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에드가는 커피를 덮은 부드러운 거품에 스푼으로 작은 하트를 만들었다.
“이거 봐, 엄청 잘 그렸지.”
“그럼 케이틀린 대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볼드윈 교수님은 운이 나빴지. 우리 학년엔 특히 일레스티아 출신이 많았잖아.”
그는 내가 건네는 각설탕 한 알을 반 토막 낸 뒤 그것을 또 반으로 잘랐다. 그러고 나서 새끼손톱보다 작아진 설탕을 그의 잔에 투하했다. 내 잔에 들어간 설탕의 양은 정확히 그것보다 여덟 배가 많았다.
“너무한 것 같지 않아?”
“뭐가?”
“일레스티아의 신학 말이야. 걔네들에 따르면 우리의 운명은 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거고, 어떻게 발버둥을 쳐도 빠져나갈 수 없는 거잖아.”
“그야… 그렇지.”
발화자가 에드가여서인지, 그건 그의 개인적인 불행에 대한 한탄처럼 들렸다. 형제의 칼로 살아야 하는 운명 말이다. 그 외에도 에드가에게 주어진 역할이 있음을 알았으므로-로즈마리 블로썸의 상대역이라는-뭐라 해 줄 말이 없었다.
또 나는 충분히 발버둥쳐 왔으나, 결과적으로 내가 떨어진 지옥에 어떠한 변화도 만들지 못했던 것이다. 어쨌든 로즈마리 블로썸은 그녀를 거부하던 켈란의 마음을 얻고야 말았으니까, 그걸 따지면 케이틀린 대제의 주장은 진리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침묵이 길어지기 전에, 다행히, 눈치 빠른 음유 시인이 나타났다. 끄트머리가 뾰족한 모자를 쓰고 익살스럽게 웃는 그는 체스를 두는 테이블을 방해하는 짓거리에 질린 듯했다.
“나돈 출신인가?”
“바로 아시네요. 그리운 노래를 불러 드릴까요?”
음유 시인의 짙은 피부색과 각진 얼굴뼈는 에드가로 하여금 그의 고향을 짐작하게 했다. 에드가가 금화 한 닢을 건네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노래했다. 사막의 무희와 사랑에 빠진 왕자의 이야기였다.
‘여기 나오는 왕자가 브라이스의 증조할아버지야.’ 에드가가 몸을 기울여 귓속말했다. 그러고는 노래의 일부를 따라 불렀는데, 기교 없이 투박한 가창이었지만 음색은 꽤나 듣기 좋았다.
‘음치라며?’ 이번엔 내가 귓속말을 건넬 차례였다. ‘와, 띄워 주는 거래도 기쁜데.’ 에드가는 진짜로 행복해진 듯이 웃었다. 그러고는 음유 시인에게 금화 한 닢을 더 건넸다.
“더 재미있는 노래는?”
“팔리는 노래는 다 거기서 거기예요.”
음유 시인의 혀는 기름이라도 발린 것처럼 매끄러웠다.
“하지만 원하신다면 즉석에서 작곡이라도 해 드려야죠.”
이윽고 손에 들린 류트에서 음계가 쏟아졌는데, 거기 얹힌 노랫말에 나는 선인장이라도 삼킨 마냥 불편해졌다.
“우리의 왕자는 달궈진 모래보다 뜨거운 심장을 가졌다네!”
팔리는 노래가 거기서 거기라는 말을 증명하듯, ‘더 재미있는 노래’의 주제 또한 왕자의 사랑이었다. 단, 이번에 그가 사랑에 빠진 대상은 사막의 무희가 아니라 꽃 같은 평민 소녀였다.
“영웅이 가는 길에 꽃의 향기가 빠질 수는 없는 법. 오, 저물어 가는 태양에는 기꺼이 벌꿀술을 바치리.”
‘덜 재미있는 노래’와 달리, 그것은 사랑의 아름다움을 다루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왕자가 어떤 얼간이가 되었는지를 노래했던 것이다. 명백한 조롱이었다. 나는 에드가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커피 하우스를 태워 버릴까 봐 조마조마했다.
예상과 달리 에드가 라모스는 커피 하우스를 태우지 않았다. 음유 시인의 노래를 끊지도 않았다. 단, 노래가 끝나자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러니까, 그걸 웃음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내가 보기에는 사나운 짐승이 먹잇감의 목줄기를 물어뜯기 직전에 짓는 표정 같았지만, 아무튼 그의 눈매와 입매는 휘어져 있었고 그건 사전적 개념의 미소에 부합했으니까.
“훌륭한 노래로군.”
나돈의 막내 왕자, 라모스 공작은 박수를 딱 두 번 치고는 허리춤에서 홀쭉한 주머니를 꺼내 쥐었다. 그가 그것을 뒤집자, 놀랍게도 엄청난 양의 금화가 쏟아져 나왔다. 테이블에 야트막한 금화의 산이 생겼다.
끝을 모르고 쏟아지는 금화의 폭포는 요란한 소리와 반짝임으로 커피 하우스에 자리한 시선들을 끌어모았다. 어느새 서로의 멱살을 잡고 있던 드워프 학자와 일레스티아 학생마저도 우리를 봤다. 부유하기로는 나돈 왕가가 대륙 제일이라고 배웠던 것이 새삼 떠올랐다.
“어찌나 훌륭한지, 누구에게도 들려주고 싶지 않아.”
말하는 어조는 평이했으나, 나는 그가 협박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러자 눈치 빠른 음유 시인은 단박에 에드가가 누구이고 무엇을 원하는지 깨달은 듯했다. 고개를 어찌나 깊이 숙였는지, 자신의 몫을 챙겨 뒷걸음질로 사라질 때까지 그는 뾰족한 모자에 머리통을 먹힌 사람처럼 보였다.
***
“좋은 거 보러 갈래?”
커피 하우스를 나와 구불거리는 내리막길을 하염없이 걷다 말고, 에드가 라모스가 대뜸 말했다. 주색잡기로 아카데미의 정점에 오른 남자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구린 대사였다. 나는 맹렬하게 힐난했다.
“혹시 아는지 모르겠는데, 너처럼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안 따라가. 엄청 변태같이 들리거든.”
“와, 진짜?”
에드가는 충격을 받은 듯이 입을 떡 벌렸다. 확실히, 그런 게 적성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나니까 이해가 되는 순간이 간혹 가다 있었다.
“뭔데, 좋은 거?”
“마법진 없이 공간이동 해 본 적 있어?”
당당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마나 불모지 밀루아를 과대평가하는군.
“밀루아에 그만한 마법사가 있었으면 너네 왕실에 제일 먼저 알렸을 거야.”
“너네 전하는 우리 전하께 뻐길 수 있다면 뭐든지 했을 테니까, 뭐, 그렇겠지.”
밀루아 왕실과 나돈 왕실이 앙숙이라는 건 일레스티아 사람도 알았다. 그의 발화에 담긴 불손함보다, 나는 에드가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다소 냉소적인 호칭을 붙였다는 사실이 더욱 신경 쓰였다.
“아무튼, 없었다는 거네. 어쩐지 들뜨게 되는걸. 네가 난생처음 경험하는 게 있고, 그걸 나랑 한다니까.”
“야, 이제 정말로 변태 같아.”
짧게 눈을 흘기고, 그가 내 쪽으로 팔을 넓게 벌렸다. 그러고는 손끝을 까닥거렸다. 얼씨구.
“그건 또 뭐 하자는 짓거리야?”
“공간이동 마법은 원래 1인용이라 범위가 되게 좁아. 의자 하나에 둘이 앉는다고 생각해 봐. 어떡해야겠어?”
“내가 널 믿을 수가 있어야지.”
“개수작으로 들리는 거 나도 아는데, 정 의심스러우면 나중에 커닝엄 교수님한테 물어보든가.”
그가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거짓말은 아닌 듯했지만, 그래도, 우물쭈물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춤을 추는 것도 아닌데 난데없이 누군가의 품에 안기기에 나는 지나치게 건전한 아카데미 생활을 영위해 왔다.
“네가 올래, 내가 갈까?”
아무래도 학생회의 일원이 갖춰야 하는 소양 중 하나는 부족한 참을성인가 보았다. 험악한 재촉에 떠밀려 쭈뼛거리며 다가갔더니, 에드가 라모스가 팔을 뻗어 내 허리를 끌어당겼다. 가슴이 완전히 맞닿자 심장의 박동이 조화롭게 섞이는 것이 느껴졌다.
중심을 잃을 것 같아 엉겁결에 그의 등을 껴안았다. 이내 주변 공기에 섞인 마나가 진동하는 소리와 함께 기이한 감각이 몸을 감쌌다.
‘마법진을 타는 것보단 자극적일 거야.’ 어둡고 습한, 수챗구멍 같은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 때쯤 에드가는 이렇게 속삭였다. ‘미리 사과할게.’ 저질러 놓고 사과하기 있냐, 개자식아.
마법진 없는 공간이동의 좋은 점을 하나 깨달았다. 에드가 라모스의 형편없는 꼴을 볼 수 있다는 거다.
“야, 주문은 네가 외워 놓고 왜 네가 난리야?”
“내가, 우욱, 이거 잘 안 썼던 이유를, 웩, 까먹고 있었네.”
달튼은 바다와 맞닿은 지방이었고, 나는 상인의 딸로서 걸음마를 떼기도 전에 배를 탔다. 멀미에는 아주 도가 텄다는 소리였다. 공간이동 멀미라고 딱히 다를 건 없었다.
사막 나라의 왕자는 그렇지 않은가 보았다. 안색이 아주 말이 아니었다. 높다란 암석에 겨우 기대 멀건 물을 뱉어 내는 에드가를 한심하게 보다가, 불현듯 굉장한 사실을 떠올려 냈다.
“에드가 라모스.”
“정 없게… 왜 성을 붙여?”
“저번에도 공간이동 하면 됐던 거 아냐?”
“오.”
모양 좋은 입술이 둥글게 말렸다. 되게 심술궂은 장난을 쳤다가 딱 걸린 임프 같은 표정이었다.
“그때는 못 썼다고 하면 믿을래?”
“아니.”
“좋아. 너랑 얘기해 보고 싶어서 그랬어.”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밀색 머리를 쓸어 올리는 에드가의 안색이 아직 창백했다. 아까보다 더 질린 듯도 했는데, 아무래도 나한테 욕먹을 생각에 그런 것 같았다.
“말했잖아. 나는 세상에서 브라이스 흉내를 제일 잘 내는 사람이야. 내 형제들도 구별을 못 한다고. 근데 너는 하니까.”
그건 네 형제들이 무심한 거고, 하려다가 말았다. 얘네 형제들은 서로 죽이려고 들었는데 보통 그렇게 하는 이유가 단지 무심해서는 아니었던 탓이다.
“정말 아무도 구별을 못 해? 그러니까, 부모님도?”
“대자대비하신 국왕 전하께는 아홉이나 되는 자식들을 굽어 살필 여력이 없지. 로즈마리 왕비 전하는, 모르겠네. 나는 뵌 지 좀 됐어. 확실한 건 너랑 내 유모. 근데 유모는 죽었거든. 아, 그리고 빌라드도.”
“카일?”
“맞아, 네 소꿉친구. 신기하지? 밀루아에 뭐가 있길래.”
알 만은 했다. 카일도 나와 같은 처지고, 끔찍하게 오래도록 쌍둥이를 봤을 테니까.
“로즈마리 블로썸은?”
피츠시몬스 아카데미에 다닌 짬으로 치면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또 있었다.
“걔는, 음… 걔도 그렇긴 해.”
석연찮은 말투였다. 나는 그가 블로썸을 꺼린다고 느꼈다. 전에도 종종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지만, 이번만큼 확실하게 와닿은 적은 없었다.
“블로썸을 좋아하지 않는구나.”
“커피 하우스에서 들었잖아. 음유 시인의 노랫거리가 될 정도면, 브라이스는 이미 국민 얼간이가 된 거야. 얼간이가 왕위에 오르길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고.”
에드가가 발끝에 걸리는 돌을 걷어차며 투덜거렸다.
“그리고 수상하다고, 걔. 수상하게 예쁘고, 수상하게 착하고, 수상하게 치근덕거려. 하필이면 ‘로즈마리’인 것도 그렇고…. 근데 그런 얘기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니잖아. 나랑 있을 땐 나한테 집중해 줄 수 없을까?”
“좋아. 처음으로 돌아가서, 에드가-개자식-라모스의 개인적인 욕심에서 비롯된 작은 선택으로 별 추접스러운 소문이 붙은 불쌍한 여자애 얘기를 해 볼까?”
“그래서 내가 책임 딱 지고 수습했잖아. 아냐?”
어쩐지! 분통이 터져서 발을 동동 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