 것도 아니잖아.”

“그렇지만 부모님은….”

“알 게 뭐야? 지금 여기 없는데.”

부모의 눈을 피해 약혼자를 걷어차고 등록금을 횡령한 엘리자베스 맥카시의 말에는 명백한 설득력이 있었다.

“네가 어떤 환경에서 생활했는지 알겠어. 나에게도 그럴 때가 있었거든. 일레스티아에 있을 때, 엄마는 하루 종일 내가 얼마나 굼뜨고, 뚱뚱하고, 성질이 더러운지 떠들었어. 그녀가 나를 부르는 별명은 ‘시궁쥐 둥지’였지.”

브리가 스스로의 곱슬머리를 조금 더 곱슬거리게 보이게끔 헝클었다.

“나는 성질이 더럽거나 굼뜨지 않아. 조금 뚱뚱할 수는 있어도, 그게 내가 가진 장점들을 죽이지는 않는다고. 그러니 엄마의 말을 무시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를 미워하곤 했어.”

“…….”

“피츠시몬스에 입학하기로 한 건 내 불운한 인생에서 최고의 선택이었어. 여기 와서야 알게 됐거든. 나를 ‘시궁쥐 둥지’로 만든 건 나였다는 사실을 말이야. 내가 보기엔, 너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실은 멍청하지도 않으면서 지레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신학 수업에서 D+를 받았어도?”

“어, 그건 좀….”

일레스티아 출신의 학생이 신학에서 A 미만의 성적을 받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브리아나는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가 황급히 덧붙였다.

“내 말은, 네가 똑똑하지 않다고 해서 너 자신을 싫어할 필요는 없다는 거지.”

“맞아. 노먼 케이시는 열일곱이 되도록 ‘장래희망’을 ‘장례희망’이라 알고 살았지만,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하던걸. 걔는 농담의 달에도 본인으로 가장한다고. ‘마탑주가 된 노먼 케이시’, ‘그리폰 크리켓으로 대륙을 제패한 노먼 케이시’….”

켈리가 질리지도 않고 전 남친의 흉을 보는 동안 브리아나는 최초의 흥분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차분해졌다. 아나이스에게 실망했다기보다, 그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아나이스에게 가진 허상 또한 아나이스를 옥죄고 있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인 듯했다.

“아무튼, 네가 너를 ‘모든 걸 망치는’, ‘소심한’ 사람이라고 묘사하는 건 스스로를 싫어할 빌미를 마련하기 위해서잖아. 당장 기숙사 2층에 쌓인 선물들만 봐도 네 팬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는데, 당장 네가 너를 싫어하면 어떡해?”

“그렇지만, 그들은 내 외모만을 보고 날 사랑하는걸. 진짜 내가 어떤지 알게 되면 화를 낼 거야….”

“나는 진짜 아나이스 오브라이언을 만나고 나서 너를 더욱 사랑하게 됐어.”

단호하게 잘라낸 나의 말꼬리를 리즈와 켈리가 이어 물었다.

“나도.”

“동감이야.”

이윽고 우리는 아나이스 오브라이언의 전부를 찬양하는 칭찬 감옥에 아나이스를 가둠으로써 그녀가 지닌 다양한 장점들을 상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마침내 머릿속 대륙 공용어 사전의 페이지가 모두 넘어가고 칭찬의 말이 고갈되었을 때, 과자 서너 봉지를 둘러싸고 앉은 다섯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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