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브리아나 모슬리, 그거 혹시 국화야?”
“두 경우를 전부 대비하기로 했거든.”
브리가 잽싸게 국화를 내동댕이쳤다. 그러고는 울먹거렸다.
“미안해, 아리엘. 나는, 내가 룸메이트 바꿔 달라고 빌어서….”
“그거랑은 상관없긴 한데, 진짜?”
내가 충격받은 표정을 짓자 브리아나는 잽싸게 덧붙였다. ‘3월에 말이야, 그때는 별로 안 친했잖아.’ 나는 반 돌아누워 중얼거렸다. ‘안 친한 정도가 아니었지. 이해해.’ 스스로 불러온 재앙인 것을, 어찌하리오.
“미스 모슬리! 병실 바닥에 쓰레기를 버리지 마세요!”
잠시 후 채프먼 교수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소리를 쳤다. 이윽고 분주하게 화상기와 나를 번갈아 살피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채프먼 교수는 거인족 혼혈이었기 때문에 모든 게 우리보다 1.5배가량 컸는데, 덕분에 그의 귀여운 동작에는 기묘한 위압감이 뒤따랐다.
“회복 속도가 눈에 띄게 빠르네요. 미스 모슬리, 혹시 숨겨 둔 신성력이라도 있나요?”
이번에는 브리가 갸웃거릴 차례였다.
“미스 달튼의 몸에 신성력이 돌고 있어요. 부끄럽지만, 제 것보다 강하고요.”
그건 채프먼 교수가 모르는 사이 누군가 나에게 치유 주문을 걸었다는 소리 같았다. 엄청 강한 신성력을 지닌 누군가가. 그가 쑥스러운 듯 몸을 배배 꼬자 거기서 큰 바람이 일어 브리아나의 꽃들을 마구 흔들었다. 브리는 손으로 가림막을 만들어 나긋한 거인으로부터 나긋한 꽃들을 보호했다.
“이런 추세라면 모레쯤엔 퇴원할 수 있겠네요. 축하드려요, 미스 달튼!”
채프먼 교수의 손뼉 치는 소리가 천둥보다 컸다. 나와 브리는 잔뜩 들뜬 그가 쿵쿵거리며 병실을 나갈 때까지 귀를 꼭 막고 미소 지었다.
“난 그가 거대해서 좋아. 깜찍함이 배가되거든.”
“전적으로 동감이야.”
브리의 꽃병이 침대가의 콘솔에 놓였다. 거기는 이미 수많은 잡동사니로 가득해서, 그녀는 꽃병으로 그것들을 조금 밀어야 했다.
개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색색의 알사탕이었는데, 총 다섯 알이었다. ‘이게 뭐야?’ 내가 묻자 브리가 대수롭잖게 대답했다.
“그 새끼 용 있잖아, 너에게 ‘독서 모임’ 일정을 전달해 준. 걔가 가지고 왔어. 매일 하나씩.”
‘독서 모임’에 심상찮은 강세가 들어간 것으로 미루어 보아 브리아나 모슬리는 아직도 그 쪽지가 비밀 연애의 증거임을 확신하는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사탕을 까서 입에 넣다가 하마터면 사레가 들릴 뻔했다.
‘매일 하나씩’이면, 쓰러진 이후로 닷새나 지났단 말이야? 그러고 보면 내가 플로렌스 벨과 함께 보낸 날짜도 정확히 5일이었다. 그건 정말로 사후 세계 같은 것이 아니었나 보다.
어쨌거나 제이든의 병문안 선물은 꽤 만족스러웠다. 여학생 병실에 함부로 방문할 수 없으니 클레이가 전서구, 이 경우엔 전-사탕-용 역할을 한 모양이었다. 똑똑하기도 하지. 만일 조디가 정말 스펜서 공작부인이 된다면 나도 용 한 마리 정도는 기를 수 있을까?
“이건 볼턴이 나더러 갖다 주라고 한 거야. 심심할 때 읽어 보래.”
“우와, 진짜 안 고마워.”
<사교춤의 모든 것-따라 하기 쉬운 86가지 스텝>이라는 제목의 책이 품으로 떠밀렸다. 나는 그것을 곧바로 침대와 벽 사이에 끼워 넣었다. 잃어버렸다고 해야지.
다급한 노크가 우리를 방해할 때까지 수다를 떨었다. 대부분 화두에 오른 것은 내가 드러누워 있던 닷새간 아카데미에 생긴 변화였다.
우선 나와 카일, 그리고 블로썸 간에 있었던 일은 아직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았다. 카일이 험프리스 교수 앞에서도 침묵으로 일관한 까닭이었다(실은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도 마땅치가 않았다. 로즈마리 블로썸이 신묘한 주문으로 카일을 조종해 나를 죽이려고 했다? 내 말이라면 콩으로 호두 파이를 굽는대도 믿을 무어 교수라도 의심할 것이었다.).
단, 그가 나에게 부상을 입혔음은 부정하지 않았으며, 그의 부상보다 나의 부상이 훨씬 컸기 때문에 카일은 피해자인 내가 깨어날 때까지 기숙사 방에 감금되어 처분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단다. ‘그게 뭐야!’ 나는 분통을 터트렸다.
“카일이 그런 게 아니란 말이야! 그러니까, 아예 아닌 건 아니지만, 아무튼 아냐!”
“아니면 아닌 거지, 아무튼 아닌 건 뭐야? 누가 빌라드한테 칼이라도 들이대고 강요했대? 너를 공격하라고?”
한심하다는 듯 팔짱을 낀 브리아나의 대꾸는, 브리아나-똑똑이-모슬리 아니랄까 봐, 진실에 가까웠다. 나는 심통이 나서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가, 문득 드는 생각에 확인차 물었다.
“카일이 감금됐다고?”
“수업 듣거나 밥 먹는 거 아니면 방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가. 결계도 쳐 놨대.”
그러면, 아까 걔는 뭐야? 나는 아연실색해서 브리를 빤히 봤다. 꿈을 꾼 건가? 걔가 너무 보고 싶어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 것은 그 순간이었다.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마법 잉크를 잔뜩 먹인 깃펜과 함께 크리스타 에드워즈가 나타났다.
“피츠시몬스 타임즈의 크리스타 에드워즈입니다. 미스 달튼 맞으시죠?”
“에드워즈, 우리 처음 보는 사이 아니잖아.”
환자 상태 기록용 화상기가 내게서 새로운 병을 발견했다. ‘불안 장애 15%’. 에드워즈도 그것을 보았을 테지만, 그녀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카일 빌라드와는 무슨 관계죠? 그가 당신에게 끔찍한 공격을 가한 것이 사실인가요? 로즈마리 블로썸이 관련된 건요?”
“야, 크리스타 에드워즈! 아리엘은 환자야! 안정을 취해야 된다고!”
“곤란해 보이네요. 대답하지 않아도 좋아요. 항간에는 그녀를 향한 불타는 질투심으로 ‘연회의 여왕’에 출사표를 던졌다는 말도 있더라고요. 물론 소문이겠지만요.”
“그건 완전 헛소문이야!”
악을 쓰는 쪽은 내가 아니라 브리아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는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에드워즈의 형형한 안광은 내게만 쏘아졌다. 마치 내 이마에 진실이라도 쓰여 있는 마냥.
“어떤가요? 정말로 단순히 소꿉친구일 뿐인가요? 어쩌면, 이런 건 아닐까요? 미래를 약속한 어린 연인이 있었는데, 아름다운 방해자의 존재가 두 사람을 갈라놓았고,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소녀는 소년에게 해명을 요구했으나 돌아온 것은 무자비한 폭력이었다…. 카일 빌라드는 아카데미 내에서 평판이 좋은 축에 속하지만, 누구에게나 이면은 있는 법이니까요.”
“있잖아, 에드워즈.”
20퍼센트에 육박하는 불안 장애에 시달릴 쯤에 운을 뗐다.
“슬라임을 토해 내는 주문은 사실 내가 고안해 낸 거야.”
헙. 크리스타 에드워즈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당시의 기억이 아직 생생한 모양이니 다행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카일과는 달리 마법에 약해. 그래서 봉인해 뒀지. 자꾸 슬라임이 아니라 다른 걸 토하더라고. 한 번은 녹은 정어리 같은 걸 토했는데, 진짜 역겨웠어.”
말하는 동안 손으로 마법진을 그렸다. 에드워즈의 안색이 급격히 창백해졌다.
“게다가 나는 지금 상태가 엉망이야…. 어쩌면 입이 아닌 데서 나오게 될지도 모르겠어. 녹은 정어리가.”
에드워즈는 깃펜까지 내던지고 줄행랑을 쳤다. 나는 그녀가 적다 만 기사를 읽고 깃펜을 동강내려 했지만, 힘이 부족했다.
하는 수 없이 벌러덩 드러눕기나 했다. 브리아나는 크리스타 에드워즈가 꽁무니를 뺀 후에도 한참 동안 그녀의 뒷담화를 종알거리더니 수업에 늦었다며 호들갑스레 자리를 떴다.
***
채프먼 교수의 판단이 맞다면, 내 몸에 신성력이 돌고 있는 탓인지, 도통 잠이 오질 않았다. 나는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새소리를 멍하니 듣다가 문득 사탕이 먹고 싶어져서 콘솔을 더듬었다. 그러자 사탕 봉지의 사각사각한 감촉 대신에 쇳덩이 같은, 딱딱하고 둥근 것이 손끝에 걸렸다.
집어 들고 보니 낡은 회중시계였다. 겉면에 구불구불한 선들과 단순하지만 멋드러진 늑대 문양이 음각되어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나는 그게 뭔지 잘 알았다. 카일 빌라드가 끔찍하게 아끼는 다미앙 할아버지의 유품이었던 것이다.
이게 왜 여기 있어? 인상을 찌푸리는데, 별안간 웬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오, 되게 멋있다.”
“깜짝이야!”
심한 욕을 만면에 담아 쳐다보았더니 에드가 라모스는 웃겨서 죽으려고 했다. 창틀에 팔을 걸치고 매달린 채였다.
“야, 웃기지 마. 나 떨어질 거 같아.”
“떨어져, 그냥.”
내가 창을 닫으려고 하자 그가 재빨리 내 손목을 붙잡았다.
“미스 달튼은 잔인하기도 하지. 여기 3층인데 말이야.”
“4층은 아니잖아.”
어쨌든 나는 에드가를 건져 올렸다. 애초에 그의 굵은 팔뚝에는 내 도움 없이도 충분히 올라올 만한 근력이 있었을 테지만, 하도 징징거려서 그렇게 했다.
‘깨어났다는 게 진짜였네.’ 에드가는 바지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며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소식을 접했냐고 물었더니, 그는 입으로는 ‘글쎄.’라고 하면서 밀색 머리카락 한 줌을 손가락에 감아 돌리는 시늉을 했다. 오, 브리아나. 문이 닫히기 전에 네 혀를 입천장에 붙이는 주문을 외웠어야 했는데.
“멀쩡한 문 놔두고 왜 창문으로 왔어? 혹시 나돈에서는 그게 예의야?”
“정말 모르는 것 같으니 봐줄게. 지금 여기 감시가 얼마나 삼엄한데.”
“감시?”
“너, 정말로 죽을 뻔했어. 빌라드가 그 난리를 치면서 켈란에게 데려가지 않았다면 지금쯤 이거였을 거라고.”
그가 날이 보이게 손을 세워 목 아래에서 그었다.
“알고 보니까 빌라드가 그런 거라며? 네 부상 말이야. 근데 그 자식은 왜 그렇게 절박했던 거야? 뭐, 덕분에 십년감수했지만.”
“왜 네가 십년을 감수해?”
“아, 잔인한 데다가 냉정하기까지 한 미스 달튼. 전혀 친분이 없는 사람이라도 죽을 만큼 다쳤다는 얘길 들으면 놀라겠다.”
“그거 내 거야!”
어느새 콘솔에 걸터앉은 에드가가 사탕 하나를 까 먹고는 ‘으’ 소리를 냈다.
“엄청 달다. 너 완전 애기 입맛이구나?”
“누가 맘대로 먹으래?”
“도로 줄까? 이거.”
“드러워!”
그가 앞니 사이에 알사탕을 끼우고 다가왔다. 나는 질색하며 사탕 봉지를 집어 던졌다.
“그것도 그렇고, 나는 너에게 구애하는 입장이잖아.”
“피츠시몬스 타임즈에 따르면 말이지.”
“그게 얼마나 편한데. 적성에도 안 맞는 여자 놀음은 안 해도 되고. 걔들한테 완벽한 변명거리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