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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42화 (42/178)

42화

리즈는 흑수정 광산 계획을 위해 그녀가 가진 거의 모든 것을 전당포에 넘겼다. 거기에는 드레스와 구두, 장신구도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당연히 치장이 불가할 것이었다. 브레넌도 마찬가지일 테니 굳이 연회에 참석할 필요가 없기는 했겠지.

맥카시 백작가는 대릴 코완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공식적으로 엘리자베스의 ‘약혼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는 사랑의 달 연회에서 그녀의 파트너가 될 자격을 얻었다. 소문만큼 리즈에게 홀딱 반한 상태였다면, 사랑의 달 연회와 같은 낭만적인 행사에 참석할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었다.

분홍색 드레스는 그렇게 피츠시몬스 아카데미의 기숙사로 배달되었다. 엘리자베스 맥카시가 가진 일말의 양심은 그녀로 하여금 대릴 코완의 돌려받을 수 없는 사랑의 증거를 전당포에 넘기지 않게끔 했다.

그리고 여기서 파티마가 등장하는 거지. 나는 깜찍하고 집요한 파티마가 리즈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지는 장면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달튼 자작가의 아리엘입니다. 리즈… 미스 맥카시와는 친구예요. 이건, 음, 빌린 거고요….”

내 목소리는 끝으로 갈수록 사그라들었다. 대릴 코완의 안색이 과히 좋지 않았던 탓이었다.

하긴 나 같아도 약혼자에게 선물한 것을 엉뚱한 사람이 쓰고 있다면 상심이 클 것이었다. 상심 수준이 아니라 아주 분노를 터뜨렸겠지. 그리고 빌려준 자식도 빌려 쓴 자식도 죄다 검날에 슨 녹으로 만들었을 거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어요.”

대릴 코완은 분노하지 않았다. 그는 엄청나게 슬퍼 보였다.

“미스 맥카시에게 연인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어요. 청혼서에 서명한 것이 그녀가 아니라 맥카시 백작이라는 것도요.”

“…….”

“하지만 여기서… 뭔가 바꿀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깊은 밤, 미뉴에트가 흐르는 연회장에서는 종종 마법이 일어나곤 하니까요.”

“그, 유감이에요.”

나는 본의 아니게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거절 편지가 되고 말았다. 머쓱한 기분에 어깨를 움츠리자 그는 억지로 웃는 낯을 해 보였다. 나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서인 듯했다.

마베릭은 대릴 코완의 성격을 ‘모나지 않았다’라고 표현했는데, 내가 보기에 그는 아주 다정했다. 브레넌의 오랜 친구로서 그의 편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 거북할 정도로 말이다.

“오히려 좋은걸요. 이렇게 확실하게 거절해 주니. 사실 저는 그녀의 그런 모습을 사랑했거든요.”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리즈의 미들네임은 ‘막무가내’고 그건 가끔 걔를 무지하게 매력적으로 만들죠.”

“잘 아시는 걸 보니 보통 친구는 아닌가 보네요.”

대릴 코완의 짧은 웃음소리가 허공에 마구 흩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짧았으므로, 금방 풀벌레 우는 소리로 대체되어서 고요 속에 섞여 들어갔다. 새로이 좋은 사람을 만났다는 흥분감보다 어색함이 커져 갈 때쯤 그가 말했다. 작지만 단단한 목소리였다.

“이만 가 볼게요. 미스 달튼에게 불필요한 소문을 만들기 전에 말이에요. 미스 맥카시에게는 대릴 코완이 백기를 들었다고 전해 주세요.”

***

연회장 앞에 방주 모양 마차가 주차된 것이 보였다. 내가 비운 자리에는 미아 페터슨의 역작이 세워져 있었는데, 멀리서 보면 의외로 감쪽같았다. 그러니까 나 대신에 저걸 태우고 퍼레이드를 했단 말이지. 나는 그것의 굴곡진 부분마다 잔뜩 걸린 종이 꽃잎들을 털어 내고 조금 웃었다. 가만 보면 켈란 일레스티아도 제법 엉뚱한 자식이었다.

문을 열어젖히자마자 단내가 확 풍겼다. 설탕을 아주 곱게 빻아서, 꽃잎으로 즙을 낸 것을 섞어 굳힌 다음에 향로에 담아 태우면 비슷할까 싶었다. 이번 연회의 테마는 사랑이고, 연회 준비는 주로 학생회에서 하니까, 걔네들이 느끼기에는 이게 사랑의 향기겠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약간 재밌었다.

요정의 날개처럼 투명한 천에 둘러싸인 샹들리에 아래에는 거대한 대리석 분수가 놓여 있었다. 분수가 있는 줄 알았다면 물을 초콜릿으로 바꾸는 마법을 준비해 왔을 텐데.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곧 연회장 한가운데서 5학년 학생들이 춤의 대형을 갖추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어서 발코니를 가리고 있던 붉은 벨벳 소재의 커튼이 걷히고 마법 인형으로 구성된 악단이 나타났다. 딱 알맞게 도착한 모양이었다.

“미아의 그림이 춤은 못 추겠다고 했나 보지?”

나란히 선 연회의 여왕 후보들 사이에 비워 놓은 공간이 있었다. 헐레벌떡 서자 ‘카일리’가 득달같이 시비를 걸어 왔다.

“실은, 걔는 자신 있어 했지만 두고 올 수밖에 없었어. 나무판자가 인간보다 춤에 뛰어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네가 슬플 것 같아서.”

화가 났지만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는데, 정말로 나무판자가 나보다 춤을 잘 출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지난 연회에서 마르퀴즈 볼턴은 나를 혹독하게 채찍질한 결과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누군가의 관절은 그녀의 뇌를 배신할 수 있었다.

자세를 고치는 시늉을 하며 카일의 발등을 짓밟았다.

“아우… 뼈가 부러진 것 같아.”

그가 엄살을 부렸다.

“오, 카일리. 인간의 뼈는 쉽게 부러지지 않아.”

나는 짐짓 친절한 말투를 꾸며 냈다.

“원한다면 진짜로 뼈가 부러지는 게 어떤 건지 알려 줄 수 있어.”

그러자 카일은 갑자기 귀가 들리지 않는 척을 하더니 화제를 바꾸었다.

“저기 신사 분께서 카일리에게 관심이 있어 보이는데.”

카일이 가리키는 쪽에서, 에드가 라모스가 굉장한 악몽에 시달리기라도 하는 듯이 창백해져 있었다. 퍼레이드에 참여하지 않은 에드가에게는 카일리 빌라드에 대한 알맞은 정보가 주어지지 않았나 보다.

“진심이야? 여자 줄에 선다고?”

“너무하네, 라모스. 나도 정당한 과정을 거쳐 선발된 ‘연회의 여왕’ 후보라고.”

에드가의 입모양이 ‘으’가 되었다. 카일은 뻔뻔하게 대꾸하며 손끝에 키스를 담아 날렸는데, 그러기 전에 에드가의 머리 위를 흘끗 봤다.

돌이켜 보면 확실히 다소 수상한 구석이 있는 행동이었으나, 나의 뇌는 빠르게도 카일 빌라드와 에드가 라모스가 다정하게 부둥켜안고 연회장을 활보하는 것을 상상해 버렸다. 그만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웃다가 배가 당길 때쯤 마법 인형 악단이 연주를 시작했다. 덕분에 나는 춤을 춰야 할 때를 완전히 놓쳐 버렸다. 나 같은 몸치는 이렇게 되면 이제 음악이 끝날 때까지 정확한 박자에 정확한 움직임을 하기가 어려웠다.

“창의적인 춤사위네.”

나의 첫 번째 파트너, 켈란 일레스티아가 반대로 도는 내 손목을 붙잡아 도로 돌리며 말했다.

“앞으로 2분 동안 네가 넘어야 할 산이지.”

“하하, 책임이 막중한걸.”

문득 그의 깨끗한 웃음소리를 들은 지가 너무 오래되었다고 느꼈다. 나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묻어 두었던 불만을 토로했다. 되도록 장난스러운 태도를 유지하려 했지만, 정제되지 않은 서러움이 무심코 새어 나왔다.

“왜 병문안 안 왔어?”

켈란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가 다시 다가오는 동작을 취할 때 나는 앞으로만 갔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서로의 목소리가 닿는 위치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딴소리를 지껄였다.

“잘 어울리네, 드레스. 아까 것도 예뻤지만.”

“말 돌리지 마. 바빴던 거야?”

“그건 아니었어. 하지만….”

켈란은, 드물게도, 퍽 혼란스럽게 굴었다.

“솔직히 말할게. 그때는… 그러고 싶지 않았어.”

“무슨 뜻이야?”

“음…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로즈에게. 그녀가 너를 꺼린다는 이유만으로 말이야.”

내 기억에 켈란 일레스티아는 결코 스스로가 느낀 감정을 ‘그런 것 같다’로 둘러싸는 성격이 아니었다. 나는 그와 ‘로즈’에 대해 더 캐묻고 싶었지만, 이어지는 여섯 박자에 파트너를 바꾸어야 해서 그럴 수가 없었다.

그의 다음 파트너인 카일리가 우악스럽게 손을 낚아채기 직전에, 켈란은 드레스 얘기는 빈말이 아니라고 했다. 나는 살짝 기분이 상한 상태였으므로, 고맙다고 말하는 대신 고개를 대충 까딱였다.

카일의 옆으로 크게 돌고 나서 나의 파트너는 제이든이었다. 내가 울적해 보였는지, 웬일로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어?”

“엉망이 된 박자를 되돌릴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어.”

“네 박자는 엉망이 아냐.”

“그래, 내 박자에 맞추지 못하는 음악이 엉망인 거지. 말이라도 고맙네.”

제이든이 진지하게 답하는 순간에도 나는 춤이 아니라 몸부림 같은 것을 추고 있었다.

“그보다, 어때?”

“뭐가?”

“여기에는 네가 찾는 ‘사랑’이 없다고 했지만… 모르는 거잖아. 깊은 밤, 미뉴에트가 흐르는 연회장에서는 종종 마법이 일어난다고.”

제이든은 나의(실은 대릴 코완의) 시적인 표현에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제이든 스펜서와 많이 친해지고 나서 그의 무표정이 아닌 표정을 여러 번 봤는데, 꽤나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네가 놀란 거 같아서 이실직고할게. 대릴 코완이 한 말이야.”

“엘리자베스 맥카시의 약혼자?”

제이든 스펜서는 나와 리즈와 같은 밀루아인이었다. 또 코완 후작가는 스펜서 공작가와 긴밀한 정치적 협력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아마 대릴 코완 쪽의 사정은 나보다 그가 훨씬 빠삭할 것이었다.

“그가 피츠시몬스에 왔더라고. 엄밀히는 왔다 간 거지만.”

등 뒤로 손을 맞잡고 빙글빙글 도는 동작을 하면서, 대릴 코완과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로 하여금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려 아카데미까지 오게 만든 맹목적인 사랑, 사상 최악의 방법으로 거절당하고도 애써 웃으며 돌아서게 만든 안쓰러운 사랑에 대해 말이다.

“언젠가 그런 사랑을 받아 보고 싶어.”

“그럴 수 있을 거야.”

제이든이 다급히 대답했다. 내 얘기를 듣는 동안 충분한 시간이 지났는지, 무시무시한 근육질의 여장남자가 그를 노리고 다가왔기 때문이다. 나는 깔깔거리고 웃으며 새로운 파트너의 손을 잡았다.

마르퀴즈 볼턴은 남들이 무릎을 구부릴 때 펴고, 펼 때 구부리는 나에게 잔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기껏 선물한 책을(두 번이나!) 읽은 게 아니라 먹기라도 했냐고 비꼬아 대기에, 소금을 뿌려서 구웠는데 참 맛있었노라고 받아쳤다. 한 권을 더 받으면 튀겨 보겠다 덧붙이니 되게 질려 했는데, 보기에 참 흐뭇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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