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41화 (41/178)

41화

허둥거리며 등을 더듬어 보았다. 꽤 깊숙이 손을 넣었는데도 맨살이 만져졌다. 끝장이었다. 나는 숨바꼭질을 하는 다섯 살 배기처럼 눈을 꼭 감았다. 그렇게 하면 여기에서 내 존재가 지워지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문득 어깨에 부드러운 감촉이 닿았다. 슬그머니 눈을 뜨자 아나이스 오브라이언이 고개는 관중을 향한 채로 무언가를 들이밀고 있었다. 아까까지 그녀가 두르고 있던 숄이었다.

‘빌려도 돼?’ 속삭이듯 묻자 오브라이언은 대답 없이 자리로 돌아갔다. 맘대로 하라는 것 같았다. 나는 오브라이언의 숄로 휑한 등짝을 최대한 가렸다. 약간의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윽고, 난데없이, 잘 가던 방주-마차가 덜컹거리며 멈추었다. 시선이 모이자, 선장과 조타수와 동력원을 한꺼번에 도맡은 켈란 일레스티아가 애교스레 웃음 지었다.

“피곤해서 말이야. 잠깐 휴식해도 될까? 너희들도 쉬다가 오도록 해.”

켈란의 호박색 눈동자가 오로지 나만을 담고 있기에, 나는 그가 나에게 벌어진 참사를 짐작하고 있음을 확신했다.

눈치라고는 지지리도 없는 마르퀴즈 볼턴이 딱히 무겁지도 않은 주군의 짐을 덜기 위해 나섰다. 나는 잽싸게 소리쳤다. ‘검집에 장식끈을 다는 걸 잊어버려서, 기숙사 갔다 올게!’

그러자 몇몇이 인파에 섞이는 나를 의아하게 보았다. 하지만 곧바로 ‘카일리’의 화려한 춤사위에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다.

***

무도회까지는 한 시간이 채 남지 않았고 내 드레스는 내 마음처럼 너덜거렸다. 2학년 때 재봉 마법을 배웠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서 시도해 봤는데, 마법진의 어느 부분이 잘못되었는지 바늘이 자꾸 옷감이 아니라 내 손톱을 노리길래 부질없는 짓은 그만두기로 했다.

급하게 방을 뒤졌다. 브리아나 모슬리는 스트레스를 사치로 푸는 편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옷장에는 연회용 드레스가 수두룩했다. 또 그녀는 룸메이트가 긴급 상황에 드레스 좀 빌려 입는다고 해서 난리를 피울 인품의 소유자는 아니었으므로, 브리의 드레스는 사이즈만 맞았어도 나에게 가장 좋은 선택지가 되었을 것이다.

반면 내 옷장에 연회용 드레스라고는 시작의 달에 볼턴으로부터 선물 받은 것이 다였다.

눈 딱 감고 한 번 더 입을까. 볼턴이 부디 개인적인 공격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였다.

“아리엘 님? 왜 아직 있어요?”

문이 열리는 소리에 돌아보니 키 작은 여자애가 품에 구두를 가득 안고 있었다. 브리의 ‘금화로 얻은 충성’ 중 하나로, 전에 내 치장을 도와주기도 한 일용직 하녀 파티마였다. 오늘도 명화 속의 르네 레베스크처럼 땋은 가닥가닥을 동그랗게 말아 번을 올려 주었는데, 어찌나 단단하게 고정했는지 혼비백산하여 허둥거리는 와중에도 일말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라고 생각한 것은 나뿐인 모양이었다. 파티마는, 지옥의 불구덩이라도 본 듯한 얼굴을 하고서는, 브리아나의 구두들을 대충 정리하자마자 내게로 달려왔다.

“세상에, 머리 꼴이 쓰레기예요! 빨리 여기 앉아요.”

“쓰레기 수준이야?”

“그럼요! 오늘 뒷정리 담당이 로렐이 아니라 파티마였던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해요. 걘 머리를 끔찍하게 못 땋거든요.”

대륙 공용어에 서툰 파티마의 종알거리는 말투가 퍽 귀여웠다. 근데 지금 내가 직면한 문제는 머리 꼴이 엉망인 게 아니니까. 드레스 꼴이 엉망인 거지. 처참하게 드러난 등짝을 내보이자, 파티마는 식겁하여 비명을 질러 댔다.

“씨발! 로렐이 남았어야 했어요! 파티마는 바느질을 끔찍하게 못 해요!”

“파티마, 파티마. 숙녀는 ‘씨발’ 같은 말 안 써.”

“파티마는 숙녀가 아니에요! 아리엘 님이 숙녀예요! 숙녀는 그런… 그런 드레스를 입지 않고요!”

‘야한’이나 ‘남사스러운’ 같은 단어가 머릿속 대륙 공용어 사전에 없었는지, 파티마는 답답한 듯이 가슴을 치다가 이내 한 손의 엄지와 검지 끄트머리를 동그랗게 붙이고 다른 손의 검지를 쫙 폈다. 나는 열두 살 생일이나 겨우 맞았을까 싶은 파티마가 불경한 손동작을 하기 전에 그녀의 눈앞에 남색 드레스를 들이밀었다.

“그래서 이걸 입을까 하는데.”

“전에 입었어요. 귀족 아니어도 똑같은 옷 연속해서 입지 않아요. 수치스러워요.”

“수치스러운 짓이구나, 파티마. 한 수 배웠네.”

“파티마가… 파티마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결연하기 그지없는 한마디를 남기고, 파티마는 종종걸음으로 문을 나섰다. 이내 커다란 외침이 복도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것이 들려왔다. ‘드레스 남는 사람!’

계단과 벽에 이리저리 반사되어 돌아오는 천둥 같은 메아리에는 착잡한 기분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른세수가 절로 나왔다. 귀엽고 어리석은 파티마야. 하늘이 두 쪽 나지 않고서야 사랑의 달 연회의 피츠시몬스 아카데미에 남는 드레스가 있겠니.

근데 하늘이 두 쪽이 났다. 나는 파티마의 현명함을 칭송하며 그녀가 찾아낸 완벽한 사이즈의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어디서 났냐고 물었더니 웬 학생이 자기는 연회에 참석 안 한다며 빌려준다 했단다.

참석하지 않을 거면 드레스는 왜 맞춰? 사뭇 궁금했지만 캐물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파티마는 섬세하게 머리 땋는 법을 알았으나 동시에 여러 일을 하는 법은 몰랐다. 내가 말을 걸 때마다, 그녀는 미간에 잔뜩 주름을 잡고 핀잔을 줬다. ‘아리엘 님! 똥 같은 머리 하기 싫으면 가만히 있어야 해요!’

나는 똥 같은 머리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가만히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파티마는 내 두피와 아주 조금 떨어진 위치에 기다란 핀을 꽂음으로써 초과 근무를 마무리 지었다.

원래 나는 파티마의 노고를 금화로 치하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극구 사양하기에 결국엔 꽁꽁 숨겨 두었던 비밀 병기를 꺼내고야 말았다. 내 룸메이트가 자리를 비웠을 때나 조금씩 갉아 먹던 일레스티아산 버터 쿠키 말이다. 학생회실의 테이블 서랍에 들어 있는 바로 그거.

“아리엘 님은 엄마보다 조금 덜 좋은 사람이에요. 아빠보다는 조금 더 좋고요.”

파티마가 쿠키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내 기억에 그녀의 아버지는 점수를 줄 수 없는 가장이었다. 인성이 글러먹은 것은 아닌데 현실 감각과 생활력이 글러먹어서 파티마가 고사리 손으로 꾸린 세간을 어떻게든 망쳐 놓기 일쑤였던 것이다.

“범위가 너무 넓지 않아?”

“파티마는 아빠 사랑해요. 어쨌든 아빠잖아요.”

어깨를 으쓱이는 소녀는 제법 어른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파티마의 손아귀에 쿠키를 통째로 쥐어 주었다. 아무도 주지 말고 혼자 먹으라고 하면서.

***

연회장으로 향하는 길이 꽤나 지저분했다. 색색의 종이를 잘라 꽃잎처럼 만든 것이 모퉁이마다 소복하게 쌓여 축제 분위기에 불을 붙였다.

나는 종이 꽃잎 사이에서 내 이름이 적힌 플래카드를 발견했다. 팔뚝만 한 길이의 플래카드는 까만 천에 물감으로 글씨를 쓴 것이어서, 손목에 감고 매듭을 묶자 적당히 액세서리처럼 보였다.

내가 여왕으로 선정될 가능성은 단언컨대 없었지만, 그래도 나쁜 경험은 아니었다. ‘연회의 여왕’ 후보가 되는 것 말이다.

켄드라 브래들리는 그녀의 우상인 제이든 스펜서 다음으로 아리엘 달튼을 떠올릴 정도로는 나를 좋아했다. 미아 페터슨도 그림을 아주 잘 그리고, 목청이 크고, 또 나를 좋아했다. 그 외에도 내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가 생각 외로 많았다. 누군가 내게 가진 호의를 확인하는 건,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미스 …카시!”

오브라이언이 보기보다 쌀쌀맞은 애가 아니라는 사실도 새로이 깨닫게 되었다. 내 기억 속에는 아카데미에서의 구 년이 있었으나 거기에서 아나이스 오브라이언을 찾아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연회의 여왕’이 아니었다면 걔한테 도움 받을 일도 없었겠지. 새삼 애덤 월시는 그의 비열한 짓거리를 내가 충분히 즐기고 있다는 걸 알까 싶었다. 멍청한 월시. 도대체 얼마나 멍청하면 골탕도 제대로 못 먹일까.

“미스 엘리… 맥카시…!”

아까부터 희미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는데, 점차 가까워지더니 마침내 바로 뒤까지 왔다. 귀에 익은 이름에 고개를 돌리자 웬 남자와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

안경을 썼고, 처진 눈꼬리와 살짝 구부러진 콧대가 조화스럽지는 않지만 거슬리지도 않는, 성실한 인상의 남자였다. 소위 말하는 ‘공부 잘하게 생긴’ 얼굴.

그의 차림새가 어디선가 본 듯했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드레스는 몸 선을 타고 흘러내리는 옷감의 자연스러운 형태를 강조하는 디자인이었는데, 전체적으로 탁한 분홍 톤에 검은 레이스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의 예복은 조끼와 바지가 검었으며 탁한 분홍 톤의 크라바트가 거기에 잘 어우러졌다.

최근 볼턴이 만든 크라바트 유행은 살짝 부풀려 끄트머리를 조끼 안쪽으로 집어넣는 것이었으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부드럽게 흩어지는 천자락의 모양새가 내 드레스의 치맛단과 비슷했다.

어디서 어떻게 봐도 함께 맞춰진 의복이었다. 만일 이 드레스가 빌린 것이 아니었다면, 그와 내가 약혼한 사이라는 오해를 받아도 할 말이 없을 것이었다. 옷을 맞춰 입는 건 파트너끼리나 할 법한 일이었고, 사랑의 달 연회에서 파트너를 맺는다는 건, 적어도 서로 결혼에 대한 긍정적인 의사를 확인했다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약혼은커녕 난생처음 보는 사이였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는 턱을 떨어뜨렸다. 너나 할 것 없이 동시에 같은 말이 나왔다.

“누구세요?”

“누구…?”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먼저 입을 연 것은 남자였다.

“코완 후작가의, 대릴입니다. 그 드레스는 제가 맥카시 백작가 영애에게 선물한 것인데, 실례지만, 성함을 여쭈어도 될까요?”

나는 그제야 파티마가 언급한 ‘연회에 참석 안 한다는 학생’의 정체를 깨달았다. 맙소사, 엘리자베스 맥카시, 그게 너였단 말이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