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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37화 (37/178)

37화

나는 깔깔대고 웃었다. 한편으로는 의아했는데, 스펜서 공작가는 도대체 성교육을 어떻게 하길래 열아홉이나 된 후계자가 이토록 순진한 걸까.게다가 그는 밀루아 왕실 기사단에 속해 있었다. 나는 기사가 용병이 아닌 건 알았지만, 둘 사이에 엄청나게 큰 차이가 없다는 것도 알았다.

내게 방중술을 가르쳤던 마가리타에 의하면, 오히려 환락가에 자주 보이는 건 용병보다는 기사였다(매기는 환락가 출신의 코르티잔으로, 지글러 후작의 정부로 자리를 잡고 나서는 귀족 아가씨들에게 갈고 닦은 기술을 전수하는 것을 소일거리로 삼곤 했다.). 이해는 되었다. 용병들은 금화에 살고 금화에 죽었으므로, 그들에게 금화의 가치는 거시기에 쏟아 내기 위한 것 이상이었다.

“제이든, 네가 얼마나 때 묻지 않았건 간에 알아 둬야 하는 게 하나 있어. 대부분의 여자애들은 거시기 얘기를 하는 걸 좋아해.”

내가 대륙의 모든 여자애들을 만나 본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내가 만나 본 여자애들은 다 그랬다. 나의 진지한 선언에 제이든 스펜서는 커다란 손으로 새빨개진 얼굴을 가렸다. 반응이 유달리 깜찍해서, 불현듯 와닿는 게 있었다.

“있잖아, 혹시나 해서 묻는데… 사귀어 본 적 없어, 여자 친구?”

“응.”

그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나는 깜짝 놀랐고, 루이사와 제이든을 친구로 만들겠다는 당초의 목표는 내 버린 채 그와 함께 사육장 울타리에 걸터앉았다.

“왜?”

“왜냐니?”

“넌 ‘밀루아의 영웅’이잖아. 스펜서의 소가주이자 힐랜드의 후작이기도 하고. 네가 얼마나 목석처럼 굴든 여자들이 너를 가만히 두지는 않았을 텐데. 내 사촌 조디만 해도 네가 머리 장식을 주워 준 일로 상상 속의 너랑 셋째까지 낳았다고.”

“그건….”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그건, 사랑이 아니야.”

“사아랑?”

나에게도, 당연히, 낭만이 있었다.

탑에 갇힌 나를 백마 탄 기사가 구해 주길, 혹은 내 마차를 약탈한 산적 두목이 알고 보니 왕의 사생아이길 바라기는 그만둔 지 오래였다. 호감을 느낀 상대와 알콩달콩 연애하는 꿈 정도는 꾼다는 거다. 가끔은 귀엽고, 가끔은 눈물이 찔끔 나고, 가끔은 낯부끄럽기도 한, 그런 연애 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나는 첫사랑을 처참히 실패하고 첫연애의 망령에 시달리는 와중이었다. 그것들은 나를 낭만의 냉담자가 되도록 했다. 마베릭을 비난이야 했다만, 엘리자베스 맥카시와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아리엘 달튼은 2학기 등록금을 빼는 짓 같은 건 결단코 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만일 내 성이 ‘스펜서’라면, 어렴풋한 낭만을 기다리기보단 연회장에 널린 욕망을 쥐는 게 편했다.

그렇게 말했더니, 제이든은 불만스럽다는 듯이 대꾸했다.

“거기선… 글쎄. 네가 잘 손질한 애완동물을 자랑하듯이 자식들을 내놓은 사람들을 못 봐서 그래.”

“그런 부류가 없다고는 못 하겠네.”

하릴없이 백기를 들어 보였다. 나는 한미한 자작가의 영애였으므로 중앙 사교계의 연회나 살롱에 초대를 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어쩌다 참석하게 되더라도, 백작 이상의 가문과는 교류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떤 애들이 사는 이유가 계급의 사다리를 오르기 위함인 것을 알았다. 걔네가 그렇게 된 게 부모의 영향이라는 것도.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은 너무나 맹목적이어서 가끔 그들의 발밑이 꽃길인지 돌길인지조차 알지를 못했다.

제이든 스펜서는 종마 중의 종마였다. 내가 접한 사랑이 나를 낭만의 냉담자로 만들었다면, 제이든이 접하지 못한 사랑은 그를 낭만의 신봉자로 만들었다. 나는 순식간에 그의 순수성을 이해했다.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사랑은 뭐야?”

그를 더 놀리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물었다. 덕분에 내 표정은 어느 때보다도 엄숙하게 보였을 거였다.

“아버지는….”

그가 조금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어머니와 헤어졌을 때, ‘햄의 노래’를 듣고 울었대.”

“로드 스펜서께서?”

‘햄의 노래’는 동화를 원전으로 한 동요였다. 도살장에서 태어난 아기 돼지가, 햄이 될 수밖에 없는 비극적 운명을 거스르고자 노력하는 내용을 노랫말에 담아낸 것이었다.

내 기억에 스펜서 공작 부부에게는 가여운 아기 돼지에 이입할 만한 사정이 없었다. 또 나는 공작을 데뷔탕트 볼에서 딱 한 번 봤을 뿐이지만, 동요 따위가 그의 눈물샘을 자극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나도 모르겠어. 그 동요의 어떤 부분이 아버지에게 와 닿았는지.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햄의 노래’로 너를 울릴 만한 사랑을 하고 싶다는 거구나.”

“조금 다르지만… 비슷해.”

사뭇 진지한 태도였다. 나는 백파이프의 명랑한 음색에 눈시울을 붉히는 제이든 스펜서를 떠올리지 않기 위해 재빨리 말했다.

“하지만 제이든, 그건 너무 어렵잖아.”

“그런가?”

“음… 우리 엄마는, 마주 봤을 때 웃음이 나면 그게 사랑이라고 했어. 그걸로는 안 될까?”

양손의 검지를 입가에다 찌르고 한껏 끌어 올렸다. 그러자 그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아리엘, 그건 너무 쉽잖아!”

뭐라고 해야 할까. 제이든 스펜서의 웃는 얼굴은, 일종의 파괴력이 있었다. 비단 그것이 상당히 드물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제이든은 웃을 때 입을 크게 벌렸고, 콧잔등을 되게 찡그리는 편이었다. 그가 눈꼬리를 늘어뜨리자 짙은 이끼색 눈동자가 애교살과 속눈썹 사이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눈썹은 확 내려갔다. 입매는 어찌나 시원한지 따라 웃고 싶어질 정도였다.

“제이든 안톤 스펜서-힐랜드!”

찰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간 웃음은 내 눈꺼풀 안에 잔상으로 남았다. 나는 너무 감격해서 제이든의 이름을 다 불렀는데, 그랬더니 그는 약간 움츠렸다. 물론 그의 덩치는 엄청나게 컸고 몸은 엄청나게 단단했기 때문에 움츠린다고 해서 별로 주눅이 든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내가 그의 어깨를 붙잡고 선 탓에, 제이든은 나와 눈을 맞추기 위해 고개를 들어야 했다. 그러고 보니까, 문득 힐헤임 숲의 곰처럼 거대하기 그지없는 용기사를 내려다볼 기회 역시도 상당히 드물지 않나 싶었다.

나는 다소 우쭐해졌다. 방학이 되어 달튼으로 돌아가면, 반드시 내가 목격한 믿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말하리라. 적어도 얄미운 조디에게만은!

“맙소사 제이든, 너 진짜 예쁘게 웃는다!”

“뭐?”

“네가 어떤 환상을 쫓든 상관없어. 누구든 네 웃음을 본다면 널 사랑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거야!”

제이든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깜빡거리다가, ‘그런 게 어딨어.’라며 작게 웃었다. 이번에 그의 미소는 아까보다 훨씬 수줍게 느껴졌다.

***

사랑의 달 연회를 목전에 두고 나는 아주 바빴다. 수업을 듣지 않는 시간에는 과제를 해야 했고, 과제가 끝나면 보충을 들어야 했다. 보충을 듣고 나면 ‘기절 놀이’에 대한 반성문을 써야 했다. 이미 플로렌스 벨의 세계에서 반성문 전문가 켈란 일레스티아로부터 사사받은 바가 있었기 때문에, 별로 고통스러운 징계는 아니었다.

듣기로 카일은 또다시 마법 인형을 대신하여 화장실을 청소하는 신세가 되었다고 했다. 내 생각에 카일 빌라드는 마법 인형의 권익 향상을 위한 단체에라도 소속된 것이 틀림없었다.

카일이 거의 모든 시간을 남자 화장실에서 보냈기 때문에 나는 그와 얘기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내가 가진 합당한 의혹에 불을 붙였다. 빌어먹을 소꿉친구가 나를 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이다!

그래서 나는 에드가 라모스와 구불구불한 길을 걸어가는 동안 계속 뚱한 표정을 지었다. 에드가는 그가 호언장담한 십 분을 넘어서도 이어진 오르막길 때문에 내가 심통이 난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업어 주겠다며 냅다 들이민 등짝을 걷어차자, 그제야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잠깐 에드가에게 카일을 언급해도 될까 생각하다가, 그걸 고민하고 있는 내가 이상하다고 느낀 고로 그냥 말했다.

‘야, 내가 어떻게 알아?’ 에드가는 커피콩이 양각된 나무문을 당겨 열면서 짜증을 냈다. ‘그리고 꼭 지금 알아야 해, 그걸? 여기까지 놀러 나와서?’ 신경질을 어찌나 부리는지 뒤따르는 사람이 머쓱해질 정도였다. 아무래도 등짝을 너무 세게 찼나 보다.

이제 뚱한 표정이 된 것은 에드가 라모스였다. 나는 커피 하우스의 소탈하고 지적인 분위기를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함으로써 그를 달랬다. 실제로 우리가 앉은 테이블의 바로 뒤에서는 아마도 일레스티아 출신의 아카데미 학생과 후줄근한 차림의 드워프족 학자가 열띤 토론을 벌이는 중이었다.

“이를테면 의자와 테이블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의자는 앉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지만, 테이블에도 앉을 수는 있죠. 그렇다면 의자와 테이블을 다른 물건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하지만 의자에는 반드시 의자만의 성질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의자’라고 인식한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거예요. 등받이 같은 거 말이에요. 인간과 엘프, 드워프에게도 각자의 성질이 있죠. 엘프에게는 뾰족한 귀가 있어요. 드워프에게는 단단한 피부가 있고요. 인간에게는 둘 다 없어요. ‘신성력’도 마찬가지예요. 인간이 ‘신성력’을, 저는 그 단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가지게 된 건 그게 인간의 성질이기 때문이에요. 당신들의 신이 인간을 가엽게 여겨 사도를 통해 축복을 내린 게 아니라.”

‘자애로운 스티아’를 부정하는 학자의 말에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학생은 새빨개진 얼굴로 반론했다.

“하지만 신성력은 신앙심이 깊을수록 강해져요! 그건 스티아께서 항시 우리를 굽어보고 계시며, 신성력이 그의 축복이라는 증거라고요!”

“저는 그게 마나의 다른 형태라고 봐요. 밝고 노란빛이 나며, 치유력이 있는 마나요. 근본적으로 정신력이라 할 수 있으니, 강해지는 게 당연하죠.”

‘흥미롭네.’ 에드가가 문득 말했다. 그도 나처럼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드워프족도 저런 견해를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드워프족‘도’? 그녀에게 동의한다는 뜻이야?”

“대다수의 나돈인이 ‘스티아’를 일레스티아 황가가 만들어 낸 허상이라고 생각해. 나는 더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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