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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31화 (31/178)

31화

내가 도달한 사후 세계는 학생회실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엉덩이가 통통하고 나팔을 든 아기 천사 대신에 모든 것에 싫증 난 듯한 미소를 띤 켈란 일레스티아가 있는. 나는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얘 얼굴을 좋아하긴 하지만 기왕이면 릴루로 해 주면 안 됐던 걸까?”

세상에서 가장 공격적인 할머니 고양이, 릴루. 내가 없으면 어디에 손톱을 간단 말이야. 과히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죽는다면 어떻게 될지를 상상해본 적이 있었다. 관 위로 엎어져 오열하는 나의 자식들이나, 내가 얼마나 주변 사람들을 웃게 했는지에 대해 말하는 배우자의 모습을 말이다.

이렇게 젊은 나이에 죽게 될지를 몰라서 그랬다. 일찍 죽는 것만한 불효가 없다던데. 부모님 걱정이 많이 됐다.

지금쯤 내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을까? 그래도 너무 서두르지 말고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빠는 요새 배가 많이 나와서, 조금만 뛰어도 무지 힘들어했다.

상단은 어떻게 되는 걸까. 아빠는 가족과 절연한 지 오래였고 엄마 쪽 친척은… 글쎄, 도박 중독 루스 아저씨나 사교계의 꽃을 꿈꾸는 조디에게 상단주 자리가 간다면 나는 사후 세계의 벽을 기어올라 부활할 거다.

얄미운 조디는 데뷔탕트 볼에서 제이든 스펜서가 머리 장식을 주워다 준 이후로 미래의 스펜서 공작부인 자리라도 차지한 듯이 굴었다. 만일 걔한테 마법사로서의 자질이 있었다면 나의 아카데미 생활은 훨씬 괴로웠을 것이었다.

브리는 똑똑한 애니까 내 도움 없이도 월시에게서 벗어날 수 있겠지. 켈리는, 혹시 나의 장례를 치른다면, 거기서 내가 피츠시몬스의 장난꾸러기 역사에 획까지는 아니어도 점이나마 찍었음을 노래해 줬으면 좋겠다.

리즈와 브레넌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정말 즐거웠을 텐데. 또 <패치 노트>를 전부 해독하지 못한 것도.

그렇게 많이 목검을 맞대었으면서 결국 단 한 번도 볼턴을 찌르지 못한 것과 제이든이 루이사와 친해지는 걸 돕겠다고 호언장담을 해 놓고 그러지 못한 것도 마음에 걸렸다.

에드가 라모스를 알뜰하게 부려먹을 소원도 빌었어야 했는데. 나름대로 하고 싶은 거는 다 하면서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은근히 후회할 건덕지가 있었다.

그리고, 카일… 나는 알게 모르게 성실한 구석이 있는 카일이 너무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으면 했다.

내 목을 조른 건 분명히 그였지만, 거기에 그의 의지가 개입되지 않았음은 명백했다. 그게 만약에 연기라면 걔는 아카데미를 다닐 때가 아니었다. 궁정 극단에서 배우로 이름을 날렸어야지.

마지막에 본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절대적인 무언가에 저항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모습. 잔뜩 충혈된 눈에서 흐르던 묽은 피가 내 심장을 적셨다.

그의 눈에 비친 나도 그랬을까. 그렇다면 내 기억 속에서 카일 빌라드가 그렇듯이, 그의 기억 속 아리엘 달튼이 떠올리면 항상 웃음이 나는 존재로 남기를 바라는 건 욕심일 것 같았다.

내가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일레스티아의 가죽을 뒤집어쓴 천사가 말했다. 기가 차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네가 그런다고 해도 내가 험프리스 교수님께 보고드릴 내용이 달라지는 건 아냐. 너와 카일의 동물 모양 마시멜로 경주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이 있잖아. 그녀에게는 꼭 사과했으면 좋겠네.”

동물 모양 마시멜로는 그냥 보기엔 핫 초콜릿에 띄워 먹는 평범한 마시멜로였지만, 피츠시몬스 매점에서 파는 간식거리답게 포장지에 쓰인 대로 주문을 외우면 살아 있는 동물처럼 움직이곤 했다.

카일과 나는 가끔 몇 가지 보조 마법으로 그것들을 크고 날쌔게 만들어서 경주를 시켰는데, 구경꾼들에게 금화를 걸게 하고 수수료를 챙기면 꽤 괜찮은 용돈벌이가 되었다.

마시멜로 동물들의 발바닥은 너무 말랑말랑했으므로 가속 주문을 걸면 땅을 디딜 때마다 엄청나게 뒤뚱거렸다. 그것이 보기에 귀엽기도 했고 승패에 다양한 변수를 창출했던 터라, 판을 깔았다 하면 사람이 제법 모이는 편이었다(단, 같은 종을 한 경기에 출전시키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경주로에서 간혹 가다 그 짓을 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피해라고? 얼마나 걸었길래? 미안한데, 우리는 금화를 받기 전에 꼭 결과에 승복하겠다는 문서에 서명하게 해. 글씨가 좀 작긴 하지만 거기에 똑똑히 적혀 있다고. ‘어떤 경우에도 환불은 불가합니다.’ 말이야.”

“음, 달튼. 이제 와서 시치미를 떼기야? 그녀는 너희가 풀어 놓은 마시멜로 토끼에게 들이받혔어.”

“하지만 그건 마시멜로잖아. 딜레이니 우드의 주먹이 마시멜로라면 걔한테 턱을 맞아도 아무 느낌도 안 날 거라고.”

우리의 고만고만한 마법 실력이 갑자기 출중해져서 마시멜로 동물들이 되게 강해졌다고 할지언정 그거에 들이받혀 다칠 정도면 아카데미 같은 데 있을 게 아니라 요양원에서 오늘내일해야 마땅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입을 떡 벌렸다. 아니, 근데 그보다.

“갑자기 무슨 소리냐는 건 내가 할 말이잖아. 그러니까,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나 죽은 거 아냐? 여긴 사후 세계고, 너는 아마 천사고?”

“잠깐 꿈이라도 꿨어? 여긴 사후 세계가 아니라 피츠시몬스 아카데미고, 나는 천-사가 아니라 학생회장이야. 너는 멀쩡히 살아 있고. 말하는 걸 들으니 ‘멀쩡히’는 아닐 수도 있겠지만.”

“꿈은 지금 꾸고 있는 것 같은데….”

일레스티아는 ‘천사’를 발음하며 약간 민망한 듯이 머뭇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볼을 아주 세게 꼬집었다. 아플 뿐이었다.

“그럼, 카일은? 로즈마리 블로썸은?”

“카일과는 오전에 이야기 마쳤어. 그리고 로즈마리 블로썸이 누구야?”

“뭐?”

그건 사후 세계-일레스티아가 아니라고는 했으나-에서 듣기에는 지나치게 충격적인 소리였다. 로즈마리 블로썸이 누구냐고?

“블로썸을 몰라? 3월에 전학 온 특례 입학생이잖아. 찰랑거리는 금발에, 제비꽃 같은 눈동자에, 도자기 인형처럼 생긴, 학생회 서기. 너 왜 그래?”

“왜 그러냐고 묻고 싶은 건 나야. ‘플로렌스 벨’과 ‘로즈마리 블로썸’은 착각하기에 너무 다른 이름인데. 내가 너라면 너희의 재미없는 장난 때문에 다친 사람의 이름 정도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거야.”

플로라 벨은 또 뭐야? 밀려오는 현기증에 관자놀이를 짚었다. 방금 돌아온 정신이 도로 나가 버릴 것만 같았다.

***

일레스티아가 말한 대로, 이 세계(나는 여기를 더 이상 사후 세계라고 부르지 않기로 했다. 그걸 따져 봐야 별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에서는 로즈마리 블로썸의 자리를 고스란히 플로렌스-플로라-벨이 차지하고 있었다.

소문의 평민 특례 입학생. 아름답고 상냥하여 지지층이 두터운 연회의 여왕. 학생회로부터 이례적인 대우를 받는, 학생회의 공주님.

그녀가 블로썸과 다른 점이 있기는 했다. 벨은 블로썸처럼 나를 싫어하지 않았다.

사실 싫어하지 않는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걔는 아예 아리엘 달튼이라는 사람의 존재 자체를 몰랐으니까.

일레스티아의 강압에 의해 그녀의 방에 찾아갔을 때, 벨은 노래하듯 종알거렸다. ‘괜찮아, 앤. 나는 다친 데가 없는걸. 조금 놀랐을 뿐이야.’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카일이 그러는데, 소꿉친구라며? 좋겠다. 엄청 다정한 데다 재밌는 애잖아. 진지할 때는 진지할 줄도 알고.’

나는 카일을 조종하여 나를 죽이려고 했던 블로썸과 완벽히 같은 외모에, 목소리나 말투, 사소한 버릇까지 닮은 벨이 그를 아주 잘 안다는 듯이 떠드는 게 신경에 거슬렸다. 그래서 어색한 웃음소리로 대답을 대신했다.

또 내가 알기로 내 이름은 여기에서도 ‘아리엘’이었다. 그래서 즉시 정정을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도에서 마주친 그녀는 ‘좋은 저녁이야, 앤.’ 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아무래도 기억할 마음이 없는 모양이어서 굳이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벨의 곁을 지키듯 선 일레스티아도 그녀가 해맑게 무례한 것을 봤을 텐데, 내가 그녀를 ‘로즈마리 블로썸’이라고 불렀을 때처럼 정색하지 않는 게 배알이 꼬여서이기도 했다.

플로렌스 벨은, 나돈과 볼턴의 애만 태우는 블로썸보다 훨씬 학생회의 공주님다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블로썸은 요란한 전학 이후로 겨우 한 달 하고 반을 넘겼는데, 벨은 그보다 두 배는 되는 시간을 피츠시몬스에서 보냈으므로, 그 차이인 듯 했다.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벨이 마시멜로 토끼로 인해 본 피해는 전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레스티아는, 험프리스 교수에게 올라가는 보고서의 내용을 한껏 과장하여 기어코 나에게 징계를 내렸다. 그녀에게 직접 사과하도록 하기도 했다. 굳이 자필 반성문을 제출하게 생긴 게 나여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지나친 처사였다.

사실 일레스티아가 학생회의 공주님에 한해 이성은 내다 버린 듯이 구는 상황은 내게 별로 낯설지 않았다. 5학년이 되풀이되는 동안 계속 그래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있던 세계의 일레스티아도 곧 저렇게 될까. 기분이 이상했다. 나를 ‘아리’라고 불렀으면서. 손깍지도 꼈으면서. 그렇게 웃어 놓고.

아무튼 지금 나에게 있어 그게 엄청 대수는 아니었다(정말로!).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죽지 않았다. 이상한 세계로 날려 왔다 뿐이지. 그렇다면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진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돌아가야 했다. 물론 벨은 블로썸과는 달리 내게 위해를 끼칠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 적어도 누구한테 목을 졸리기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세계에 떨어졌다는 게 마냥 안심이 되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브레넌이 결혼식장에서 얼마나 얼간이가 되는지 직접 확인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또 리즈는 만일 우리의 흑수정 광산 작전이 성공하게 된다면 나를 언젠가 태어날 아이의 대모로 삼아 주기로 했다. 리즈가 걔의 침대맡에서 ‘네 대모가 하늘에서 너를 지켜보고 있을 거야.’라고 말하는 상상만 해도 너무 싫었다.

더구나 달튼의 말괄량이는 절대로 걸어 오는 싸움을 회피하는 법이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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