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22화 (22/178)

“이게 브라이스를 해치려고 했거든.”

라모스는 발치에 나뒹굴던 마법 인형의 잔해에 거칠게 침을 뱉었다.

“인형이었다니, 젠장. 어쩐지 너무 끈질기더라.”

“해치려고 했다는 게… 잠깐, 아카데미에서?”

“못할 게 뭐 있어? 없었던 일도 아닌데.”

라모스가 아연실색하여 떨어트린 내 턱을 검지와 중지로 가볍게 받치며 신경질적인 웃음소리를 냈다. 미간은 구겨진 채였으며 뾰족한 송곳니가 드러났다.

“내 형제 중 둘은 여기서 죽었어. 큰누나의 짓이었지. 큰누나는 졸업 후 귀국하자마자 셋째 누나와 차를 마셨다가 불구가 됐고.”

라모스는 손날을 세워 어깨 쪽에 대고 내리긋는 시늉을 했다.

“팔 두 짝이 전부 여기까지 썩었거든. 도대체 뭘 탄 건지 아직도 궁금하다니까.”

“하지만 가족인데….”

“오히려 가족이 아니고서야 누가 그러겠어? 뺏을 게 없는데.”

이번에는 양손을 머리 위로 올려 왕관 모양을 만들었다.

“네 말은, 그러니까, 후계 싸움이라는 거야? 나돈의?”

“켈란은 참 다행이지.”

라모스가 발끝으로 마법 회로의 조각을 짓이기며 빈정거렸다. 라모스의 말대로 케이틀린 대제의 비호를 받아 그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그럴 명분을 가진 이가 전무한 켈란 일레스티아는 같은 핏줄을 타고난 칼날에 목이 잘릴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퀴즈 볼턴은 매일같이 일레스티아의 머리맡을 지켰다. 볼턴에게는 확실히 그의 주군을 과잉보호하는 면이 있었으나, 이유가 그것만은 아닐 것이었다.

1학년 때 일레스티아는 누군가 기미하기 전엔 스푼을 들지 않았었다고 했다. 웃음거리로 소비되곤 하는 이야기였지만, 지고의 자리에 오른다는 건 그런 거였다.

새벽의 피츠시몬스는 끔찍한 꼴로 널브러진 마법 인형과 쪼그려 앉아 그것을 뒤적이는 라모스만 빼면 아주 평화로웠다. 아득하게 우는 풀벌레 소리와 차가운 공기에 덤불이 흔들리며 나뭇잎이 서로 비벼지는 소리가 침묵보다도 고요했다.

타고나기를 마법사인 라모스의 움직임에 이끌려 급류라도 탄 듯이 일렁이는 공기 중의 마나를 보고 있노라니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혹시, 네가 마력 조절 훈련을 받지 않았다는 게….”

“정답. 아주 잘했어요.”

라모스는 검게 그을린 안구 같은 것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몸만 내 쪽으로 틀고 박수를 쳤다.

“마력 조절을 한다는 건 제어구를 쓴다는 거야. 나는 브라이스의 칼이잖아. 칼은 갈아야지. 무뎌지게 하는 게 아니라.”

“그래도 너무 위험한데….”

“뭐, 적어도 브라이스가 위험할 일은 없을 테니까.”

“그래서 방을 따로 쓰는 거야?”

“그것도 있고, 겸사겸사. 브라이스한테는 약간 그런 게 있거든. 자유로운 삶에 대한 동경?”

‘그래서 걔한테 눈이 돌아갔나?’ 라모스가 중얼거렸다. 아마도 블로썸을 말하는 것 같았다. 정말 브라이스 나돈이 에드가 라모스의 말대로 잘 관리된 왕궁의 장미 정원보다 저잣거리에 핀 들장미에 관심을 가진다면, 확실히 로즈마리 블로썸은 그가 열광하여 마땅할 이상형이긴 했다. 그만이 그녀에게 열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지만.

그러고 보니 라모스가 블로썸을 입에 올리는 방식이 부드럽지가 않았다. 의외였다. 블로썸이 결국 학생회 서기가 되기도 했고, 브라이스 나돈을 끼긴 했지만 즐겁게 어울리는 모습이 자주 보여 라모스도 그녀에게 애정을 가진 줄 알았는데.

“이것 좀 봐주겠어?”

문득 눈앞으로 뭔가 들이밀어졌다. 마법 인형의 동강난 팔뚝이었다. 라모스와 맞붙을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내열 옷감을 투박하게 꿴 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의 불꽃이 얼마나 강한지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지만.

“혹시 누가 보냈는지에 대한 단서가 될 수 없을까? 마과학이나 마도구 관련해서는 수업을 들은 적이 없어서 도저히 모르겠네.”

마법 인형에 대해서는, 내가 말할 수 있는 게 별로 많지 않았다. 그리 전문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 말고는. 일반적인 마법 인형이 목재로 제작되는 건 맞았지만, 최근 밀루아의 가장 뛰어난 장인들 사이에서는 다른 재료에 숨결을 불어넣는 방법이 알음알음 퍼지고 있었다.

값비싼 내열 옷감으로 떡칠을 해 놓고도 불에 강한 도자기나 석재를 사용하지 않은 건 확실히 밀루아의 방식은 아니었다. 그의 형제로부터의 선물이 맞기는 했나 보다.

그러나 그 정도는 마과학에 문외한인 라모스로서도 충분히 추측해 낼 수 있었으므로, 나는 빠르게 눈으로 바닥을 훑기 시작했다. 그 이상의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서라면 팔뚝 같은 걸 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다행히 찾던 것은 금방 발견되었다. 나는 작은 휘파람으로 라모스의 주의를 끌었다.

“마법 회로는 동력원이 되는 마나 코어를 기준으로 처음과 끝이 이어진 폐회로 형태를 기본으로 해. 설계가 복잡해질수록 코어의 힘도 떨어지고 위치를 확인하기도 어려워서, 반드시 마나를 사용한 설계자의 서명을 근처에 남겨야만 하지.”

“어… 본론만 말해 주면 안 될까?”

늘어지는 설명에 라모스가 머쓱한 듯 뒷목을 긁적였다. 관련 수업을 들은 적이 없다는 말은 사실인 듯했다. 하긴 넘치는 마력으로 따낼 학점이 충분한데 굳이 생소한 분야를 공부할 필요가 있을까. 세상은 참 불공평했다.

“네 공격으로 마나 코어는 터졌겠지만, 회로의 시작부를 찾는다면 설계자의 서명도 찾을 수 있어.”

바짝 깎인 잔디 사이로 불쑥 튀어나온 잡초에 마법 회로 조각이 걸린 것을 가리켰다. 코어가 터지기 전에 공급되던 마나가 아직 남은 모양인지 다른 것들보다 약간 더 푸른빛이 돌았다. 중간쯤에는 괴상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알아보겠어?”

“음, 놀라울 건 없네. 도니는 우리 여덟 남매 중 제일 괴짜거든. 나돈의 암살자가 마법 인형이라니, 확실히 의외성이 있잖아.”

나는 라모스의 일말의 감흥도 없어 보이는 표정에서 그가 평소에는 인형이 아닌 암살자를 불태운다는 사실을 유추해 내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눈을 돌렸다.

“조작할 수는 없어? 그, 서명이란 거 말이야.”

“불가능해. 원하는 서명이 있다고 해서 그걸 남길 수 있는 구조가 아니거든.”

마법 회로에 남기는 서명은 항상 설계자의 소중한 것과 관련된 무언가였으며 노력한다고 해서 그것의 형태를 바꿀 수는 없었다. 라모스의 형제 ‘도니’는 그것을 어떤 문양으로 나타냈다지만, 사실 서명의 종류는 매우 다양했다.

나 같은 경우에는 ‘알리사’와 ‘로한’이라는 글씨가 남았다. 부모님의 이름이었다. 카일의 경우에는 낡은 회중시계를 그린 그림이었는데, 그건 그의 미들네임이자 그가 가장 좋아하던 선대 빌라드 백작, 다미앙 할아버지가 그에게 남긴 유품이었다.

그렇게 말하자, 라모스는 조금 입이 써진 듯했다. 그가 느끼기로 ‘도니’는 기질이 순하고 권력욕이 없으며 브라이스와의 사이도 원만했기 때문에 그가 죽기를 바라는 사람 목록의 가장 끄트머리에 있었다고 했다.

“아, 그건 놔 둬. 메이브가 알아서 할 거야.”

상황이 정리되었다는 판단 하에 처참한 몰골의 마법 인형을 안 보이는 곳으로 치우기 시작한 나에게 라모스가 대뜸 말했다.

“메이브? 미스 프록터?”

“우리 쪽 그림자야. 이런 거 수습하는 데는 달인이거든.”

“미스 프록터가 나돈의 그림자라고? 점술 시간 강사인?”

“몇 번을 말해?”

라모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야말로 눈이 튀어나올 만큼 놀랐다.

“그런 걸 막 말해 줘도 돼? 그러니까, 첩자 같은 거잖아.”

“첩자가 메이브만 있는 것도 아니고. 메이브가 진짜 ‘메이브 프록터’인 것도 아니고. 나돈만 첩자를 파견한 것도 아닐 테고. 아마 일레스티아가 더할걸.”

“점술 수업은 평가도 되게 좋았는데!”

“그게 또 재미있는 점이지. 메이브는 점술 같은 건 하나도 모르거든.”

맙소사, 커크패트릭의 족보가 엉망이었던 까닭을 이런 데서 알게 될 줄이야! 기함하여 말을 잃은 나를 보며 라모스가 낄낄거렸다. 그는 나를 ‘순진한 아리’라며 놀려 댔는데, 남의 애칭으로 별명을 짓는 행태에 대해 따지자 뻔뻔스럽게도 이제 이럴 사이는 되지 않았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피츠시몬스 타임즈에 따르면 나는 너에게 구애하는 입장이잖아.’ 라모스가 말했다. ‘피츠시몬스 타임즈에 따르면 나는 너에게 철벽을 치는 입장이지.’ 내가 대꾸하자, 그는 어쩌면 그렇게 져 주는 법이 없냐며 투덜거렸다.

내가 극구 사양을 하건 말건, 주색잡기로 아카데미의 정상에 오른 에드가 라모스로서는 나를 꼭 기숙사까지 데려다줘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었다.

가는 길에 손등에 피가 비치는 것이 보여 손수건을 감아 줬더니만(카일과 있었던 일 이후로 나는 잠옷 주머니에도 손수건을 넣어 다니곤 했다.), 그는 모든 도움에 대한 보답이랍시고 그와 나돈에 대한 아주 치명적인 비밀을 알려 주겠노라고 했다.

“네 치명적인 비밀을 신문부 말고 누가 알고 싶어 한다고 그래?”

“그러지 말고 들어봐, 재밌을 거야.”

라모스가 비굴하게 말했다. 나는 거만하게 턱을 까딱였다. 어디 한번 해 보라는 뜻이었다.

그러자 그가 꺼낸 것은 내가 예상했던 그 어떤 것보다 더 치명적인 비밀이었다.

“브라이스는 왕위 계승권자로서 공식 행사에 참석한 적이 없어. 난 있지만.”

“뭐, 그치만, 너는….”

“계승권을 포기했지. 나도 알아. 그래서 ‘라모스’잖아. 내 말은, 내가 대신한다는 거야. 브라이스를. 혹시 누가 걜 죽이려고 하면 어떡해.”

경악을 숨길 수가 없었다. 나는 라모스가 기껏해야 로즈마리 블로썸에 대한 감춰 둔 마음을 고백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 너는 어쩌고? 그러니까, 걔가 죽을지도 모르는 장소에 대신 간다는 건, 네가 죽을 수도 있다는 거잖아.”

“칼이 부러진다고 해서 누가 애도를 하겠어?”

라모스에게는 무거운 말을 가볍게 꺼내는 재주가 있었다. 도구로서 취급받는 데에 아주 익숙해진 것 같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나돈과 라모스는 똑같이 생겼고, 키도 같았다. 성격과 성적도 거의 비슷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은 왕이 될지도 몰랐고, 다른 사람은 왕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죽을지도 몰랐다. 끔찍한 이야기였다.

미스 프록터의 정체도 그렇고, 그런 중요한 것을 내가 알아도 정말 아무 문제가 없는 거냐고 묻자 라모스는 짧게 웃었다. 어차피 두 사람을 구별할 수 있는데, 바로 들킬 것을 숨겨 봐야 무슨 소용이냐는 거였다.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외국인인 내가 나돈의 왕위 계승권자가 참석하는 행사를 보게 될 확률이 전무해서 그렇지.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실은 그냥 누구에게든 털어놓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었다. 스스로의 불행에 대해.

불행은 선로에 놓인 돌과 같아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삶의 궤도를 완전히 틀어 놓기 마련이었다. 혼자 끌어안고 있어 봐야 상처에 물이나 주는 꼴이었다.

행복을 나누면 배가되고 불행을 나누면 반이 된다고 했는데, 나는 누군가의 행복에 대해 들으면 대부분의 경우 배가되는 게 아니라 배가 아팠다. 하지만 이번만은 라모스의 불행이 나로 인해 반이 되었기를 바랐다.

라모스와 나란히 걷는 동안 그를 조금이나마 행복하게 할 만한 서너 가지의 쑥스러운 말을 떠올렸다. 나는 분위기가 진지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편이었으므로, 그것들을 혀 위에 올리기 위해서는 상당한 결심을 필요로 했다.

그러는 동안 우리의 목적지인 여자 기숙사 건물은 거의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가 되었다. 더는 지체할 수가 없어서 고개를 들어 라모스를 봤는데, 문득 그의 어깨 너머에서 수상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별들 사이로 짧고 삐뚤빼뚤한 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것은 두께가 일정하지 않은 검은색이었는데, 마치 누군가 하늘을 찢고 잡아 벌려 검은 속살이 드러난 것처럼 보였다. 내가 가리키는 쪽을 잠시 보고, 라모스는 대수롭잖게 말했다.

“마녀의 길인가?”

대륙의 역사를 거슬러 보았을 때 마녀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흑마술과 저주에 능했으며 관을 쓴 자들의 권력을 위협할 정도로 강력했기 때문에 사악한 존재로 여겨졌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나고 대부분의 인간들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어도 스스로 마녀입네 하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으며, 그들이 대륙의 아주 깊은 곳에 숨어 복수를 꿈꾸고 있다는 이야기만이 구전되어질 뿐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마녀가 되기 위해서는 마법사와는 다르게 상당한 운과 노력을 필요로 했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마녀의 길’이었다. 대륙의 어떤 곳에는 아주 드물게 마녀의 은신처로 향하는 길이 열리는데, 거기에 발을 들여 백 걸음을 걷는 순간 그 사람은 마녀가 되어 힘을 얻는 대신 머리가 세고 콧등과 허리가 구부러지며 끝없는 증오에 사로잡히고 만다는 것이었다.

근데 그렇다고는 해도 그건 그냥 전설이었다. 마녀와 관련된 물건들은 그것이 가지는 상징성으로 인해 항상 수요가 많은 편이었고 나는 미래의 상단주로서 그와 관련된 여러 정보들에 빠삭했는데, 누군가 ‘마녀의 길’ 너머로 사라졌다는 소문은 어디서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렇게 말했더니 라모스는 고개를 까딱였다. ‘그럼 나도 모르지.’ 그는 나와는 달리 그 속을 알 수 없이 어둡고 불길한 균열에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갑자기 엄청난 불안감이 엄습했다. 새까맣게 찢어진 하늘이 나를 삼켜 버리는 상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의아한 듯 쳐다보는 라모스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내 방을 향해 헐레벌떡 뛰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