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냅킨은 백조 모양으로 접혀 있어서 소박한 물색으로 칠한 나무 테이블에 잘 어울렸다. 캐노피를 받치는 기둥은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금칠이 되고 보석이 박힌 것보다 한결 분위기가 살았다.
테이블의 가운데에는 초가 놓여 있었다. 잘 보니 그것은 초 모양의 마도구였다. 불꽃 모양으로 가공한 유리를 불그스름하게 채색하고 빛이 나는 주문을 담아 조명 효과를 내었는데, 개중 질이 좋은 것은 진짜 불꽃처럼 외부 자극에 따라 흔들리도록 설계되어 훨씬 그럴싸했다.
빛이 필요하면 신성력으로 대충 때우는 일레스티아 출신의 볼턴은 그렇게 정교한 마법 조명을 접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볼턴이 소심하게 펼친 검지를 유리 불꽃에 대었다가 지레 놀라 떼는 것을 보고 웃음을 참았다. 그러고는 머쓱하다는 듯 안경 줄을 매만지는 그의 주의를 작은 헛기침으로 환기했다.
“주문은 어떻게 해야 된다고 했지? 나한테 맛있다고 해서?”
“남에게도 맛있는 거 아니다. 무조건 물어보고.”
“좋아. 계산서는?”
“절대 보여 주지 않는다.”
“만일 블로썸이 지갑을 열고자 한다면?”
“들키지 않게 조심해서 반 이상 계산해 둔다.”
똑똑한 자식이라 그런지 금방 배우는구만. 나는 볼턴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잽싸게 잘라 놓은 식전빵을 초콜릿에 담그며 흐뭇하게 웃었다.
곧 주문한 음료가 나왔다. 볼턴의 것은 무화과 주스였고, 내 것은 버터스카치 시럽을 듬뿍 넣은 우유였다. 한 모금 들이켜자 혀와 입천장에 단 기운이 남아서 기분이 꽤나 좋아졌다. 콧노래를 부르며 냅킨을 펼쳤다.
하얀 네모가 된 그것은 더 이상 백조 같아 보이지 않았다. 약간 쓸쓸한 마음이 들어 볼턴에게 말했더니 우울병에라도 걸렸냐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있지도 않은 빵 부스러기를 떼어 준다는 핑계로 안경알에 지문을 찍음으로써, 그에게 무신경한 발언이 어떤 대가를 치러야 마땅한지 알려 주었다.
볼턴이 씩씩거리며 안경알을 닦는 동안 요리가 도착했다. 레드 와인과 월계수 잎으로 재워 풍미를 살린 송아지 안심 스테이크였다. 테이블에 접시를 내려놓는 점원의 팔뚝은 꽤나 진한 색에, 근육이 단단히 잡혀 있었다.
심상치가 않았다. 어딘가 익숙하기까지 했다. 고개를 들었더니 붉은 안광이 나를 꿰뚫었다. 에드가 라모스였다.
“여기서 뭐 해, 둘이?”
라모스는 마치 거기가 원래 제 자리였다는 듯이 볼턴의 곁에 앉아 어깨동무를 했다. 볼턴이 질색을 하며 그에게서 빠져나왔다. 완전히 똑같이 생긴 쌍둥이 중 누구를 욕해야 하는지 잠깐 고민하는 눈치길래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요새 나돈 왕실 상황이 별로인가 봐, 라모스?”
“아니, 어제도 금화로 목욕했는데. 너희 테이블로 나가는 접시라길래 달라고 했지.”
“금화로 목욕을 했다고?”
“그럴 리가 있냐. 고기나 잘라.”
나는 경악하는 볼턴의 손아귀에 나이프를 쥐어 주며 핀잔을 던졌다. 그러자 볼턴은 뭐라고 꿍얼거리며 스테이크를 자르기 시작했다. 일국 최강으로 꼽히는 기사답게 절도 있는 칼질이었다.
라모스는 나와 볼턴이 주말을 함께 보내게 된 경위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집요하게 캐묻기에, 나는 일레스티아의 성기사가 선보이는 스테이크 해체 쇼를 가리키며 어떻게 된 것 같냐고 되물었다. 라모스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나는 딴청을 피웠다. 내가 볼턴과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마주 보고 앉은 까닭을 설명하자면 반드시 그의 순정에 대해 언급해야 했기 때문이다.
평소에 모든 학생에게 공평하게 재수가 없는 만큼 그가 로즈마리 블로썸을 특별 취급하고 있음을 모르는 사람은 아카데미에 없었다.
하지만 그가 신을 모시는 신분임에도 피츠시몬스 타임즈의 ‘오늘의 사랑점’ 코너를 정독하고, 꼿꼿한 고개를 숙여 누구에게 연애 지도를 부탁하며, 피니건 거리에 뿌려지는 홍보 전단을 긁어모아 캐노피에 꽃 장식이 된 레스토랑을 찾아낼 만큼 맹목적인 줄은 알지 못할 것이었다.
아무튼, 스스로 밝히지 않은 감정을 내가 먼저 떠드는 건 도리가 아니었다. 끝끝내 시치미를 떼자 라모스는 나에게서 유의미한 정보를 알아내기를 포기한 듯했다. 대신 내가 조금밖에 마시지 않은 버터스카치 우유를 집어 들었다.
그의 울대뼈가 정확히 두 번 오르내리자 음료의 반이 자취를 감추었다. 이런 날강도를 봤나! 나는 순식간에 죽상이 되었다.
“야, 남의 거 뺏어 먹지 말고 네 자리로 가!”
“저기 끼기 싫단 말이야.”
라모스가 부루퉁하게 내뱉었다. 그의 턱이 조금 떨어진 테이블을 향했다. 볼턴과 나의 고개도 라모스를 따라 돌아갔는데, 그러자 동생보다 약간 정돈된 나돈의 밀색 뒤통수가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도 상기된 뒷목과 동그랗게 올라붙은 광대뼈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한참 즐거운 모양새였다. 그렇다면 나돈의 앞에 누가 앉아있는지는 뻔했다. 연노란색 드레스의 참사가 재현되고 만 것이었다!
나는 볼턴이 멍청한 표정으로 나이프를 떨어뜨리는 것을 곁눈질했다. 불쌍한 자식.
그러거나 말거나, 라모스는 눈치도 없이 볼턴이 조각내 놓은 스테이크를 홀랑 집어먹으며 수작을 부리기 시작했다. 말하는 투가 하도 뻔뻔해서, 나는 잠시 동안 우리가 나도 모르게 만나기로 한 일이 있었던가 고민해야만 했다.
“맞은편 골목에도 괜찮은 커피 하우스가 있던데. 우리는 다음에 거기 갈까, 아리엘?”
“나 너랑 약속 잡았어? 막 이름도 허락하고?”
“아니, 지금 잡는 건데. 그리고 피차 편하게 부르는 게 좋잖아. 너도 맘대로 해. 에드가가 싫으면 에드나 네드라고 불러도 되고. 근데 ‘에디’만은 피해 줬으면 좋겠어. 내 형제들이 나를 바보 취급할 때 쓰는 애칭이거든.”
“좋아, ‘에디’.”
내가 가진 고질병, 청개구리 심보는 곧장 그의 기대를 배신했다.
“젠장, 괜히 말했잖아. 뭐, 네 목소리로 듣기엔 나쁘지 않네. 그래서 갈 거지?”
“살 거지?”
“그럴 수만 있다면 저야 영광이지요, 미스 달튼.”
그가 능숙하게 내 손끝에다가 대고 쪽 소리를 냈다. 나는 몸이 배배 꼬이는 기분에 포크를 들어 스테이크 가니쉬로 나온 아스파라거스를 쿡 찔렀다.
강렬한 첫사랑의 추억과 끔찍한 첫 연애의 기억은 나를 쉬이 착각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었지만, 얘는 진짜 헷갈리게 굴었다. 만일 그가 아카데미 재학 내내 피츠시몬스 타임즈에 이름을 올리던 난봉꾼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넘어가고도 남았을 것이었다.
***
“아버지랑 얘기해 봤어? 광산 말이야.”
마물학 수업을 들으러 가는 길에 브리가 대뜸 말을 꺼냈다. 나는 별관에 볼일이 있다고 따라붙은 카일의 눈치를 살폈다. 내 생각에 카일은 우리의 5학년이 되풀이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고 그와 관련된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내가 미래를 바꾸어 엘리자베스 맥카시를 도왔다는 사실을 알면 탐탁지 않아 할 수도 있었다.
“헛소리 말고 공부나 하라더라. 그럴 줄은 알았지만.”
리즈가 대답했다. 그녀는 최후의 돌파구가 닫힌 상황에서도 꽤나 덤덤해 보였다. 나는 리즈와 거의 10년간 친하게 지내면서 그녀의 격정적인 면모를 충분히 접했는데, 무슨 꿍꿍이가 있지 않고서야 이렇게 침착할 리가 없음을 잘 알았다. 그래서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려고?”
“알아봤는데, 나랑 브레넌이 모아 둔 용돈에 조금만 보태면 살 수 있을 것 같더라고, 그 땅.”
“정말? 아무리 변방이라고 해도 지글러 후작령이면 만만한 가격이 아닐 텐데?”
“2학기 등록금을 빼야지.”
퍽 시원시원한 말투에 브리가 작게 숨을 들이켰다. 나 또한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졸업을 앞두고 아카데미를 자퇴하겠다고? 새삼 리즈가 스스로의 사랑에 얼마나 큰 무게 추를 걸고 있는지가 실감났다.
나는 5학년 1학기에 자퇴서를 던져 본 장본인이었다. 그때에 나는 피츠시몬스에서 눈을 뜨는 매일 아침이 고통스러웠고, 벗어날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자신이 있었다.
“지금부터 투자를 하면 여름 방학쯤에는 결과물이 나올 거야. 아리엘 말대로 되면 금의환향하는 거고, 아니면 말고.”
“무슨 광산? 아리가 뭐라고 했는데?”
카일이 끼어들었다. 언제나처럼 장난기가 서린 말투였지만, 표정이 굳어 있었다. 나는 그가 내가 저지른 짓에 대한 실마리를 잡았음을 직감했다.
그야 당연했다. 거기는 흑수정 광맥을 빼면 아무것도 없었고, 지금 시점에선 어떤 정보 길드도 주목하고 있지 않은 땅이었다. 또 마탑의 보안은 너무나 철저해서 진행 중인 연구와 관련된 자료는 탑주조차 접근이 불가했다. 수습을 위해 말을 고르는데, 룸메이트의 새털 같은 입술이 먼저 열렸다.
“지글러 후작이라는 사람이 매물로 내놓은 산이 있는데, 얘가 거기 광산 지으면 대박 날 거라고 했거든.”
녹색 눈동자가 나를 꿰뚫었다. 카일의 입꼬리는 습관처럼 올라가 있었으나 눈에는 전혀 웃는 기색이 없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조금 무서웠다.
문득 커다란 손이 내 손목을 아프게 잡았다. ‘얘기 좀 해.’ 카일이 초조하게 말했다. 나는 저항 없이 그에게 이끌려 별관의 뒤쪽까지 갔다. 제이든 스펜서가 새끼용 클레이를 어깨에 얹고 릴루와 놀아 주던 장소였다.
사실 저항을 했더라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결과가 나왔을 것이었다. 그 정도로 그의 기세는 강경했고, 거기에는 지극히 드물게도 난폭한 구석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붙들린 손목에 손자국이 남을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어디까지 기억해?”
지켜보는 눈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카일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