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당시에도 확실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가진 죄책감의 크기가 필요 이상으로 커서. 오며가며 얼굴만 본 사이에 거기까지 할 이유가 전혀 없어서.
마침내 모든 수수께끼가 풀렸다. 그러고 보면 피츠시몬스 타임즈에 실린 인터뷰도 완전히 틀려먹은 것만은 아니었다. 나는 씩 웃는 에드가의 팔뚝을 찰싹 치고 커다란 선인장과 기묘하게 깎인 암석 사잇길을 걸어 나갔다.
“잘생긴 걸로 무마하려고 하지 마, 짜증 나게. 그런다고 안 넘어가 줘.”
“잘생겨 보이기는 한다는 거네. 신난다.”
그가 변죽 좋게 대꾸하며 뒤를 따랐다. 얼마간 걷자 바닥의 색이 변했다. 희고, 물결 모양으로 뭐가 말라붙어 있었다.
조금 더 가니까 물이 차올랐다. 신발의 반절이 잠길 만한 깊이였다. 하여간 아리엘 달튼의 인생에 도통 도움이 안 되는 에드가 라모스. 미리 말해 줬으면 샌들 신었잖아. 혀를 차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그만 숨이 멎을 뻔했다.
‘예쁘지?’ 내 옆구리를 찌르는 에드가의 말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생색 되게 내는 말투인데 귀에 거슬리지가 않았다. 생색 되게 내고도 남을 만한 장관 때문이었다. ‘어디야, 우리?’ 내가 말해 놓고도 너무 얼빠진 목소리가 아닌가 싶었다.
눈앞에 하늘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정확히는, 반은 하늘이었고, 반은 얕은 호수에 반사된 하늘이었다. 얼마나 깨끗하게 반사가 되는지 두 하늘 사이 경계선을 찾기가 어려웠다. 멀찍이 홍학 무리가 보였는데, 구름 위를 고고히 떠다니는 것처럼 보여서 부러워질 정도였다.
“계승권 포기할 때 오로지 이거 때문에 평생 부릴 패악 다 부렸잖아. 라모스 공작 하려고.”
“라모스 공작령이라고? 진심이야?”
마법사의 공간이동 범위는 그가 가진 마력과 비례했다. 또 공간이동 주문은 지나치게 어려웠기 때문에 마법진의 도움을 받아도 일정 이상의 거리는 못 가는 게 현실이었다. 많은 피츠시몬스 학생들이 주말마다 놀러 나가는 데가 거기서 거기인 이유였다.
발가락을 간지럽히는 모래와 빛바랜 녹색의 선인장 때문에 나돈인 줄은 바로 알았다. 동남부가 아니라 서북부인 줄은 몰랐지. 이런 어마어마한 재능충을 봤나! 내가 말을 잃자 그걸 화가 났다는 신호로 해석했는지, 에드가는 약간 쩔쩔매는 모양새가 되었다.
“동의 없이 멀리까지 데려온 건 미안한데, 봐줄 거지? 응?”
“이런 거를 봐 놓고 입을 닦을 수는 없지.”
엄숙한 종전 선언이었다. 그러자 그는 금세 기고만장해졌다.
“역시 그렇지? 나돈의 소금 사막은 죽기 전에 못 보면 손해인 절경으로 꼽히거든. 이제 좀 구애에 응할 마음이 들어?”
“너무 까불지는 말고.”
“아, 얼마나 매력적인 성품인지.”
가소롭다는 듯이 낄낄거리는 에드가 라모스가 얄미웠다. 제2차 달튼-라모스 전쟁이 발발했다.
***
사랑의 달 연회는 시작의 달 연회와는 달리 한 주 내내 이어지는 행사였다. 무도회는 전야제와 뒤풀이를 제외하고 삼 일간 열렸다. 파트너로 허용된 것은 혼인이나 그에 준하는 관계에 속한 상대뿐이었다.
약혼자가 있는 애들이나 학생회장이라는 이유로 아카데미장을 에스코트해야만 하는 켈란 일레스티아가 아니고서는 혼자 다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친구 없고 애인도 없는 사람으로서 대환영이 아닐 수 없었다.
연회 기간을 맞아 아카데미의 이곳저곳에 앙증맞은 장식이 되어 있었다. 나는 켈리 라미레즈와 함께 전야제의 하이라이트, 바다 슬라임을 보러 아카데미 근방의 타메니 강으로 향했다.
늦은 밤이었으므로 군데군데 마법 조명이 길을 밝혔다. 거기 매달린 모란앵무 조각은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깜찍하게 부리를 맞대는 자세를 하고 있었는데, 발 빠르고 악마 같은 학생들에 의해 짝짓기를 하는 꼴이 되어 있었다.
“나는 피츠시몬스가 참 좋아. 나만 또라이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 주거든.”
켈리가 감격해서 속삭였다.
“저 자식에 비하면 자매님은 성령이시죠.”
멀리서 드와이어 교수의 사다리를 훔치는 카일을 가리키며 말했다. 덕분에 모란앵무의 짝짓기를 저지하기 위해 조명을 받친 기둥에 기어올랐던 불쌍한 드워프는 옴짝달싹도 못 하게 되었다.
‘미스터 빌라드!’ 드와이어 교수는 그의 여름나기 로브를 입고 있었으므로 몸동작이 사뭇 둔했다. 그가 분노하여 소리쳤다. ‘미스터 빌라드에게서 사다리를 뺏으면 봉사 점수를 주겠어요!’ 이윽고 근처의 학생들이 카일에게 달려들었으나 그리폰 크리켓 부의 주장 노먼 케이시에 막혀 나가떨어졌다.
말썽쟁이 듀오는 타메니 강의 반대쪽으로 달리기 시작했으므로 우리와 점차 가까워졌다.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칠 리 없는 켈리 라미레즈가 엄호하듯 카일의 뒤를 지키던 케이시를 향해 외쳤다.
“노먼! 네 장례식까지 반년 남았다!”
케이시가 이를 악물었다. 웃다가 사다리를 떨어뜨릴 뻔한 카일은, 켈리의 곁에 있는 나를 보더니 활의 시위를 당기듯이 오른팔을 뒤로 뺐다. 이내 한쪽 눈을 찡그리며 그것을 나에게 겨누고 쏘는 시늉을 했다.
“쟤 너한테 끼 부린다.”
켈리가 말했다. 나는 간결한 손가락 욕으로 카일의 어처구니없는 인사에 화답했다. 아직도 그와 이렇다 할 대화를 나누지 못했기 때문이다. 죄 없는 드와이어 교수 괴롭힐 시간은 있고 친구 만날 시간은 없냐. 빌어먹을 자식.
타메니 강 하구에는 이미 상당한 인파가 모여 있었다. 통금 시간을 어겨도 되는 거의 유일한 날이니 당연했다. 카일과 케이시에게 시간을 뺏긴 여파인지, 강의 군데군데가 번쩍거리는 게 촘촘한 인간의 벽 사이로 어렴풋했다.
바다 슬라임은 말 그대로 바다에 사는 슬라임이었는데, 평소엔 깊은 해저에 있었지만 산란기에는 강의 하구까지 헤엄쳐 와서 알을 낳곤 했다. 해양 먹이 사슬의 거의 밑바닥을 차지한 그들로서는 천적을 피하는 동시에 알을 지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륙의 일부 지방에서 마나 해파리라고도 불리는 바다 슬라임은 산란을 할 때 발생하는 빛과 춤추듯 보이는 움직임이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했다. 또 산란기가 사랑의 달 연회 기간과 겹쳤기 때문에, 그들의 산란을 구경하는 것은 어느샌가 피츠시몬스의 연례행사가 되었다. ‘사랑’이라는 테마에 아예 들어맞지 않는 건 아니었으니까 뭐.
“쪼끔 늦었나 보다.”
“사 년 동안 봤는데 일 년은 안 봐도 되지.”
켈리가 태평하게 중얼거렸다. 일말의 미련도 없는 듯했다. 나는 팔 년 동안 봤어도 더 보고 싶었어서 아쉬웠지만, 내색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악담을 퍼부었다.
“따지고 보면 징그럽긴 해. 애 낳는 걸 누가 막 쳐다본다고 생각해 봐.”
“와, 너 땜에 이제 안 보고 싶어졌어.”
대답하는 목소리가 굵었다. 까치발을 들다 말고 고개를 돌리니 카일 빌라드였다. 겨드랑이에 사다리를 낀 채로, 얼마나 뛰었는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너는 보지 마, 개자식아.”
“애정 표현이라는 거 알아. 나는 네 냉소적인 유머 감각을 사랑하거든.”
그가 땀에 젖은 앞머리를 반만 넘겼다. 시작의 달 연회에서 꽤 호평이었는지, 이후로 카일은 그렇게 하면 자기가 멋있어 보이는 줄로만 알았다.
‘이게 누구야.’ 근래 나와 카일이 절찬리 숨바꼭질 중인 것을 꿰고 있는 켈리 라미레즈가 빈정거렸다.
“변기에 빠져 콱 뒈져 버린 줄 알았는데.”
말싸움에서 밀리는 법이 없는 카일 빌라드가 재빨리 지껄였다.
“거의 그럴 뻔했지. 마법 인형이 도와준 덕택에 살았어. 그리고 그건 내가 그들의 권익 향상을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지.”
그는 피츠시몬스에서 채프먼 교수 성대모사를 제일 잘하는 학생이었다.
“명심하세요, 레이디 라미레즈. 선의는 항상 보답받는답니다.”
낯짝이 두꺼운 사람으로부터는 놀리는 재미를 찾을 수 없기 마련이었다. 켈리는 카일에게 급격하게 흥미를 잃고 놀릴 만한 사람-노먼 케이시를 찾아 떠났다.
“방해꾼이 사라졌네. 이제 오붓하게 있을 수 있겠다.”
“오붓은 개뿔. 너 나 피해 다녔지? 왜 그랬어?”
“내가? 너를? 그랬나?”
카일이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주절거렸다. 나는 그의 정강이를 걷어차려 했는데, 잘못하고 드와이어 교수의 사다리를 걷어차고 말았다. 발등에 찌릿한 통증이 느껴져서 확 주저앉았다.
“아리, 괜찮아?”
허리까지 수그려 가며 살피는 그의 턱을 머리로 들이받았다. 내가 주저앉은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다!
“악, 야!”
“외출 제한 걸렸을 때는 꾸역꾸역 문병 와 놓고, 풀리니까 숨어 버리는 건 무슨 경우야? 너 청개구리야? 누가 막아야지 막 불이 붙고 그래?”
“그게….”
“너한테 물어볼 거 진짜 많았는데, 다 까먹었다고, 멍청아! 로즈마리 블로썸이랑 걔의 이상한 능력이랑 내가 여섯 번이나 5학년이 된 거랑….”
“잠깐, 잠깐만, 아리엘. 너 방금 뭐라고 했어?”
카일이 나를 세게 붙잡았다. 유령이라도 본 사람처럼 혼이 쏙 빠져 있었다. 뻘한 소리로 말 돌리지 말라고 쏘아붙이니까 되게 답답하다는 듯이 뻐끔거렸다. 안색은 하얗다가, 빨갰다가, 또 새파래졌다. 아주 난리였다.
정상이 아니었다. 물론 카일 빌라드는 잠을 자는 동안을 제외한 모든 순간 3할 정도는 맛이 가 있었지만, 맹세코, 그렇게 당황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카일과 나누었던 대화를 천천히 복기했다. 그가 암살자처럼 은밀히 나의 병실에 잠입한 것과, 로즈마리 블로썸, 걔의 이상한 능력 그리고 여섯 번이나 5학년이….
“야, 카일! 드와이어 교수님이 딜라이니 우드한테 가속 주문 걸었어! 튀어!”
노먼 케이시가 다급하게 카일의 팔뚝을 두드리고는 달음박질을 쳤다. 카일은 바닥을 구르던 사다리를 집어 들고 케이시를 따랐다. 달리는 등짝이 조금씩 작아지다가 마침내 요만한 점이 될 때까지, 그는 멍하니 선 나를 계속해서 돌아봤다.
흔들리는 녹색 눈동자가 시야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을 때쯤 정신을 차렸다. 시험 삼아 속삭여 보았다. ‘카일, 나는, 내 시간은, 되돌아가고 있어.’ 저항 없이 부드럽게 목소리가 나왔다. 날카롭게 갈린 쇠못이 머리통을 관통하는 듯한 불쾌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
‘제4의 벽’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