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패치 노트>가 얼마나 높은 선반에 꽂혀 있든 간에 일레스티아에게는 그다지 문제가 아닌 듯했다. 그는 그것을 꺼내기 위해 까치발을 들기는커녕 팔꿈치를 완전히 펴지도 않았는데, 새삼 세상이 참 불공평했다.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나는 일레스티아에게서 <패치 노트>를 받아들기 위해 팔을 뻗었다. 헛수고였다.
“암살자는 죽었어. 나는 그 습격에 대해 어머니에게도 알린 적이 없지. 내 부관은 아주 충성스럽고. 그렇다면 누가 너에게 흘린 걸까?”
일레스티아는 애초에 나를 돕기 위해 찾아온 게 아닌 것 같았다. 그는 내가 릴루와 사냥 놀이를 할 때처럼 손목을 가볍게 움직여 <패치 노트>를 멀리로 치웠다.
의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를. 그의 말대로라면 그러지 않기 어려운 상황이기는 했다.
우리는 좁은 통로에 끼듯이 하여 마주 서 있었으므로, 내 시야에서는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지금 상황을 얼마나 무겁게 여기고 있는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부디 농담으로 넘길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부모님은 항상 내게 언젠가 입으로 망할 날이 올 거라고 했고, 오늘이 바로 그날인 모양이었으므로, 괜한 소리를 떠들기가 조심스러웠다.
“네가 짐작하는 건 절대 아냐. 말했잖아, 나는 다른 세계에서….”
“연인이라고 했지, ‘아리’.”
문득, 그가 내 손목을 낚아채었다. 퍽 거친 동작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얼어붙었고, 그는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달튼의 말괄량이는 일레스티아의 황태자에게 너무나도 쉽게 제압되었다. 그는 겹쳐 쥔 손목을 책장 쪽으로 지그시 눌러 나를 책장과 그의 사이에 갇히도록 만들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깊게 숙여 쳐다봤는데, 분위기가 영 이상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에게는 연애 경험이 있었다. 결함 없이 완전한 아몬드 형태의 호박색 눈에서 일렁이는 열기가 무슨 의미인지 모를 만큼 순진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열렬한 사이였다지?”
일레스티아가 ‘열렬한’을 발음할 때 나는 조금 더워졌다.
“정신적으로 말이야. 정신적으로 엄청 열렬했지.”
잽싸게 붙이는 변명에 그는 그린 듯이 미소 지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인내심이 별로 없거든.”
켈란 일레스티아가 가진 많은 재주들 중 하나는 착한 표정으로 위험한 말을 지껄이는 것인가 보다. 나는 황급히 시선을 굴려 주변을 살폈다. 여기서 소리치면 누가 들을까? 공부하던 애들이 아직 남아 있으려나? 책장의 미로를 통과하는 동안 시간이 제법 지났으므로 확신할 수는 없었다.
“집중해.”
그의 속삭이는 소리가 코끝에 닿았다. 나는 이것이 일레스티아가 나를 떠보기 위해 깔아 놓은 함정이라고 확신했지만, 한편으로는 진짜로 그와 입 맞추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레스티아의 입술은 이제 내 입술과 겨우 손가락 한마디만이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그가 여유롭게 내쉬는 숨과 내가 가쁘게 뱉어 내는 숨이 섞였다. 발가락이 오므라들고, 눈이 질끈 감겼다….
“기대했어?”
귓가에 비웃음이 내려앉았다. 그가 몸을 물리자 순식간에 모든 게, 그러니까 데워진 공기나 넘실거리던 고양감 같은 것이, 원래대로 돌아갔다. 거세게 뛰는 심장만이 우리에게 어떤…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했다. 나는 언쟁에서 밀리는 것을 지독하게 싫어했으므로 ‘아쉽네’라고 받아치려 했지만, 긴장이 막 풀린 탓인지 말이 나오질 않았다.
“나는 인내심은 없지만 욕심은 많아서, 뭐든지 주는 만큼은 받아야 해. 내가 정말로 너와 연인이었고, 너를 애칭으로 불렀다면, 너는 왜 나를 ‘일레스티아’라고 부르지?”
일레스티아의 논리에는 빠져나갈 구석이 없었다. 나는 내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패배했음을 인정했다.
“미안하지만 못 믿겠어, 아리. 책은 먼저 읽고 돌려줄게.”
허접한 거짓말이 들통난 이후에도 그는 나를 ‘아리’라고 불렀다. 그것은, 내가 느끼기로, 일종의 경고였다. 더는 허튼 장난일랑 시도하지 말라는.
***
나는 켈란 일레스티아에 대해 지금껏 잘 몰랐지만 이제 그가 주말에 나를 찾아 기숙사까지 뒤질 정도로 집요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학생회 업무 때문에 엄청 바쁜 줄 알았는데,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
“너 내 스토커야?”
기시감이 들었다. 전에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감시자’라고 해야지, 아리.”
그가 친절하게도 나의 잘못된 언어 사용을 정정해 주었다. 네가 진절머리를 치든 말든 할 일이나 하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또 그는 도서관에서의 만남 이후 며칠이 지났음에도 나를 애칭으로 불렀는데, 이쯤 되면 놀리려는 심산이 틀림없었다.
“네가 뭐라고 생각하건 상대의 동의 없이 일거수일투족을 쫓는 걸 세간에서는 ‘스토킹’이라고 해, 켈란.”
그래서 나도 맞불 작전으로 나가기로 했다. 상대가 아무리 엄청나게 잘생긴 신성 일레스티아 제국의 황태자여도 얌전히 당해 주는 건 적성이 아니었다.
그는 내가 자신의 이름을 입에 담을 때마다 불쾌해 죽겠지만 스스로 얼굴에 침 뱉기는 싫어서 억지로 참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나에게 조그마한 행복감을 선사했는데, 카일이 건수만 생겼다 하면 32절까지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무슨 마법을 쓴 거야?”
“뭐가?”
“이 책 말이야. 암호문처럼 보이는 건 둘째 치고, 도무지 읽히지가 않아.”
아. 원래 세계의 켈란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일반적으로 책을 읽을 만한 곳’에서는 글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나. 그래서 선택한 장소가 검술 훈련장이었다고 그랬다.
생각해 보면 참 수상한 이야기였다. 마치 우리가 <패치 노트>를 읽을 수 없도록, 누군가 방해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내가 카일과 블로썸의 이해할 수 없는 대화에 집중하려고 하면 잠에 빠졌던 것처럼.
어쨌든 중요한 건 내가 그걸 읽어야 하고, 읽을 수 있는 방법을 안다는 거였다. 안 그래도 혼자서 해독할 생각에 막막했는데, 그야말로 굴러 들어온 호박이 아닐 수 없었다.
“무슨 마법이 걸렸는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일부러 뜸을 들였다. 일레스티아의, 그러니까 켈란의 애간장을 태우기 위해서였다.
“너는 나 못 믿는다며?”
“뭘? 우리가 ‘열렬한’ 사이였다는 거? 못 믿지. 다른 세계 운운한 건, 어느 정도.”
“그걸 믿는다고?”
“처음엔 베일리 주교의 끄나풀이라고 생각했어. 근데 그렇다고 치기엔 신분이 너무 깨끗하더라고. 덕분에 너에 대한 사소한 정보나 알게 됐지. 카일의 형에게 보낸 연서는 명문이더라.”
“지금 내가 네 머리를 엄청 세게 때리면 기억을 잃을까?”
“음… 추천하는 방법은 아냐. 내 기억보다 네 목숨을 먼저 잃게 될 테니까.”
그가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나는 가까스로 그를 따라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무튼, 히스론드 대교구와는 별 관련이 없다고 판단했어. 만약 거기까지 꾸며 냈다면, 그런 상대에게 당하는 건 어쩔 수 없고.”
“의외로 산뜻하네.”
“힘 있는 자가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는 건 당연한 거야. 어머니가 그랬듯이. 잠깐 걸을래?”
청유형 종결 어미가 사용되긴 했으나, 켈란은 딱히 나의 의견을 수렴할 마음은 없어 보였다. 나는 앞서 가는 그의 등을 반 걸음 정도 뒤에서 쫓았다.
“다른 세계가 있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지만… 이 세계가 누군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있어.”
“누군가를 위해서라니?”
“플로라 말이야. 이 세계는 그녀에게… 너무….”
켈란은 마땅한 단어를 고르기 위해 잠깐 망설였다.
“너무… 후하잖아.”
“놀라운걸. 네가 그런 말을 하다니.”
“왜? 모를 줄 알았어? 그녀에게 눈이 멀었으니까?”
정확했다. 내 표정이 충분한 답이 되었는지, 그가 소리 내어 웃었다. 이렇게 보면 내가 아는 켈란 일레스티아 같은데 말이야.
“나도 알아, 내가 가끔 훨씬 중요한 것들보다 그녀를 우선시한다는 거. 최초로 위화감을 느낀 부분이 거기였으니까.”
“확실히, 너다운 면은 아니지.”
“일레스티아의 제왕학에서 가장 강조되는 게 불필요한 감정의 배제야. 나는… 솔직히 말할게. 나는 내가 그렇게 멍청해질 줄은 몰랐어. 혼란스러웠지. 사랑은 원래 그런 걸까?”
켈란의 입에서 나오는 ‘사랑’이라는 단어에는 굉장히 간질거리는 구석이 있었다. 나는 반팔 블라우스의 아래로 드러난 팔뚝을 긁었다.
“그걸 깨닫고 보니까 멍청해진 게 나뿐만은 아니더라고. 브라이스도, 에드가도, 제이든도… 심지어는 마르퀴즈도, 그녀만 관련되면 얼간이처럼 굴잖아. 그래서 확인해 봤지. 너에게 했던 것처럼. 플로렌스 벨이 대체 누구길래.”
“누구였어?”
“아무도 아니었어.”
그건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는 뜻은 아닌 것 같았다. 켈란 일레스티아의 옆모습은 완벽한 비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정말 대리석을 깎아 낸 것처럼 보일 때가 있었는데, 석상마냥 딱딱한 표정을 지으니 더욱 그랬다.
“아무것도 없었어. 네 신분이 깨끗한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야. 플로렌스 벨은, 피츠시몬스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까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어.”
“다른 신분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은?”
에드가에 의하면 점술 시간 강사인 미스 프록터는 진짜 ‘메이브 프록터’가 아니라고 했다.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일레스티아의 정보력은 대륙 최고야. 아카데미 내 첩자들 정도는 이미 꿰고 있다고.”
켈란은 단박에 고개를 저어 내 의견을 부정했다. 짜증 난 투였다.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사람이 있고, 그녀가 바라는 대로 세계가 움직인다? 나는 플로라를, 아마도, 사랑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확인해야 했어. 그리고 네가 나타났지. 다른 세계에서 왔다면서.”
“…….”
“너는 플로라와는 달리 ‘갑자기 생겨난 사람’이 아니야. 그래서 완전히 믿긴 어렵지만…. 이거, 결코 일반적인 책이 아니더라. 어쩌면 네가 말한 다른 세계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
‘대답이 됐을까?’ 덧붙이며, 그가 나에게 <패치 노트>를 건넸다. 우리는 어느샌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나는 그가 나를 일부나마 믿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나의 목적을 위해 그를 이용할 수 있겠다는 것은 확신했다. 그래서 말했다.
“좋아, 따라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