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나와 카일에게 검술을 가르친 매튜 영감은 용병 출신이었고, 그의 말버릇은 ‘구울에게 물려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였다. 실제로 그는 오른팔의 팔꿈치부터가 휑했는데, 구울이 득실거리는 힐헤임 숲에서 부렸던 객기의 대가라고 했다.
나는 구울은 아니고 시간에 콱 물린 상태였다. 정신을 다잡아 돌아갈 방법을 궁리하느라고 밤을 꼬박 샜다. 일레스티아에게 제출할 반성문에 대해선 까맣게 잊어버렸다는 뜻이었다.오전 수업 시간을 할애하여 부랴부랴 펜을 놀렸다. 그랬더니 너무 날림으로 쓰는 바람에 군데군데 아기 그렘린 마니의 주제가를 끼워 넣은 걸 들키고 말았다.
“안녕, 달튼. 어린이용 장난감을 향한 너의 열정은 참 감동적이더라.”
나는 검술 수업 도중에 볼턴에 의해 학생회실로 끌려갔다. 볼턴이 나를 밀어 넣은 다음 정중한 뒷걸음질로 사라지자, 일레스티아의 비아냥이 날아들었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그 정도면 벨도 만족하지 않을까?”
“하하, 나의 플로라라면 그러겠지. 하지만 험프리스 교수님은 그러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야.”
일부러 의뭉스럽게 말해 봤는데, 역시 일레스티아는 호락호락한 자식이 아니었다. 그는 테이블에 산처럼 쌓여 있던 서류들을 한쪽으로 치우고 내게 손짓했다. 나는 최근에 그가 아닌 켈란 일레스티아와 마주앉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느릿느릿 의자를 뺐다.
“그래서 네게 반성문 작법을 알려 줄까 하는데.”
“일레스티아의 황태자가 누구를 가르칠 만큼 반성문에 통달한 줄은 몰랐는걸. 자주 써 봤나 봐?”
“그럼. 나도 어머니께 엉덩이를 맞으며 자랐다고.”
다른 세계에 와서까지 케이틀린 대제에 대한 묻지 않은 정보를 알게 될 줄이야. 한숨을 내쉬며 일레스티아가 내미는 종이 뭉치를 받아 들었다. 아침에 제출한 반성문이었다.
찬찬히 읽자니, 내 작품이긴 하지만 형편이 없는 건 맞았다. 분량을 늘리기 위해 억지로 끼워 넣은 노래 가사는 그렇다 쳐도, 대부분의 문장에서 반성의 기미라고는 요만큼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문법이 엉망이라 도무지 뜻을 모르겠는 구절도 있었다.
애초에 나는 그다지 글을 잘 쓰는 편이 아니었다. 내 인생 최고의 명문은 감수성이 한창이던 사춘기에 풋사랑을 주체하지 못하고 써 내린 연서였다(마베릭 빌라드가 두고두고 우려먹는!). 근데 그거도 책 좀 읽었다 하는 사용인들을 괴롭혀 첨삭을 받아 낸 결과물이었으니까.
“언어학적 가치는 있을 것 같지.”
일레스티아가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 수준까지는 아닌 것 같아서 발끈했는데, ‘자애로운 스티아께 맹세코 저는 회로의 코어에 마나를 채울 때는 반드시 피셔의 법칙에 따라 죄송합니다.’라는 문장을 읽고 입을 다물었다. 마과학 수업을 들으면서 쓰다 보니 그만.
나는 일레스티아의 지휘 하에 부지런히 펜을 움직였다. 그는 볼턴과 달리 상당히 좋은 선생이었다. 험프리스 교수가 평생토록 들었을 법한 천편일률적 반성의 말을 무턱대고 받아쓰게 하지 않았으며, 내게 부족한 요소가 무엇인지를 스스로 도출해내길 유도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나에게 필요한 선생은 나쁜 선생이었다.
“있지, 일레스티아. 그냥 어떻게 써야 네가 나를 놓아줄지 알려 주면 안 될까?”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네 반성이 증명되지 못할 텐데.”
“너도 알잖아, 내가 반성하지 않을 거. 솔직히, 이 웃긴 문장들을 전부 교정한 뒤에도 나는 동물 모양 마시멜로를 살 거야. 내 핫 초콜릿용 머그엔 사자가 딱 어울리니까.”
“정말 구제 불능이구나, 달튼.”
일레스티아가 사뭇 우아한 각도로 입꼬리를 올렸다. 말끝에 작은 경멸이 묻어 있었다. 문득, 도대체 마시멜로 토끼가 보드라운 몸뚱어리로 플로렌스 벨을 들이받은 게 그에게 있어 얼마나 대단한 문제이기에 이토록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건지 궁금해졌다.
“벨을 좋아해?”
충동적으로 물었다.
“왜? 걔가 예뻐서? 착해서?”
“네가 그걸 알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새로 작성한 반성문에 붉은 잉크를 먹인 깃펜으로 줄을 그어 대며, 일레스티아가 되물었다. 눈맞춤조차 꺼리는 태도와 과하게 잘라 내는 말투에는 아무리 신경줄이 굵은 나여도 기분이 상했다.
대개 이런 경우에 내가 택하는 행동은 둘 중 하나였다. 등을 돌리고 두 번 다시 돌아서지 않거나, 내 옷소매와 겨루는 용맹한 고양이 릴루처럼 콱 물고 놓지 않거나.
어쩌면 작은 농담으로 일말의 즐거움을 취하는 것도 좋겠지 싶었다. 근래 나의 삶은 너무나도 팍팍했으므로 방귀 소리를 내는 마도구 하나 쥘 겨를이 없었다.
“당연하지, 사실 나는 평행세계의 네 연인인걸.”
나는 최대한 엄숙하게 지껄였다. 일레스티아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나를 봤다. 그가 종이에 긋던 줄은 이제 수평에서 크게 벗어나 있었다.
“달튼, 혹시… 검술 수업에서 머리라도 맞았어?”
일레스티아는 미쳤냐는 말을 돌려서 했다. 그의 찌푸린 미간과 나비 날갯짓처럼 떨리는 속눈썹에서, 나는 ‘늘어난 이마 사건’으로 험프리스 교수를 놀릴 때와 비슷한 희열을 느꼈다.
“‘로즈마리 블로썸’이 누구냐고 했지? 걔는 내가 있던 세계의 ‘플로렌스 벨’이야. 찰랑거리는 금발에, 제비꽃 같은 눈동자에, 도자기 인형처럼 생긴, 학생회 서기. 나는 여기와는 다른 세계에서 왔거든.”
“무슨….”
“거기서도 학생회장은 너였는데, 음… 우리는 엄청 열렬했어. 장난이 아니었다고. 그래서 그런지 좀 속상하네. 네가 벨 때문에 나는 안중에도 없는 것같이 말할 때마다.”
가능한 가장 끔찍스러운 상상을 동원해 가까스로 눈물을 짜내었다. 나의 악마 쌍둥이가 부모님을 속여 달튼 상단을 이어받고, 나는 영원히 피츠시몬스 아카데미의 재학생으로 남는 상상이었다.
“채프먼 교수님을 부를까?”
“걱정 고마워. 난 아주 정상이야. 네 허리에 난 상처를 묘사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야. 볼턴은 계속 죄인처럼 구니?”
일레스티아가 케이틀린 대제의 비밀의 방에서 쓰러졌을 때, 나는 그를 옮기다가 본의 아니게 맨상체의 반절 가량을 봤다. 그의 허리에는 가로로 긴 상처가 나 있었는데, 형태나 색 등으로 미루어 보아 생긴 지 오래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당시에는 경황이 없어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에드가의 누나가 불구가 된 역사를 알게 된 시점에서 돌이켜 보면 그건 암살 시도의 흔적이었다. 켈란 일레스티아에게 암살 시도의 흔적이 남았다는 건, 호위인 마르퀴즈 볼턴이 실수를 했다는 거겠고.
진실과 진실이 아닌 것을 섞어 말했더니 일레스티아는 퍽 혼란스러운 눈치였다. 입술을 떼었다가 도로 다무는 행동을 여러 번 하고 나서, 그는 빨간 잉크로 거의 떡칠을 하던 종이를 뒤집었다. 곧 바라 마지않던 축객령이 떨어졌다.
“가 봐도 좋아, 달튼.”
“진짜? 내 반성문은 아직 부족한 것 같은데.”
“이거면 충분해.”
나는 겉으로는 가련하게 눈을 깜빡일지언정 속으로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학생회실의 문지방을 넘었다. 그러고 나서도 깐죽대고 싶은 맘을 다스리질 못해서,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에 머리통만 쏙 집어넣고 이렇게 덧붙이기도 했다.
“저기, 일레스티아. 기왕이면 나를 ‘아리’라고 불러 주지 않을래? 내 세계에서 네가 썼던 애칭이 듣고 싶어서.”
딱 한번 쓰기는 했는데, 아무튼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가 시종일관 덮어쓰고 있던 미소에 미세한 균열이 갔다. 나는 복도로 나와 모퉁이를 돌자마자 신나게 웃어젖혔다. 찔러도 파란 피나 쏟아질 ‘얼어붙은 심장의 귀공자’를 이겨 먹기란 그야말로 중독적이어서, 앞으로도 멈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
학기 말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가 도서관이 꽤 붐볐다. 나는 책을 한 아름 안은 학생들 사이를 요리조리 누비며 책장을 기웃거렸다. <패치 노트>를 찾기 위해서였다.
나를 여기로 날려 보낸 것은 로즈마리 블로썸이었다. 어쩌면 플로렌스 벨이 다시 돌려보내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선 걔가 뭐 하는 앤지부터 알아 두는 게 좋았다. 임사 체험은 한 번이면 충분했다.
<패치 노트>에는 켈란 일레스티아와 에드가 라모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내가 추측하기로 걔들은 블로썸, 혹은 벨, 그러니까 주인공의 상대역이었으므로 분명 그녀의 정체를 파악할 만한 실마리도 거기 있을 것이었다.
도서관에서 일레스티아를 만났던 것을 떠올렸다. 그때에 그의 손에 들려 있던 <패치 노트>도. 내 기억이 맞다면 일레스티아는 여기서 <패치 노트>를 발견했다.
일레스티아가 어느 방향에서 나타났던가를 기억해 내기 위해 노력해 보았으나, 뇌리에 남은 것이라고는 떠다니는 책 먼지 사이에 놓인 그의 얼굴이 얼마나 굉장했는지 뿐이었다. 오, 아리엘. 대체 너는 왜 이렇게 미남에 약한 거니.
스스로를 비난한다고 해서 갑자기 <패치 노트>의 위치가 생각날 리는 없었다. 피츠시몬스 아카데미의 도서관은 지독하게 넓었고. 대륙 내 존재하는 책들의 반절 이상은 여기에 있는 것 같았다(사실 그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었다. 마법사들은 대부분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책 속에서 찾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또 책장마다 책을 얼마나 빽빽하게 꽂아 놨는지, 책들끼리 몸을 비비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헤매다 보니 인적이 드문 곳까지 왔다. 나는 아카데미를 10년 동안 다녔지만, 도서관의 입구 쪽이 아닌 벽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패치 노트>는, 얄밉게도, 그만큼 가서야 겨우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라도 있기는 해서 다행이었다. 그 ‘어디’가 까치발을 해도 어림없는 높이인 건, 안 다행이었고.
발돋움용 사다리를 가지러 가려면 지긋지긋한 책의 바다를 다시 건너야 했다. 갔다가 길을 잃지 않고 돌아올 자신도 없었다.
지금껏 배운 보조 마법 중에 정녕 이 난관을 타개할 주문이 없었던가를 고민했다. 볼턴 몰래 목검에 걸어 둘 심산으로 강화 주문만을 죽어라고 외웠던 스스로의 짧은 분별력이 개탄스러웠다.
“아기 요람을 흔드는 주문을 책장에 걸면….”
“무너질 거고, 넌 깔리겠지. 원하는 게 그거라면 해 봐도 좋아.”
짐짓 다정한 목소리에 돌아서니 켈란 일레스티아의 가슴팍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나도 모르게 발을 물렸는지, 불규칙하게 튀어나온 책의 모서리가 등을 찌르는 것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