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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40화 (40/178)

40화

연회의 두 번째 날이 밝았다. 무도회의 첫날이기도 했다. 외부인의 참석을 의식해서인지, 사랑의 달 무도회는 지극히 전통적으로 진행되었다. 춤곡으로는 느려 빠진 미뉴에트만 허용되었으며 신나는 박자에 몸을 움직이기란 꿈도 꿀 수 없었던 것이다. 지루하기 짝이 없다는 뜻이었다.

연회의 왕과 여왕 선출은 무도회를 그나마 흥미롭게 하는 요소였기 때문에, 후보들은 화려하게 차려입고 스스로를 뽐내는 것 외에도 할 게 많았다. 퍼레이드라든가.

나는 스티아 신과 운명의 물레를 저주하며 사면이 뚫린 마차에 올랐다. 사실, 마차라는 표현에는 어폐가 있었다. 말이 끌지를 않았으니까. 세계 멸망을 대비한 방주처럼 꾸며진 말 없는 마차는 켈란 일레스티아의 신성력으로 움직이게 될 것이라고 했다.

밝은 크림색에 금사로 자수를 놓은 예복을 걸친 켈란은 오늘따라 아주 성스러웠다. 신성력을 써서 빛나기까지 하면 어떤 사명을 띠고 현세에 강림한 천사처럼 보일 거였다. 그의 자리가 내 바로 뒤였기 때문에 그 모습을 못 보는 게 아쉬웠다.

나의 왼쪽에는 검붉은색의 드레스로 몸의 일부-덩치에 비해 택도 없는 사이즈여서, 카일은 스스로의 앞면만을 겨우 가릴 수 있었다-를 감싼 카일이 앉아 있었다. 대담한 디자인의 드레스가 그의 너른 어깨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승모근과 삼각근이 우람했다.

화장을 어찌나 공들여서 했는지, 얼굴이 짜증 나게 고와서 괴리감이 컸다. 다미앙 할아버지가 나돈 출신이었으므로 그의 피부는 일반적인 밀루아인보다 짙었는데, 살짝 어두운 색을 얹으니 집시 여인같은 분위기가 났다. 그러니까, 근육 운동을 엄청나게 한.

“뭐 하는 짓이야, 카일?”

평생 웃을 것의 7할 가량을 웃고 나서 물었다.

“‘카일리’야, ‘L’이 두 개니까 발음에 주의해 줘.”

그가 새침하게 대답했다. 벌써 콘셉트에 몰입한 모양이었다.

“좋아, 카일리. 어디서 본 적이 있는 드레스인데, 네가 그걸 찢어먹었다는 걸 알면 코넬리아가 과연 가만히 있을까?”

“이건 내 드레스야. 싸움은 악독한 코넬리아 빌라드가 먼저 걸었고.”

‘카일리’는 그녀의 굵은 팔뚝을 버티지 못하고 벌어지기 시작하는 소매의 솔기를 가리켰다.

“마베릭이 그러는데, 걔가 내 방을 옷장으로 만들었다더라. 그러면 이제 걔 드레스 소유권의 반절은 나에게 있는 거지.”

“그야말로 기적의 논리인걸. 둘이 이러고 있는 거 알면 이디스가 참 좋아하겠다.”

코넬리아는 카일의 연년생 누이였다. 그녀와 카일은 여타 남매가 그렇듯이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으므로, 가여운 이디스는 결혼식 날까지도 그들의 싸움을 말려야만 했다.

“이대로라면 부모님의 장례식에서도 멱살을 잡고 말 거야.”

면사포로도 가려지지 않던, 이디스의 수심에 찬 표정이 기억났다. 그녀의 절박한 부탁도.

“아리엘, 네가 많이 도와주렴. 카일도 코넬리아도 너를 좋아하니까, 네 말은 들을 거야.”

나는 점잖은 대답을 돌려주었지만, 속으로는 이디스가 그녀의 동생들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만일 둘 중 하나라도 나의 충고를 귀담아 듣는 성격이었다면 사이가 이 모양은 아니었을 거였다.

“이디스도 이젠 나랑 걔가 같은 하늘 아래 설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 돼.”

카일이 비장하게 말했다. 그가 몸을 구부리자 드레스에서 굉장한 소리가 났다.

“그나저나, 코넬리아 빌라드 때문에 나는 돌아갈 곳 없는 떠돌이 신세가 됐어. 그래서 말인데, 달튼의 데릴사위가 될 날을 조금 앞당겨도 될까?”

“정말 질리지도 않고 헛소릴 지껄이는구나.”

“미안한데.”

부드러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바로 뒤에 앉아 있던 켈란 일레스티아였다.

“이제 출발할 거라서, 조금만 조용히 해 줄 수 있을까?”

나는 무지 머쓱해져서 입을 다물고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런데, ‘이제 출발한다’고 했던 것치고는,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다시 농짓거리나 하기에 학생회장의 존재감은 무시할 만한 것이 못 되었다. 하릴없이, ‘피츠시몬스의 르네 레베스크’ 콘셉트를 고수하기 위해 허리에 찬 검자루를 만지작대며 주변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까 빈자리가 있었다. 아나이스 오브라이언이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브라이언은 카일이 나에게 말 대신 손장난을 치기 시작한 지 십 분이 지났을 때쯤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거추장스러운 장식이 달린 드레스와 굽이 뾰족한 구두 차림이었기 때문에 방주 모양의 마차에 쉽사리 발을 디디지 못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안녕, 오브라이언.”

‘칼을 찼으니까, 나를 네 기사라고 여겨도 좋아.’ 그녀가 같은 귀족 여자애의 에스코트를 받아도 되는 건지를 고민하고 있는 것 같길래 덧붙였다. 그러자 오브라이언은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고마워’라고 했다. 듣던 대로 우아하지만 일견 냉담한 태도였다.

아나이스 오브라이언은 로즈마리 블로썸의 전학 이전까지 피츠시몬스에 여왕으로 군림해 왔다. 반짝이는 금발과 시리도록 차가운 푸른 눈동자의 귀공녀에게 고백하려면 번호표를 뽑아 놓고 기다려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오브라이언 공작가는 대대로 주교를 배출한 성직자 가문이었다. 아나이스 오브라이언 역시, 신을 모시는 입장에서, 한 번도 피츠시몬스에 만연한 분홍빛 소문의 주인공이 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방이 위치한 여자 기숙사 2층은 항상 끈질긴 구애자들로 문전성시였는데, 확실히 가까이서 보니 그럴 만큼의 개연성이 그녀에게는 존재했다.

“와, 너 진짜 예쁘다.”

참지 못하고 내뱉고야 말았다. 오브라이언은 다시금, 하지만 이번에는 약간 도도하게 ‘고마워’라고 했는데, 귓불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저렇게 예쁜 애도 예쁘다는 얘기에 부끄러워하는구나. 인사보다 많이 들었을 것 같은데.

아나이스 오브라이언은 자리에 앉자마자 드레스 자락을 완벽한 부채꼴로 폈다. 그러자 그것이 어떠한 신호라도 된다는 듯이, 선장이자 조타수이자 동력원인 켈란 일레스티아의 지휘 하에 방주-마차가 출항했다.

구경꾼 무리가 환호성을 질렀다. 일부는 아나이스 오브라이언과 로즈마리 블로썸의 이름이 쓰인 플래카드를 흔들었는데, 의외로 그들을 제외한 상당수가 ‘카일리 빌라드’를 부르짖고 있었다. 환호에 보답하기 위해, 카일은 큼지막하게 잡힌 이두박근을 자랑하는 자세를 취했다.

“논다, 놀아.”

“아리엘 선배애애!”

두껍기 그지없는 낯짝에 감탄을 금치 못하던 와중에 내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켄드라와, <몽마의 목을 치는 아리엘 레베스크>를 그렸다던 미아 페터슨이었다. 평소에 말을 붙이면 수줍게 웃고나 있던 미아는, 조그만 체구에 목청이 얼마나 큰지 신난 채프먼 교수조차 그녀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눈이 마주치자 켄드라가 머리 위로 하트를 만들어 보였다. 나는, 방금 카일을 비난했던 주제에, 물색없이 들떠서는 검을 잡아 뺐다.

사상 초유의 여장남자 ‘카일리 빌라드’와 파격 콘셉트로 승부하는 ‘아리엘 레베스크’는, 놀랍게도, 연회의 여왕 후보로서 컬트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켈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확실히 또라이가 한두 명만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들었다.

손아귀에 말아 쥔 검을 치켜들자 미아는 용이 브레스를 뿜는 것보다 거센 비명을 내질렀다. 켄드라가 스리슬쩍 귀를 막았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투둑’ 하는 소리가 났다.

“카일, 속옷 바람으로 아카데미를 활보하고 싶지 않으면 가만히 있는 게 낫지 않을까?”

“내가 속옷 바람이 되면 쟤들은 더 좋아할 텐데.”

카일이 능글맞게 말했다. 그러고는 더 강한 관심을 갈구하며 아나이스 오브라이언과 마르퀴즈 볼턴이 있는 선미 쪽으로 갔다. 볼턴이 카일의, 아니 ‘카일리’의 토 나오는 꼬라지를 보고 대경실색을 하는 것이 보여서 조금 웃었다.

켈란 일레스티아의 왼쪽, 그러니까 카일이 있던 자리의 반대편에는 제이든이 서 있었다. 나는 숙맥인 그가 이만한 규모의 인파에 뒤덮인 상황을 어색해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능숙하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는 밀루아의 영웅이었고, 전쟁에 참여한 적은 없지만 용과의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적은 있었다. 그것도 젖살이 채 빠지지도 않은 어린 나이에. 심지어 이렇게 모양 빠지는 마차 비스무리한 것이 아니라 용을 타고 수도의 거리를 행진했으니, 그야말로 인간의 바다를 헤엄치는 기분이 들었을 것이었다.

내 시선을 깨달았는지, 그가 이 쪽을 돌아보고는 작게 목례했다. 나는 피식 웃고 허리춤에 손을 댄 뒤 무릎을 살짝 구부렸다. 내가 입은 드레스는 몸에 딱 달라붙는 종류였으므로 옷감을 쥐기가 어려웠다.

제이든 스펜서의 어깨 너머로 브라이스 나돈이 보였다. 제이든과는 정반대로 보기보다 주목받기를 꺼리는 에드가 라모스는 도망을 친 건지 보이지가 않았다. 근거는 없었지만, 나는 그가 지금쯤 소금 사막의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즐기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돈은 어깨를 부풀려 고전적인 멋이 있는 드레스를 입은 로즈마리 블로썸을 계속 흘깃거렸다. 블로썸은 자신을 부르는 많은 사람들과 일일이 눈을 맞춰 가며 호응했는데, 나돈은 그녀의 미소에 누가 황홀한 표정을 지을 때마다 그를, 혹은 그녀를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곤 했다.

여기도 잘 논다. 혀를 차며 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그러자 또다시 ‘뚜둑‘ 소리가 났다. 카일은 멀리 간 지 오래였으니까, 결단코 그에게서 난 소리는 아니었다. 불현듯 불안감이 엄습했다.

사랑의 달 연회를 위해 연초부터 준비한 나의 드레스에는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특정 부위의 옷감이 그닥 튼튼하게 꿰매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등짝으로 일약 화제의 중심이 된 이후로 나는 연회 무렵이 되면 누구보다 혹독하게 드레스를 검수하곤 했다.

올해는 어땠던가. 카일과의 사건은 사랑의 달 연회를 이 주 앞둔 시점에 벌어졌고, 나는 닷새 동안 플로렌스 벨의 세계에 다녀왔다. 이후로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드레스를 가봉할 때 재봉사에게 하자에 대해 언급했던가?

아니.

피가 차갑게 식었다. 뒷목에 시원한 바람이 분다고 느낀 게, 착각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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