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네가 작위는 내세울 수 없어도, 너희 상단은 수익 꽤 나오니까 집안싸움에서 완전 밀리지도 않을 거고.”
그러거나 말거나 리즈는 계속 말을 이었다. 나는 더할 나위 없이 황당해졌다.
“엘리자베스 맥카시, 다시 말하지만 나 걔랑 아무 사이 아냐.”
“나는 대릴 코완이랑 아무 사이라서 결혼하니?”
리즈가 쏘아붙이자 내 입술은 누가 아교칠을 한 마냥 달라붙었다.
“너네 그냥 도망갈래? 나돈으로 망명하면 내가 어떻게든 해 줄 수 있는데.”
켈리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나돈의 이민국에서 일하고 있었다. 리즈가 엉망진창 구겨진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순 없어. 지참금이 없으면 맥카시 영지는 풍비박산이 날 거야.”
“달리 돈을 벌 방법은 없을까? 무역선 투자라든지, 광산 개발이라든지….”
브리가 침대가에 엎드려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그러자 번뜩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나는 신이 나서 허리를 바짝 세웠다가, 문득 망설였다. 과연 내가 친구를 돕고자 하는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미래를 흔들어 놓아도 되는 걸까?
올해는 해적이 기승이어서 무역선에 돈을 들이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광산은 달랐다. 다가올 여름에 마탑에서는 기존의 마력석보다 흑수정에 마나를 담았을 때 그 효과가 극대화된다는 내용의 연구 보고서를 발표할 것이었다. 대륙 전역에는 흑수정 붐이 일고, 흑수정 광산을 가진 사람들은 말 그대로 돈벼락을 맞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광맥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아카데미를 자퇴하고 상단 업무를 배울 때 거기에 자재를 대는 일을 도왔기 때문이다.
맥카시 백작은 지극히 소심한 성격이었고 겸허와 검소를 가훈으로 하였으므로 졸부가 된다고 해서 적극적으로 무언가 저지를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부유한 것으로 이름난 광산의 원 소유주, 지글러 후작의 인생에 흑수정이 큰 역할을 할 것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긴 했다.
하지만 내 친구의 인생에, 엘리자베스 맥카시의 인생에 흑수정은 엄청난 전환점이 될 수 있을 것이었다. 나는 엘리자베스의 커다란 눈이 슬픔으로 푹 젖은 것을 보았다. 찻잔을 쥔 손이 마구 떨리는 것도. 그리고 결심했다.
“잘 들어, 리즈. 이건 내가 정말로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말해 주는 거야.”
“응?”
“지글러 후작령 남서쪽으로 작은 산이 있어.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지금 매물로 나왔거든. 아버지 잘 꼬셔서 그거 어떻게든 사.”
“뭐? 왜?”
“지글러 후작은 효자니까, 조부모님 들먹이면서 두 분이 요양할 별장을 짓는다고 하면 싸게 내 줄 거야. 도장 찍으면, 바로 갱도 뚫어서 인부 투입시켜.”
“금이라도 묻혔어?”
“금은 아니지만 곧 금보다 귀해질 거야. 내 말 믿어.”
그러자 브리는 일개 학생인 주제에 내가 어디서 그런, 사업가들끼리나 공유할 법한 정보를 얻었는지 궁금해진 듯했다. 영 의심스러운 모양이었다. 하기는 나라도 그럴 것이었다. 나는 최대한 신뢰감이 들게끔 입매를 단단하게 굳히고 예비 상단주로서 적절한 정보가 상거래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오염된 정보는 상인에게 치명적이었으므로 대부분의 상단은 믿을 만한 정보 길드와 계약하여 시장의 앞날을 예측하곤 했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는 브리아나 모슬리는 여전히 알쏭달쏭한 것 같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던 리즈는 한시름을 놓았다. 그녀는 훨씬 밝아진 안색으로 그제야 릴루가 얼마나 귀엽고, 켈리의 노래가 얼마나 웃기며, 4대 원소 감자칩이 얼마나 맛있는지를 호들갑스레 떠들었다.
“그래서 아리엘, 도대체 카일이 아니면 누구랑 사귀는 거야?”
“왜 또 남자 얘기야?”
나는 가까스로 기운을 차린 리즈의 말에 가능하면 초를 치지 않으려고 했으나, 그녀가 또다시 나를 남자와 엮자 짜증을 내고 말았다. 켈리가 눈을 빛내며 끼어들었다.
“실습용 마도구 보관실에서는 뭐가 없었다고는 하지만 라모스가 쟤만 보면 말을 못 걸어서 안달이던데.”
“걔는 다른 여자들한테도 그러잖아.”
“켈란 일레스티아는? 너희가 나란히 다니는 걸 목격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이번에 말한 것은 브리아나였다. 나는 뒷덜미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머릿속에 케이틀린 대제의 당부가 울려 퍼졌다. ‘켈란과 좋은 친구가 되어다오.’
“음, 그러니까, 독서 모임을 같이 해서 그래. 아주 건전하다고.”
“스펜서도 있잖아. 연회 때도 분위기 좋았고, 엊그제 보니까 이름도 부르던데?”
“그건 너네도 알잖아! 볼턴이 바람맞힌 거! 나한테는 은인인데 친한 척도 못 해?”
“애초에 볼턴이 네 파트너 한 것도 수상해. 일레스티아가 시킨 거지?”
브리아나-똑똑이-모슬리가 정곡을 찔렀다. 나는 합죽이가 되었다.
“야, 놔 둬. 그래 봤자 걔들은 카일 빌라드 못 이겨. 쟤를 위해서 그 중요한 사랑의 달 연회에서 여장까지 불사할 지극정성이 또 누가 있겠어?”
나는 리즈의 빈정거리는 말에서 뜻밖의 정보를 접하고 깜짝 놀랐다. 브리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거 무슨 소리야?”
“저녁에 못 봤어? 빌라드가 참전했잖아, 연회의 ‘여왕’ 경쟁에.”
“처음 알았지 뭐야, 남자도 후보 등록이 가능한지.”
상상만 해도 웃긴다는 듯이, 리즈가 키득거렸다. 브리가 나의 양손을 맞잡고 천진난만하게 감탄했다.
“너를 광대 역할로 무대에 올려놓을 수는 없다는 거잖아, 완전 다정하네!”
“카일이 일부러 그런 건지, 아니면 걔도 나처럼 당한 건지는 모르는 거잖아.”
걔는 왕 후보에 올랐을 때 아예 연회를 빠졌을 정도로 누구한테 평가받는 걸 싫어한단 말이야. 뒷말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건 물거품으로 돌아간 어느 해에 있었던 일이었다.
“그건 아냐. 나한테 추천 좀 넣어 달라고 했거든. 최고의 추천사를 써 줬지.”
켈리가 과자를 잔뜩 쥔 주먹을 들어 올렸다. 기회를 놓치지 않는 릴루가 즉시 그녀의 팔에 매달렸다.
아무래도 카일은 나를 혼자 부끄럽게 두지 않기 위해 사랑의 달 연회에서 여장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그건 정말이지 코가 찡할 정도로 감동적인 일이었지만, 동시에 부담스러운 결정이기도 했다.
사랑의 달 연회는 아카데미 내부에서도 외부에서도 주목하고 있는 명실상부 피츠시몬스 최고의 연회였다. 거기서 멀끔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앞으로의 사교 활동, 특히 혼사에 매우 중요했다.
카일에게 나의 창피가 그의 평판을 망칠 만큼의 가치가 있었던 걸까? 나는 그와 오랜 시간 동안 알고 지냈으나 가끔은 그가 하는 선택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비단 블로썸에 관한 일이 아니어도 그랬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우승이라도 하면 재밌고 좋을 것 같다며, 켈리와 리즈 그리고 브리는 카일에게 연회의 여왕 투표권을 행사하겠노라고 선언했다. 나는 심장에 추라도 단 듯이 답답한 가슴을 손으로 꾹 눌렀다.
***
학생회실에 들어섰을 때, 켈란 일레스티아는 언젠가 제이든이 과제를 하던 테이블에 앉아 서류 뭉치 같은 것을 넘기고 있었다.
은으로 장식된 깃펜을 기다란 손가락에 끼운 모습이 제법 어울렸다. 그의 손 움직임은 너무 우아해서 새의 날갯짓처럼 보일 때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내려깔린 속눈썹은 일레스티아의 머리카락처럼 여린 금색이었고, 아주 길어 눈가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약간 긴장이 되었다. 그가 나이자 동시에 내가 아닌 ‘아리’를 찾으며 눈물을 흘리던 날 이후로 그를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 이렇게 갑자기 부른 적 없었잖아.”
나는 징계를 받으러 온 말썽꾸러기처럼 조심스럽게 일레스티아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그가 깃펜을 내려놓고 딴소리를 했다.
“요새 잠을 잘 못 자.”
“볼턴이 걱정 많이 하더라.”
“자꾸 네가 떠올라.”
그는 깃펜을 받치고 있던 손가락으로 턱을 받치며 나를 보았다. 피곤에 찌든 목소리였다. 검은 잉크를 떨어뜨린 듯 흐려진 호박색 눈에서도 빛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잠깐 볼이 뜨거워졌다가, 그가 말하는 ‘나’가 지금의 내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뭐가 떠오르는데?”
“그냥… 네 얼굴. 웃거나 말하거나….”
그가 중지와 약지로 눈두덩이를 꾹 눌렀다.
“눈을 감아도 계속 보여. 눈꺼풀에 새겨지기라도 한 듯이… 단순한 상상이라기엔 너무 또렷해. 어제 일을 기억해 내래도 이러진 않을 거야.”
“내가 많이 보고 싶었나 보네.”
나는 간만에 관자놀이를 찌르는 ‘제4의 벽’을 느끼며 일부러 너스레를 떨었다. 그에게 그건 상상이 아니라 진짜 아리엘 달튼이고, 걔는 도로 감겨 들어간 시간의 타래 어디쯤에 있을 거라고 말해 줄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그런가 봐.”
그러자 일레스티아는 한숨처럼 얕은 웃음으로 내가 던진 농담을 받아넘겼다. 마침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을 때, 그의 입꼬리는 설탕을 한 겹 씌운 듯 달콤한 각도로 올라갔다. 평소대로의 켈란 일레스티아였다.
“여러 페이지에 중복해서 나타난다고 했던 문장 있잖아.”
“해독이 됐어?”
“일부만, 띄엄띄엄.”
일레스티아가 서류 한 장을 뒤집어 귀퉁이에 단어 세 개를 적었다. ‘켈란 일레스티아’, ‘공략’, ‘개선’이었다.
“네 이름이 거기 쓰여 있었다고?”
“나도 믿을 수가 없어서 몇 번이고 다시 해석해 봤어. 확실해.”
“아니… 어떻게?”
당황하여 엉거주춤 허리를 세웠다. 나는 고대어 해독에 뛰어나지 않았지만, 어떤 물건이 오래되었는지 아닌지 정도는 가늠할 수 있었다. 커버와 종이가 낡은 모양새를 보면 <패치 노트>는 적어도 반 세기 전의 것이어야 맞았다.
반 세기 전이라 함은 켈란 일레스티아는커녕 그의 어머니인 케이틀린 대제조차도 태어나지 않았을 때였다. 그런데 어떻게 그의 이름이 쓰일 수가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