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마도구 제작 실습실까지 가는 동안, 켈란은 사과 아닌 사과를 건네어 왔다. 그도 나에게 마시멜로 토끼 건으로 심하게 군 것을 인지하고 있고, 반성한다는 것이었다. 다만 그것이 앞서 언급한 ‘플로렌스 벨이 얽히면 얼간이가 되는 현상’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므로, 앞으로도 억울한 일은 많을 거라나.
“있잖아, 사과하는 법을 네 부관에게 배워 두는 게 좋을 것 같아.”
“마르퀴즈가 너한테 무슨 잘못이라도 했어? 내 기억에 너희는 딱히 말을 섞은 적이 없는데.”
“내 세계에서 말이야. 그러고 보니 그것도 네가 원인이었네. 하필이면 그 자식을 파트너로 꽂아 줘서.”
“파트너? 연회 파트너? 꾸며 낸 이야기래도 흥미로운걸.”
들뜬 목소리를 들으니 떠들고 싶은 마음이 깡그리 사라져서 입을 다물었다. 사람을 화나게 하는 방법 두 가지 중 하나는 말을 하다 마는 것이었다.
덕분에 나는 켈란 일레스티아를 열받게 만든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그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지만, 눈썹과 입꼬리가 시무룩하게 틀어져 있었다. 그것들은 밝은 금발과 어우러져 그를 털이 아주 잘 관리된 개처럼 보이게끔 했다. 엄청 큰 개 말이다. 다 자라 놓고도 제가 아직 강아지인 줄 아는.
“그….”
문제의 이끼가 낀 벽 앞에서 나는 약간 망설였다. 다른 세계의 켈란이 어떻게 했었는지가 기억났기 때문이다.
“일단 손을 잡아야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 세계의 켈란은 정색을 했다.
“샐러맨더의 무지개 비늘에 맹세코, 수작 부리는 거 아냐. 그렇게 해야지만 지나갈 수 있다고 했거든.”
“벽을?”
“벽이 아니고… 됐다, 줘 봐.”
그의 손을 당겨 쥐었다. 깍지를 끼려니 명백하게 당황한 눈치여서 웃겼다. 입 맞출 뻔도 했는데, 새삼스럽게.
“신성력을 써 봐.”
곧 따뜻한 기운이 손을 타고 흘러 들어오더니 전신을 배회했다. 언제 겪어도 기분 좋아지는 경험이었다. 신성력은 치유의 힘이었으니까, 마음에도 효력이 미치는 걸까? 나는 켈란과 손을 잡을 때마다 심하게 긴장하곤 했으므로 딱히 물어본 적은 없지만.
손끝까지 빛이 모이자, 벽돌을 두드려 아치를 만들었다. 찰나의 마법적인 효과가 눈을 즐겁게 한 후에는 끄트머리가 어둠에 묻힌 복도가 나타났다.
“이 복도는 신의 축복을 받지 않은 사람을 헤매게 만든다고 해. 내게는 신성력이 없으니까, 이런 식으로라도 눈속임을 해야 한대.”
“누가 그랬어?”
켈란이 미간을 구기고 물었다. 영 미심쩍다는 말투였다. 극히 억울해져서 바로 네가, 켈란 일레스티아가 그랬다고 하려다가 괜히 불필요한 오해라도 사면 곤란할 것 같아 그만두었다.
대신 그게 왜 궁금하냐고 쏘아붙였더니, 그는 잠시 벽과 바닥을 더듬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일레스티아’니까… 신성력을 감지하는 기운이 있다면 알 수 있어. 아까 마도구 제작 실습실에서는, 확실히, 그랬지. 하지만 여기는 아닌데.”
‘일레스티아’는 고대어로 ‘스티아를 따르는 자’라는 뜻이었다. 역사학 시간에 배운 바에 따르면, 신성 일레스티아는 태초에 스티아 신이 택하여 하계에 내린 사도가 날개 여섯 쌍이 달린 유니콘을 이끌고 세운 국가였다. 황족은 사도의 후손이었고.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에게 실제로 강한 신성력이 있으며 그걸 다루는 데 특출나다는 것은 대륙의 어떤 신학자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런 켈란 일레스티아가 하는 말이라면, 틀리진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나에게 반대로 알려 줬던 것 또한 켈란 일레스티아인데. 많이 혼란스러웠다.
“샐러맨더의 무지개 비늘에 맹세코, 누군지 몰라도, 수작은 걔가 부렸나 본데.”
켈란이 짧게 웃고는 지나쳐 갔다. 손을 놓은 채였다. 시험 삼아 조금 걸어 보았는데, 방향 감각에 저해되는 느낌은 전혀 받지 못했다. 길이 멀어지거나 사라지는 것 같지도 않았고. 아마 이 세계의 켈란이 했던 말이 진실인 모양이었다. 그럼 걔는? 내가 두고 온 켈란 일레스티아는?
아무튼 그것에 골몰할 여유는 별로 없었다. 곧 그보다 훨씬 놀라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여기야?”
“여기가… 맞는데.”
마침내 도달한 비밀의 방은 내가 기억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복고풍의 벽난로나 소박한 통기창, 높은 곡면 천장은 여전했지만, 그 외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통나무 테이블이나 샹들리에, 벤치 의자는 다 어디로 간 거야?
그것을 인지한 순간이었다. 굉장한 열기가 발등을 타고 올라왔다. 팔다리의 관절마다 벼락이 치는 듯한 통증이 내리꽂혔고, 목 안쪽은 갈퀴 같은 것으로 긁어내리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말도 안 돼. 의식이 비명과 복잡한 글자들에 잡아먹히기 전에 겨우 떠올린 것이었다.
말도 안 돼 설 마…
XXXX.XX.XX 23:11:54 [ERROR] com/attis/core/loader/ConfigurationLoader : OutOfMemoryException - Exception of type ‘System.OutOfMemoryException’ was thrown.
XXXX.XX.XX 23:11:54 [INFO] com/attis/core/loader/SaveFileLoader : validate savefile - /app/savefiles/autosave.sav
XXXX.XX.XX 23:11:55 [INFO] validation has been completed. initialize savefile…
***
비밀의 방은 케이틀린 대제가 발견했을 때 이미 내부가 꾸며진 상태였다고 했다. 굵직굵직한 가구들을 제외하고도 벽난로에 두른 가랜드나 장식용 식물, 하다못해 입구 쪽 바닥에 깔린 작은 매트마저도 내가 아니라면 골라낼 수 없는 것들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방에 들인 사람이 도려내진 기억 속 아리엘 달튼임을 알고 있었다. 추측이 아니었다. 그냥 알았다.
플로렌스 벨의 세계에서, 비밀의 방은 텅 빈 채였다.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 세계가 나의 도려내진 기억인 걸까?
속이 뜨거웠다. 뼈가 지끈거렸다. 마녀의 선반 위 약초가 되어 어느 날 곱게 빻인다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눈꺼풀은 추라도 달아 놓은 듯 무거웠고, 귀는 엄청나게 큰 소리를 들은 직후처럼 먹먹했다. 무엇보다 목의 상태가 엉망이었다.
간신히 ‘물’이라고 말했나 보았다. 입가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형편없이 바들거리는 손놀림이 야무지질 못했다. 내가 입술로 갈무리하지 못한 물줄기가 턱을 타고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가슴팍이 축축해서 짜증이 났다. 나는 시중인들을 잡도리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한마디는 해 줘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이거, 닦아 줘….”
그러자 마른 천 조각이 턱을 꾹 눌렀다. 목과 가슴을 닦을 때는 아주 조심스러웠다. 만족감에 입꼬리를 끌어 올리는데, 갑자기 기껏 보송보송해진 쇄골쯤에 뭐가 또 떨어졌다. 미지근한 물방울이었다.
이, 씨.
“일… 제대로.”
못 하냐고 신경질을 부리려고 했다. 달튼의 작은 악마라는 별명이 붙던, ‘귀족 가문의 사랑받는 외동딸’이라는 위치에 취해 투실투실하고 성격이 못되던 시절 자주 하던 짓거리였다.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서 그랬다. 사실 그만큼 힘들었다.
“미안해….”
웅웅거리는 귀에 작은 목소리가 걸렸다. 남자의 것이었다. 잔뜩 쉬어 터지고, 억눌리고, 울음으로 얼룩져서는 무자비한 고통을 담고 있었다. 집중해서 들으니 카일의 목소리였다. 나의 소중한 소꿉친구.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는.
“야, 그만 울어….”
열에 달뜬 상태에서 팔을 뻗으니 팔꿈치 있는 데가 뻐근했다. 허우적거리자 카일의 젖은 볼이 만져졌다. 나는 그것을 문지르면서 고장 난 음성 기록 및 재생용 마도구처럼 울지 말라는 말만 반복했다. 얘는 옛날부터 눈물이 너무 많아서, 맨날 달래 줘야 했다.
언제는 자기가 장난을 쳐 놓고 걸려든 내가 화를 냈더니 운 적도 있었다. 그건 비열한 짓이라고 따지니까 입술을 씰룩거리며 참는 게 웃겼는데. 어린 아리엘 달튼은 작은 악마였지만, 어린 카일 빌라드는 귀여운 데가 많았다.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눈물의 강이 범람했다. 기껏 짜낸 위로가 역효과를 불러온 모양이었다. 으이구, 카일. 혀를 차려 했는데, 잇새로 바람이 들어가자 목구멍 안쪽으로 뭐가 확 걸렸다. 나는 심하게 기침했다. 카일은 화들짝 놀라 안절부절못했다.
다른 세계로 밀려 나갔을 때처럼, 아무런 전조 없이 돌아왔다. 머리맡에는 카일이 있었다.
나는 지금이 그에게서 원하는 것을 얻을 때임을 직감했다. 이번엔 정말로 모든 수수께끼를 푸는 해답을 들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궁금한 게 되게 많았다. 나와 그와 학생회와 로즈마리 블로썸에 대해서. 이제는 플로렌스 벨과 그녀의 세계가 던진 의문도 거기에 더해졌다.
하지만 몸이 너무 아팠다. 오한에 떠는 나를 그가 이불로 싸맸는데, 부드러운 침구가 붙는 감각마저 괴로웠다. 당장은 자야만 했다. 잠이 통증을 잊게 해 주리라. 대신 일어나면, 조금 나아지기만 하면, 너네는 다 죽었다.
***
이상하게 기분이 산뜻했다. 몸은 아팠고, 목은 더 아팠는데. 열은 좀 내린 것 같았다. 눈이 번쩍 뜨였다. 천장이 목재로 짜여 있었는데, 아주 낯선 곳은 아니었다. 양호실에 딸린 개인 병실로, 꾀병쟁이와 진짜 안정이 필요한 환자들을 분리하기 위해 마련된 곳이었다.
갓 마법사가 된 장난꾸러기들은 부유 마법이 비행 마법과는 다르다는 것과 발바닥에 강화 주문을 건다고 해서 불 위를 걸을 수 없음을 몰랐다. 당연히 나도 그랬으므로, 자주 병실 신세를 졌다. 덕분에 치유술 담당이자 병동의 총괄인 채프먼 교수와는 제법 안면을 익혔다.
그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교수였다. 채프먼 교수의 치유술 실력은 애매하게 형편이 없어서, 완쾌된 학생들이 재미있는 후유증을 달고 퇴원하기 마련이었다(일례로 2학년 때 카일은 변신 주문을 잘못 사용하는 바람에 켄타우로스 꼴이 되었는데, 채프먼 교수의 ‘적절한’ 조치 덕에 퇴원하고 나서도 한동안 걸을 때마다 ‘다그닥’ 소리가 났다.).
침대맡에 매달린 화상기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나의 상태는 평소의 4할에 못 미쳤다. 근데 왜 이렇게 상쾌하지. 의문스레 주변을 둘러보는데, 브리가 작은 꽃병에 꽃을 몇 송이 꽂아서 조심조심 들고 오다가 아주 난리가 났다.
“아, 자비롭고 자애로우신 스티아시여, 제 기도를 들어주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