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28화 (28/178)

28화

“혹시 몰라서 비슷한 형태를 보이는 다른 문장도 확인했어. 에드가에 관한 내용도 있는 것 같더라.”

“에드가 라모스?”

일레스티아가 수긍했다. 나는 재빨리 켈란 일레스티아와 에드가 라모스가 무엇을 공유하고 있는지 궁리했다.

두 사람은 우선 국적부터 달랐고, 생김새는 비슷한 구석을 찾기가 힘들었다. 키가 크고 근육질이라는 것 말고는 체형도 차이가 컸다.

일레스티아는 말라서 옷을 입으면 단련한 몸이 그다지 티 나지 않는 편이었고, 라모스는 몸통 자체가 퍽 굵었다. 그의 탁한 밀색 머리도 금발이라고 친다면, 그것만이 그들의 외모에서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공통점일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둘 다 학생회기는 했다. 로즈마리 블로썸의 남자라는 뜻이었다. 문득, 머릿속 깊숙이 숨어 있다가 시도 때도 없이 나를 괴롭혀 대던 케이틀린 대제가 슬그머니 존재감을 높였다.

그녀는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고 했다. 귓가에 스치는 바람과도 같이 작은 소리였다. 케이틀린 대제는 세계와 관련된 이치를 깨달은 위인이었으므로, 그 은밀한 속삭임에 어떤 의미도 없을 가능성은 배제하는 게 맞았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건 누군가는 주인공이라는 거였다. 로즈마리 블로썸의 5학년은 완전 로맨스 소설 같았다.

또한 그녀에게는 신이나 가질 법한 능력이 있었다. 카일 빌라드라는 조력자의 존재도 빼놓을 수 없었고. 만일 피츠시몬스 아카데미에 케이틀린 대제가 말한 ‘주인공’이 있다고 한다면, 블로썸을 떠올리지 않기란 어려웠다.

“그리고 여기서부턴 내 가설인데.”

일레스티아가 목소리를 낮췄다.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다.

“혹시 신학 수업 들은 적 있어?”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대륙의 신학은 신성 일레스티아 제국의 교황청에서 설파하는 교리를 기본으로 하였다.

브리아나에 따르면 일레스티아에서는 빈민들도 굶지 않기 위하여 수도원에 드나들며 기도문을 외웠으므로, 신학 수업에서 학점을 따기란 일레스티아 학생들에게 누워서 수프 마시기나 다를 것이 없었다.

때문에, 신학은 수강 신청이 굉장히 어려운 과목 중 하나였다. 사실 나는 오로지 졸업하기 위해 아카데미를 다니는 처지였으므로 평균 학점을 깎아먹을 것이 분명한 신학 같은 과목은 애초에 들을 생각조차 않았다.

“일레스티아의… 대륙의 신학에서 인간의 삶은 그들의 것이 아니야.”

“‘운명의 물레’ 말이지?”

“맞아. 원래 운명의 물레는 인간의 생사에만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어머니가 즉위하고부터는 달라졌지. 어머니는 자신이 깨달은 ‘이치’를 바탕으로 우리의 모든 선택은 운명의 물레가 이미 짜 놓은 결과라고 주장했어. 나는 지금까지 그게 어머니가 그녀의 정적을 처리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 도입한 극단적인 해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재미있게도, 켈란 일레스티아는 일레스티아 학생들에 의해 정직된 볼드윈 교수보다 더욱 발칙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난 <패치 노트>가 예언서일 가능성이 있다고 봐.”

“예언서?”

“<패치 노트>는 그것이 쓰인 시기보다 훨씬 미래의 정보를 담고 있어. 또 내 이름이 언급된 횟수로 미루어 보아 그 정보는 아주 다양하지. 적어도 내가 죽는 날짜만 써 있진 않을 거야.”

“그러니까… 만일 케이틀린 대제가 깨달은 ‘이치’처럼 우리의 저녁 메뉴조차 운명이 정해놓은 것이 맞다면, <패치 노트>가 그 내용을 담고 있다는 거야?”

일레스티아가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긍정의 표현이었다. 내가 내린 결론은 그와 비슷하지만 같지 않았다. 나는 잠자코 생각에 잠겼다.

예언서에는 주인공 같은 건 없었다. 만일 <패치 노트> 에 켈란 일레스티아와 에드가 라모스의 이름이 쓰였다면 그것은 그들이 어떤 예언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로즈마리 블로썸을 주인공으로 한 로맨스 소설의 등장인물이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러므로 <패치 노트> 가 담고 있는 것은, 운명의 물레가 짜낸 하트 모양 러그인 셈이었다. 블로썸의 이니셜이 수놓인.

불현듯 로즈마리 블로썸의 로맨스 소설에서 아리엘 달튼이 맡은 역할이 과연 무엇이기에 이 난리통에 휘말리게 된 건지 궁금해졌다. 주연이라기에 내 외모나 배경은 너무 평범했고, 조연이라기에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케이틀린 대제가 다녀간 이후로 줄곧 이것에 대해 골몰하고 있었다. 내가 누군가의 삶을 빛내기 위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을 흘려보내야만 했다.

“대제께서 뭔가 알고 계실 거야.”

그래서 이렇게 말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케이틀린 대제는 손수 못생긴 스웨터를 짤 만큼 아들을 사랑했고, 또 그는 그녀의 하나뿐인 후계자였으므로, 어쩌면 ‘이치’를 전해 줄는지 모르는 일이었다.

은근히 직진하는 구석이 있는 켈란 일레스티아는 벌써 대제께 연통을 넣었다고 했다. 그리고 거기에 내가 그녀의 출중한 뜨개질 실력과 알차게 보낸 학창시절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음을 기어코 적은 것 같았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부지불식간에 목이 달아날 위기에 처하는 바람에 아주 창백해진 나를 보며 소리 내어 웃던 일레스티아가 별안간 테이블에 딸린 서랍에서 쿠키가 가득 담긴 양철통을 꺼냈다. 뚜껑을 열자 단내가 확 풍겼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달팽이 껍질처럼 동그란 모양으로 구워진 쿠키를 집어 입 안에 던져 넣었다. 버터를 얼마나 섞었는지 아주 혀 끝에서 살살 녹았다.

“카일이 ‘연회의 여왕’에 출사표를 던졌던데.”

일레스티아가 서류 뭉치를 정리하며 꺼낸 화두에 게시판 앞에서 카일을 만났던 기억이 났다. 피츠시몬스 최고의 인기인답게, 실물보다 든든하게 그려진 그의 초상화 주위가 추천사로 빼곡했다.

개중 음유 시인 꿈나무 켈리 라미레즈가 쓴 것은 눈에 띄게 장황했다. 카일은 그것을 가리키며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했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그가 아무리 예쁜 짓을 해도 릴루만은 넘겨줄 수 없으며, 대신 내가 제일 아끼는 릴루의 초상화를 넘겨주겠노라고 선심 쓰듯 말했다. 나름대로 감사의 표현이었다.

그러자 카일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 어깨에 팔꿈치를 올렸다. ‘어차피 너랑 나랑 결혼하면 릴루도 빌라드인데, 뭐.’

대꾸하는 대신에 그의 정강이를 되게 걷어찼다. 리즈도 그렇고, 도대체 결혼을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는 사랑과 결혼에 관해 지극히 십대다운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귀족의 결혼은 원래 그런 거라며 어깨를 으쓱이던 마베릭처럼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자 카일은 되레 억울하다는 듯이 나이 사십까지 괜찮은 상대가 없으면 결혼하자 약속하지 않았냐고 따졌다. 그러고 보니 데뷔탕트쯤에 손가락을 걸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근데 그렇다고는 해도 그가 정강이를 맞아 마땅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마흔까지 결혼할 남자 하나 못 만날라고. 너는 아닐 것 같아?’ 내가 던진 핀잔을 카일은 바람처럼 가볍게 받아쳤다. ‘나는 아니지. 네가 결혼할 남자가 없으면 결혼해 줘야 하는데.’ 아주 입만 살아 가지고.

“부럽더라. 나도 ‘연회의 왕’만 아니면 입후보 했을 텐데.”

“뭐? 너도 여장하고 싶었어?”

나는 어금니로 쿠키를 짓이기며 상상 속의 켈란 일레스티아에게 가발을 씌워 보았다. 나보다 예쁠 것 같아서 드레스는 입히지 않기로 했다.

“아니, 널 돕고 싶었거든. 기등록된 후보를 빼는 방법을 찾으려고 교칙을 얼마나 열심히 뒤졌는데.”

“맙소사, 정말 뜻밖이지만 고맙네. 머리라도 쓰다듬어 줄까?”

“응.”

웃자고 건넨 말에 그가 죽자고 달려들었다. 금으로 실을 자아다가 엮어 놓은 듯이 찬란한 머리통이 훅 가까워졌다. 가마를 따라 돌아 난 머리카락마저 가지런하니 아름다운 모양새였다.

“너는 진짜 이 버릇 좀 고쳐야 돼.”

일레스티아의 태도가 꽤나 강경했기 때문에, 나는 하릴없이 그의 이마와 관자놀이 사이에 손을 얹었다. 손가락에 얽혀드는 것들이 매우 부드러워서, 나는 그가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머릿결을 관리하는 건지 궁금해졌다.

만일 아몬드유와 계란 흰자, 포도 넝쿨을 태운 재, 감초나무 외의 비법이 있다면 브리아나 모슬리가 그에게 황금알을 낳아 줄 것이었다.

“무슨 버릇?”

그가 갑자기 고개를 쳐들었다. 덕분에 손바닥에 그의 말랑한 볼과 날카로운 턱뼈가 닿았다. 짧게 쳐 뒷목을 조금 덮은 금발이 손날을 간지럽혔다. 햇볕이 손을 핥아대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런 거!’ 나는 기겁하여 움츠렸다.

“알았어.”

일레스티아는 퍽 순순히 대답했다. 그러고는 내 입가에 묻은 쿠키 부스러기를 엄지로 닦아 내며 눈꼬리를 곱게 접었다. 하나도 모르는 게 분명했다.

***

마르퀴즈 볼턴은 아마도 나만큼, 혹은 나보다 더 친구가 없는 게 틀림없었다. 나는 황금 같은 주말을 어째서 볼턴의 데이트 사전 답사에 어울려 주며 보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대련에서 절대로 옆구리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각서만 쓰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쯤 봄 이불의 사각거리는 촉감을 즐기고 있었을 것이었다.

그렇게 말했더니, 그는 젠체하며 반박했다. 내가 식당에서 월시 자식의 코를 깨 놓지 않았더라면 방과 후마다 징계를 받을 필요가 없으니 주말을 아꼈을 것이라는 거였다.

그의 논리가 잘못되지는 않았지만 내게도 충분히 억울한 면이 있었다. 거기 앉아 있던 게 아리엘 달튼이 아니라 험프리스 교수였더라도 옆으로 월시가 지나가면 다리를 걸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것이었다.

볼턴이 블로썸과의 만족스러운 데이트를 위하여 고심 끝에 골라 낸 레스토랑은 피니건 거리 중심가에서 걸어서 조금 가야 나오는 외곽에 위치해 있었다.

일단 이건 칭찬할 만했다. 중심가에 가까워질수록 음식의 가격은 높아졌고 건물은 화려해졌다. 신분이 낮은 손님의 출입을 막는 점원이 문을 지키고 선 경우도 있었다. 볼턴은 블로썸과의 거리감을 좁히기 위해 노력 중이었으므로 그의 취향이 얼마나 고급지든 간에 그런 곳은 피하는 게 맞았다.

만사 금화를 쓰거나 힘으로 찍어 누른다고 해서 능사가 아님을 납득시키기까지 얼마나 많은 갈등이 있었던가.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 내는 시늉을 했다.

“본 교관은 감동했다.”

“뭐라는 거야.”

볼턴이 얼굴을 붉히고 냅킨을 집어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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