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너 지금 나를 변명거리로… 잠깐, 적성에 안 맞는다고?”
적성 그 자체인 줄 알았는데? 놀라서 눈을 치뜨자 에드가는 바닥을 구르던 크리스타 에드워즈의 깃펜을 집어 들며 말했다.
“그건 내 형제의 적성이야. 나는 평생 동안 걔 흉내를 내면서 살았고. 언제 바뀌어도 이상하지 않게끔 말이야.”
“그야말로 왕이 될 재목이네.”
인정하겠다. 비꼬는 말투였다. 왕에게 뛰어난 후계를 생산할 의무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최대한 다양한 상대와의 교합이 권장된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게 나에게 좋게 비추어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에드가 라모스는 그의 형제보다 훨씬 나았다.
“뛰어난 재목이지. 나와는 다르게.”
에드가 라모스의 밀색 머리통엔 아리엘 달튼과는 전혀 다른 기준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크리스타 에드워즈의 깃펜을 움켜쥐어 부쉈다.
***
환자 상태 기록용 화상기가 마침내 나의 병을 ‘꾀병’으로 진단하기까지, 병실에는 다양한 면면이 오갔다. 그중 제일 의외는 휴스턴 교수였는데, 그가 나의 부상에 박수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문안을 올 정도로 나를 아끼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무지 감동받아서, 앞으로의 마과학 수업에 조금 더 집중하리라는 결심을 했다. 휴스턴 교수의 로브 소매 속에서 과제물과 간이 시험에 대한 안내문이 튀어나오지만 않았어도 계속 그랬을 거였다.
험프리스 교수는 딱 한 번 나를 찾았다. 사건의 전말에 대해 묻기 위해서였다. 나는 밤이 새도록 머리를 싸매서 가까스로 짜낸 변명을 늘어놓았다. 우리가 한 건 싸움이 아니라 ‘기절 놀이’고, 그의 얼굴이 피범벅이었던 건, 잘 모르겠지만, 아마 서두르다가 어디 박은 게 아닐까 싶다고. 그랬더니 그녀는 안경을 고쳐 올리며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빌라드가 외출 제한을 어겼단다. 결계가 깨져 있더구나.’ 소득 없이 병실을 나서기 전에, 험프리스 교수가 대뜸 말했다. ‘혹시 너를 찾아오지 않았니?’ 나는 손아귀에 카일의 회중시계를 말아 쥐고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지만,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기나 했다.
브리아나 모슬리와 브리즈 커플-내가 리즈와 브레넌을 묶어서 부를 때 쓰는 별명이었다-은 사흘간 매일, 가끔은 하루에 여러 번 병실에 들러 아카데미의 이모저모를 전했다.
나는 켈란 일레스티아가 갑자기 뭐에 씌이기라도 한 마냥 로즈마리 블로썸에게 들이대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약간 놀랐다. 정신을 잃기 직전 카일이 ‘켈란 일레스티아를 고칠 수 있다’고 부르짖었던 것이 떠올랐던 까닭이었다.
그의 급격한 변화는 ‘고쳐졌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여태껏 그는 고장 난 상태였던가.
여자 놀음보다 창문 넘기가 적성이라는 에드가 라모스와 클레이도 종종 만났다. 에드가와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는 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함에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사실, 꽤 좋았다. 실습용 마도구 보관실 때도 느꼈지만 우리는 웃음 코드가 비슷한 편이었다.
침대가의 콘솔에 굴러다니는 사탕 봉지는 여덟 개가 되었다. 나는 퇴원하는 날에 기특한 새끼용의 콧잔등을 아주 많이 쓰다듬었다. 그리고 ‘고마워’라고 쓴 쪽지를 그의 발톱 중 가장 날카로운 발톱에 꿰었다.
음유 시인 켈리 라미레즈는 그때에나 허둥지둥 병실의 문을 두드렸다. 나의 완쾌를 축하하고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곡을 쓰느라고 바빴단다. 그녀는 병실에서부터 기숙사까지 밴조를 퉁기며 나를 뒤따랐다. 나는 굉장히 부끄러웠지만, 그녀의 성의를 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맨날 늦는 마르퀴즈 볼턴을 기숙사 앞에서 마주쳤다. 그는 병문안 선물을 잃어버렸다는 내 말에 그럴 줄 알았다며 똑같은 책을 꺼내었다. 켈리는 일레스티아 제일검이 아주 멀리 갔을 쯤에 그가 얼마나 지독한 자식인지를 즉석으로 노래했다.
그러는 동안 켈란 일레스티아와 카일 빌라드는 머리 꼭대기도 비추질 않았다. 카일의 외출 제한은 험프리스 교수가 다녀간 날 해제되었고, 켈란은 애초에 외출 제한 같은 게 없었는데도 그랬다. 나는 그들과, 특히 카일과 내가 휴스턴 교수보다는 가까운 사이라고 여겨 왔으므로, 풀이 죽었다. 풀이 죽고 화가 났다.
그래서 켈리가 공연을 마치자마자 카일의 방으로 쳐들어갔다. 그의 룸메이트인 호세 소토가 나를 맞았다. 그러고선 한다는 말이, 카일이 그리폰 크리켓 연습 때문에 방에 없다는 것이었다.
평생 안 하던 연습을, 하필 내가 찾아왔을 때 한다고? 내 생각에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래서 소토에게 바른대로 불지 않으면 크리스타 에드워즈처럼 엉덩이에서 썩은 정어리를 뿜게 만들겠다고 으름장을 놨다(에드워즈는 기어이 그녀의 망상을 기사로 써냈다. 또한 내가 자신을 ‘정어리를 토해 내는 마법’으로 협박했다는 것도 말미에 적었다.).
겁에 질린 소토는 카일이 그에게 아리엘 달튼이 내습했을 때를 대비한 행동 강령을 내렸음을 실토했다. 나는 전보다 훨씬 열이 받았지만 아무튼 돌아섰다. 카일이 어떤 이유에서든 나를 만나고 싶지 않아 한다면, 나라고 굳이 그에게 매달릴 필요가 없었다. 정말로!
***
“아리엘, 저기 네 천막이다. 인사해 주지 그래?”
밀린 수업을 들으러 이동하던 도중에, 브리아나가 귀엣말했다.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연회의 왕과 여왕 각 후보의 투표를 독려하는 천막이 세워진 것이 보였다.
중간중간 작은 싸움이 벌어져 있었다. 로즈마리 블로썸과 아나이스 오브라이언의 추종자일 것이었다. 두 무리는 사이가 나쁘기로 유명했다.
특별할 것도 없는 광경이었다. 매년 5월에는 항상 이래 왔으니까. 그러니까, 내 이름이 달린 천막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아리엘 달튼에게 투표하세요 : 피츠시몬스의 르네 레베스크’ 투박하게 쓰인 슬로건이 인상적이었다.
르네 레베스크는 신화시대의 영웅으로, 아름다운 몽마의 유혹에 굴하지 않고 도리어 그를 참수하여 성마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본인이었다. 그녀를 주제로 한 명화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몽마의 목을 치는 르네 레베스크>였는데, 그것을 모사하여 몽마의 머리통을 든 나의 모습이 천을 덧댄 나무판에 그려져 있었다.
몽마의 머리통 부분에는 구멍이 뚫렸다. 쪼그려 앉아 얼굴을 들이밀면 나에게 참수당한 몽마, 아마도 에드가 라모스를 가장할 수 있기 때문인 듯했다. 나는 지체 없이 천막으로 향했다.
“켄드라 브래들리, 너일 줄 알았다.”
“이거 하면 봉사 점수랑 활동비 나오거든요, 선배.”
천막의 안쪽에 켄드라를 위시한 여자 후배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뱉어 놓고 아차 싶었는지, 그녀가 덧붙였다.
“그리고 저희는 진심으로 선배를 좋아하고요.”
“늦었어, 켄드라. 제이든 스펜서의 천막에서는 널 안 받아 준다니?”
“어떻게 아셨지.”
켄드라가 나의 통찰력에 혀를 내둘렀다.
“그래도 그림은 잘 그렸죠? 미아는 1학년 때부터 완전 화공이었다고요.”
켄드라는 자기가 그린 것도 아니면서 되게 으쓱거렸다. 어쨌든 미아 페터슨의 실력이 대단한 건 맞았으므로 나는 그녀를 콕 집어 칭찬했다. 저게 얼마나 화제가 되었는지, 심지어는 에드가 라모스 본인도 구멍에 얼굴을 들이밀어 보고 갔단다. 내가 없는 사이에 별일이 다 있었구나.
***
플로렌스 벨의 세계가 사후 세계인 줄 알았을 때 내가 했던 후회 중 하나는 제이든 스펜서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일과를 마치고 그리폰 사육장으로 갔다. 제이든은 그를 노리는 루이사의 꼬리를 피하며 구겨지고 구멍까지 뚫린 종이를 품에서 꺼냈다.
“잘 받았어.”
“그걸 왜 아직까지 가지고 있어?”
나는 기가 차서 팔짱을 꼈다. 그건 내가 퇴원하기 전에 클레이에게 들려 보낸 감사 쪽지였는데, 따라 하기 쉬운 86가지 스텝 중 ‘샤세’에 대한 설명과 카일을 아주 못생기게 그린 그림이 이면에 있는, 그러니까 폐지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는 외출 제한이 풀린 뒤에도 문병을 오지 않는 카일에게 상당히 짜증이 났었다.
“네가… 준 거라서?”
제이든은 잠깐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는 듯한 말투였다.
“버려도 돼.”
나는 친절하게 말했다. 시작의 달 연회에서 지켜본 바 제이든 스펜서는 너무 착하고 성실해서 딱 사기당하기 십상이었다. 올해 농담의 달 연회의 ‘골 때리는 선물 교환식’ 때는 꼭 얘랑 편먹어야지.
‘골 때리는’이란 수식어에 걸맞게, 거기서는 선물다운 선물과 먹고 죽을래도 쓸모가 없는 선물이 전부 허용되었다. 그래서 선물을 교환할 상대를 올바르게 선택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참고로 나는 작년에 카일로부터 예쁜 유리병에 든 모래 한 줌을 받았는데, 알고 보니 그건 픽시의 분변이었다.
분명히 버려도 된다고 했는데도, 제이든은 그걸 다시 꼬깃꼬깃 접어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다정도 저 정도면 병이었다.
혀를 차며 루이사의 부리를 쓰다듬었다. 카일 때문에 라일라를 자주 만져 본 터라, 나는 그리폰을 다루는 데 조금 능숙해졌다. 루이사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사람이 싫은 건 아닌 것 같은데, 대체 왜 너한테만 그럴까?”
“그래도 오늘은 얌전한 편이야.”
제이든은 금세 의기소침해 했다. 내가 루이사의 혼을 쏙 빼놓은 틈을 타 날개깃을 만지려다가 얻어맞았던 까닭이었다.
“후퍼 교수님이나 모나한 교수님은 뭐라셔?”
“후퍼 교수님도 루이사 같은 경우는 처음 본대. 그리고 모나한 교수님은… 그분은 그리폰에는 별로 관심이 없더라.”
“왜지? 그리폰은 거시기가 없나?”
중얼거리자, 그는 그야말로 기겁을 했다.
“그… 런 말은, 쓰지 마!”
“뭐? 거시기?”
그가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드물게도 당황한 모습이었다.
“맙소사, 제이든 스펜서! 너 지금 부끄러워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