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대륙의 역사 교재는 대충 십여 페이지를 할애하여 그녀가 ‘세계의 이치’라는 것을 깨닫게 된 정황을 서술하고 있었다. 정작 그게 어느 정도로 엄청난 ‘이치’였길래 그녀가 ‘대제’로 추대되었는지는 알지 못했는데, 그 내용이 각국 정상에게만 공개되고 철저히 비밀로 부쳐졌기 때문이다(내가 4학년이던 시절, 대륙의 역사 담당인 볼드윈 교수가 그것이 그녀의 입지를 다지기 위한 연극이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가 일레스티아 학생들의 거센 항의로 정직되는 사건이 있었다. 굳이 말하고 다니진 않았지만, 사실 내 생각도 그거에 가까웠다.).
아무튼 케이틀린 대제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대단히 바쁜 사람이기도 했다. 아무리 그녀의 아들을 위해서라고 해도 한낱 진로 상담을 위해 피츠시몬스까지 올 만한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지금까지 케이틀린 대제가 학부모 방문 주간에 피츠시몬스를 방문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케이틀린 대제가 왔어.”
내가 말했다. 스스로 듣기에도 뭐에 홀린 듯한 목소리였다.
“일레스티아의 황제?”
카일이 인상을 찌푸렸다. 브레넌은 릴루의 코를 건드리기 위해 손가락을 놀리다 말고 멍해졌다. 기회를 놓치지 않는 용맹한 릴루가 빈틈을 보인 사냥감에 달려들었다.
“응. 그리고 여기로 오고 있어.”
브레넌의 예술 감각이 십분 발휘된 간판은 지나가는 사람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케이틀린 대제의 눈이 이쪽을 향하자,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궤짝에서 내려와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릴루의 이빨 자국이 난 손가락을 감싸 쥔 브레넌과 카일도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마주한 그녀에게는 타국의 귀족이 그렇게 할 만한 위엄이 있었다. 나는 데뷔탕트 볼에서 밀루아의 필립 8세와 네 살배기 왕세자 저하를 뵌 적이 있는데, 솔직히 말하면 그때는 별로 긴장이 되지 않았었다. 국왕 전하의 주변머리가 너무 빈하고 왕세자 저하가 엄지를 불어 터지도록 빨고 있었던 탓일 수도 있겠지만.
“네가 아리엘이로구나. 짐의 마르퀴즈에게는 화공의 재능마저 있군.”
그녀가 독특한 억양의 공용어로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지 않았고 말투는 평이했지만 오히려 그런 부분에서 더욱 큰 위압감이 느껴졌다. 사실 내 심장은 그녀가 ‘아리엘’을 발음했을 때 거의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미, 밀루아의 아리엘 달튼이 일레스티아의 태양을 뵙습니다.”
“짐을 아는군. 켈란이 말하던가?”
대륙의 역사 과목에서 낙제를 했더라도 케이틀린 대제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또 월시 부자를 필두로 이렇게 많은 사람을 꽁무니에 달고 다닐 만한 학부모도 딱히 없었다.
케이틀린 대제 스스로도 그것을 충분히 알았다. 일부러 의뭉스럽게 되물은 것은, 그녀가 나를 찾아온 이유가 ‘켈란’과 관련되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었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더 깊게 숙였다. 그녀가 난데없이 이제 5학년이 된 아들의 교우 관계가 궁금해져서 손수 아카데미까지 행차한 것은 아닐 테니 말은 아낄수록 좋았다.
“똑똑하기도 하여라.”
그녀의 말끝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묻어 있었다. 내 선택이 틀리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일어서 보라.”
자연스러운 명령이었다. 나는 케이틀린 대제가 말 대신 낚싯줄을 던졌고, 내 턱이 거기 꿰이기라도 한 듯이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녀는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무례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긴 시간이었다.
“너는 주인공이 아니구나.”
문득, 그녀가 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이윽고 모두에게 선전포고라도 하듯 우렁찬 목소리가 이어졌다.
“앞으로도 켈란과 좋은 친구가 되어다오.”
좋은 ‘친구’가 되어 달라는 것은, 절대 ‘친구 이상’은 되지 말라는 경고였다.
로즈마리 블로썸이 아닌 아리엘 달튼은 켈란 일레스티아와 다양한 우연이 겹쳐 친구도 겨우 된 사이였다. 우리가 친구 이상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시피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이틀린 대제의 우아한 협박은 나를 엄청 주눅 들게 만들었다.
나는 은사로 수를 놓아 반짝이는 예복 자락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바닥에 거의 엎드려 있었다. 등줄기가 땀으로 축축했다.
***
마법 자물쇠로 지갑이 꽤나 두툼해진 모양인지, 브레넌이 나와 카일에게 매점에서 한턱을 쏘겠다고 했다. 내친김에 저녁도 먹을 기세여서, 나는 릴루를 내 방으로 돌려보내는 김에 엘리자베스 맥카시를 찾았다.
먹고 죽을 의리도, 공감 능력도 없는 멍청이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슬프게도 대부분의 남자애들이 여기 해당되었다.), 누군가의 남친과 식사나 외출을 하게 되면 꼭 여친에게 알리는 것이 여자애들 간의 법칙이었다.
가장 좋은 건 셋이서 함께 어울리는 거였고, 그다음은 사전에 허락을 받는 거였으며, 정 여건이 안 되는 경우에는 이해 가능한 해명을 동반한 사후 보고라도 하는 게 맞았다. 카일처럼 서로 안면이 있는 제삼자가 있는 자리에서는 그다지 엄격하게 적용되지는 않았지만, 나는 이 법칙을 꽤나 잘 지키는 편이었다.
리즈를 대동하고 식당으로 가는 길에 브리아나가 따라붙었다. 그녀는 개미만 한 목소리로 나를 원망했다.
“그 사나운 털 뭉치만 남겨 놓고 나가면 어떡해!”
브리는 자신이 객관적으로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은 생물에 공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사나운 털 뭉치라니!’ 나는 발끈해서 대꾸했지만, 릴루가 사나웠고, 털 뭉치인 건 맞았으므로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식당 근처의 게시판에 우글거리던 학생들이 자꾸만 나를 돌아보는 것이 퍽 심상치가 않았다. 그들의 미적지근한 시선에서 피츠시몬스 타임즈에 라모스와 나란히 실렸던 때와 같은 불온한 기운을 발견한 나는 최고로 든든한 두 사람과 팔짱을 끼고 걸었다.
내가 다가가자 수군거리던 무리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건 확실히 긍정적인 신호라고 할 수 없었다.
“이게 무슨….”
게시판에 매달린 것을 보고 리즈가 중얼거렸다. 브리는 너무 놀란 반응을 보이면 내가 불쾌감을 느낄 거라고 생각했는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나는, 어땠냐면,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사랑의 달 연회의 여왕 후보로 누구의 이견도 없을 아나이스 오브라이언과 화제의 특례 입학생 로즈마리 블로썸 그리고 그냥 아리엘 달튼이 올라 있는 것이 아닌가!
각 후보들의 초상화 옆에는 후보를 추천한 익명의 학생들이 남긴 의견이 실려 있었다. 미사여구가 구구절절한 아나이스 오브라이언과 로즈마리 블로썸의 것에 비해 내 것은 지나치게 성의가 없었다. 나의 평범한 머리색과 눈 색에 대해 과장스레 언급한 일부는 거의 조롱으로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어떤 개자식이 장난친 거야?”
엘리자베스가 이를 갈았다. 브리아나는 티가 나게 다른 데를 보는 척을 했다. 나와 같은 의심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연회의 여왕 후보가 되기 위해서는 스무 명 이상의 추천이 필요했다. 케이틀린 대제의 애첩이라는 죽여주는 뒷배를 가진 애덤 월시는 개판이 난 인성에도 불구하고 친구가 많았다.
당연하지만 쓰레기의 친구는 대개 쓰레기이기 마련이었다. 또한 그들은 공짜로 누군가에게 엿을 먹이기 위한 일에 지극히 열정적이었으므로, 만일 후보 추천에 금화를 하나라도 받았다면 이런 참사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데에 내가 가진 전부를 걸 수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되었든 간에 나는 오브라이언과 블로썸과 함께 연회의 여왕 후보로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누가 봐도 예쁘고 잘나가는 두 사람의 사이에 우울하게 선 내 모습이 눈에 선했다. 이건 아카데미에서 겪을 법한 제일 끔찍한 상황에 대해 카일과 실없이 떠들었을 때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재앙이었다. 드레스의 솔기가 뜯어진 것과는 차원이 다른 창피를 당할 것이었다.
브레넌은 나와 카일과 리즈와 마지못해 브리아나에게도 슬라임 푸딩을 하나씩 샀다. 브리는 내가 수프 접시에 코를 박고 콱 죽으려고 하는 것을 곁눈질로 보다가 제 몫의 슬라임 푸딩을 나에게 건네었다.
나는 라모스와의 사건 때처럼 그것이 결코 그녀의 잘못이 될 수 없음을 확실히 말하고 카일의 푸딩을 강탈했다. 그가 소꿉친구가 빠진 무시무시한 함정에 슬픔은커녕 재미를 느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
도대체 누굴 닮았는지 몰라도 릴루는 아주 사고뭉치였다. 이 되바라진 고양이가 가장 잘하는 짓은 깜찍함으로 사람을 유혹해 놓고 갑자기 흉포하게 구는 것이었다.
이번에 릴루의 야멸찬 솜방망이 아래 희생당한 것은 험프리스 교수였다. 그녀는 귀여운 생물에 대한 은밀한 애정을 숨길 수가 없었는지, 평소의 점잖은 체를 집어치우고 콧김을 뿜으며 릴루를 안으려 들었다(함께 지나가던 모나한 교수는 릴루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의 심장은 마물에게만 반응하는 모양이었다.).
릴루는 험프리스 교수의 코를 때리고 어디론가 도망쳤다. 그녀가 제 주인의 졸업-유급 결정권을 쥐고 있는 것을 알아서인지 용케도 발톱은 세우지 않은 채였다.
나는 릴루의 총명함에 감탄하며 슬며시 올라가는 입꼬리를 잡아 눌렀다. 그러고는 험프리스 교수와 모나한 교수에게 대충 사과의 말을 웅얼거린 뒤 복도를 빠져나왔다.
밀루아인의 애완동물이 위치 추적용 마도구를 달고 있지 않다면 자존심이 상했다. 나는 정말 간단한 주문을 두 번 외워 릴루를 찾아냈다.
“릴루!”
“‘릴루’?”
놀랍게도 릴루는 혼자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