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21화 (21/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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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란으로 바위를 친 이후로 무어 교수는 나에게 굉장한 감명을 받은 것 같았다. 그는 수업 도중에 학생들의 사기를 증진시켜야 하는 순간이 오면 항상 일레스티아의 성기사와 검을 나누던 용감한 밀루아 소녀에 대해 이야기했다.

켄드라를 위시한 후배 여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걔네들은 그 볼턴과 대련을 했다는 것보다는 그 라모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는 점에서(그는 나를 유혹하려고 한 적도 없었다!) 나를 더 높게 치는 것 같았지만, 아무튼 그랬다.

나는 정작 무대에 올리면 낯을 가리는 편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관심은 전혀 달갑지 않았다. 그래서 검술 수업에 참여할 때면 가장 구석 자리에 서서는 무어 교수의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무어 교수는 그것을 영웅이 가져 마땅할 겸손 같은 거라고 여겼는지, 어쩌다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항상 입에 침이 마르게 나를 칭찬하며 전설의 장면을 재현하곤 했다.

즉 볼턴과 맞붙였다는 뜻이다.

오늘의 나는 민첩성이 부족했다. 볼턴의 검은 여전히 무자비했고. 그는 절대 아니라고 하지만 내 생각에 약간의 신성력을 사용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맞은 데가 이렇게 후끈거릴 수가 없었다.

“그것참 우아한 모습이구나.”

대련이라고 쓰고 아리엘 달튼 차력 쇼라고 읽는 것이 끝나자 무어 교수는 우리에게 약간의 휴식 시간을 주었다. 볼턴이 일말의 고민도 없이 바닥에 널브러진 나를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고마워. 네가 죽어라고 옆구리만 공격하지 않았으면 훨씬 우아할 수 있었을 텐데.”

“매번 말하지만 넌 그쪽에 빈틈이 너무 많아.”

비아냥과 함께 건네는 물통을 비우며 대꾸하자 볼턴은 득달같이 내 양손이 따로 논다는 둥, 대각선으로 벨 때 가슴팍이 너무 열려 있다는 둥 잔소리를 했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계단 400개를 오르내린 이래로 그는 우리가 어느 정도 친밀해졌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마르퀴즈 볼턴은 의외로 마음의 벽이 높은 만큼 허물면 바로 심장인 사람이었다. 그는 이제 복도나 식당, 교실에서 나를 만나면 짧은 신변잡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전하께서 잠을 못 주무셔.”

“왜? 일이 많아?”

“그것도 있고, 개인적인 이유도 있는 것 같고. 원래 얕게 잠드는 분이긴 하지만.”

충성스러운 볼턴은 일레스티아의 신변을 보호해야 한다는 이유로 그와 같은 방을 썼다. 나는 자꾸 뒤척이는 일레스티아와 그의 침댓가에서 갑옷을 입고 검을 찬 채 보초를 서는 볼턴을 상상했다.

그는 일레스티아 대신전에서 차기 교황 후보로 추대되는 신관이었으므로 케이틀린 대제의 피를 이어받은 일레스티아보다도 강한 신성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신성력의 가장 큰 특징은 빛이 난다는 거여서, 아마 전투태세를 완전히 갖춘 그는 움직이는 조명 같을 거였다.

“네가 자나 안 자나 계속 지켜보고 있으니까 부담스러워서 그런 거 아냐?”

“황족은 그게 일상이야. 새삼스럽게.”

내가 제시한 새로운 가능성을 볼턴은 불쾌하다는 듯이 튕겨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일레스티아가 걱정됐다. 그가 제 상태가 아니면 <패치 노트>의 해독은 제자리걸음일 텐데.

만티코어의 발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이라고는 했지만 사실 스스로 느끼기로 나는 잘 훈련된 만티코어만 못했다. 인육을 즐기지 않는다는 것이 내가 내세울 유일한 장점이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머리를 맞대고 궁리한 바 <패치 노트>는, 만일 상단에 쓰인 것이 날짜가 맞고 내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면, 일부의 예외를 배제하고는 일정한 주기로 기록되었다. 단, 전에 발견했던 찢어진 페이지 근처에서 비정상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 다수의 기록이 있었는데, 최근 일레스티아는 거기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는 찢어진 페이지를 기준으로 대충 십여 개의 페이지가 특정한 문장을 공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러 번 쓰인 만큼 상당히 중요한 내용임이 틀림없어서, 일레스티아는 다른 것은 제쳐 두고 그것을 우선으로 해독하기로 했다.

“큰일이네.”

내가 심각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볼턴이 코웃음을 쳤다.

“네가 왜 큰일이야? 정말 둘이 만나기라도 해?”

“어떻게 사고가 그리로 튀어? 밀루아 자작가 영애는 대 일레스티아 제국 황태자의 안위도 못 챙긴다 이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서 그런다. 그렇게 사적인 명령은 내린 적이 없는 분인데.”

“무슨 명령? 네가 날 내다 버리는 바람에 성사되지 않은 파트너 건?”

“넌, 꼭 그렇게…!”

볼턴의 새하얀 얼굴에는 금방 피가 몰렸다. 이렇게 보면 참 숨김이 없는 자식인데, 도대체 어느 동네에서 ‘철혈의 귀공자’로 불리는 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있잖아, 볼턴. 네가 지금 연애사업에 한창이라 뇌가 거기에 절여진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너희 전하까지 도매금으로 취급은 말아 주라.”

“내가 언제!”

“그보다 네 연애사업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저번에 내가 추천한 가게는 갔다 왔어?”

나는 충동을 참지 못하고 볼턴의 블로썸에 대한 순정을 딱 한 번 놀린 죄로 그의 연애 상담사가 되고 말았다. 만일 누군가가 로즈마리 블로썸과 잘되는 것을 꼭 응원해야 한다면 그건 나의 소중한 친구 카일이 되어야 마땅하겠지만, 그가 내 생각보다 훨씬 낭만적인 방면에 재능이 없었으므로 약간의 도움은 문제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내 물음에 볼턴이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직접 계산대까지 가서 주문해야 하는 것을 몰라서 보다 못한 점원이 찾아올 때까지 앉아 있었던 것이 후회된다고 했다.

“너무 귀족스러워 보이지는 않았을까?”

“그랬겠지. 하지만 넌 귀족이잖아. 귀족이 귀족스러운 게 무슨 문제야?”

“로즈마리는 평민이잖아. 그녀가 거리감을 느끼게 하고 싶지는 않아.”

“대애단한 사랑꾼 나셨네.”

나도 모르게 입가가 씰룩거렸다. 볼턴은 내가 웃음을 참는 걸 보더니 아까보다 훨씬 시뻘개져서는 발을 크게 울리며 등을 돌렸다. 덕분에 무어 교수를 포함한 훈련장의 모든 사람이 칠칠치 못하게 드러누운 달튼의 말괄량이를 목격하고 말았다. 나는 과장스럽게 몸을 일으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이 어떤 근육이완 운동의 연속동작처럼 보이기를 바랐다.

케이틀린 대제의 비밀의 방은 언제 와도 기분이 좋았다. 바라만 봐도 흐뭇하게 잘생긴 켈란 일레스티아가 거기에 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문득 너무 오랫동안 미지의 글자를 눈에 담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시력의 증진을 위해 일레스티아가 앉은 건너편을 흘끗 보았다.

놀랍게도, 그는 턱을 괸 채로 꾸벅거리고 있었다. 볼턴이 말하기를 요새 뜬눈으로 밤을 지샌다 하더니,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서 지금 졸고 있는 거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이 방의 신기할 정도로 안락한 분위기가 그의 눈꺼풀을 무겁게 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무튼 잠들지 못한다던 일레스티아에게는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어, 굳이 그를 깨우지 않기로 했다. 아직 되돌아온 시점에서 한 달밖에 흐르지 않았으므로 우리에게는 앞으로 시간이 많았다.

벽난로에서 쏘아지는 붉은 빛이 일레스티아의 밝은 금발과 속눈썹에 드리웠다. 예술적인 각도로 꺾인 콧대와 우묵하게 패인 눈썹뼈 아래의 공간이 그의 성스러운 이목구비에 극적인 그림자를 만들었다.

아카데미에 일레스티아의 먼 조상이 엘프라는 이야기가 돌았던 적이 있었다. 확실히 설득력은 있지 않나 생각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부모님을 따라 많은 곳을 다니곤 하였으므로 정말 다양한 외모를 봐 왔는데, 샐러맨더의 무지개 비늘에 맹세코 이 정도로 굉장한 얼굴은 찾을 수가 없었다.

사랑의 달 연회의 여왕이 항상 블로썸이었던 것처럼, 연회의 왕은 항상 켈란 일레스티아였다. 솔직히 그에게는 ‘왕’이라는 호칭도 아까웠다. 그는 거의 얼굴의 신이었다.

어느새 <패치 노트>는 뒷전으로 하고 일레스티아의 완벽한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기묘하게 빛나는 호박색 눈동자에서 조금의 위화감이 느껴졌으나, 맡은 일에 집중했다는 증거를 만들기 위해 잽싸게 펜을 집어 들고 종이에 꼬부랑 선을 그리는 중이었으므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윽고 일레스티아가 이렇게 말했다. 낯설고 이상한 표정을 지은 채였다.

“아리.”

그의 입술 사이에서 쏟아진 소리는 심장의 안쪽에서 긁어내기라도 한 듯이 깊었다. 소름이 쫙 끼쳤다. 거기에 아주 끔찍한 고통과 진한 그리움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아직 서로를 애칭은커녕 이름으로도 부르는 사이가 아니었다.

“‘아리’?”

속삭이듯 되물었더니, 일레스티아가 거침없이 팔을 뻗어왔다. 거리가 충분하지 않았던 탓에, 안타깝게 떨리는 손끝은 내 볼을 찌르고 떨어졌다.

곧 그가 아예 테이블에 무릎을 걸치고 몸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나는 일레스티아의 손이 마침내 내 고개를 감쌀 때까지 꼼짝도 할 수 없었는데, 그의 시선과 목소리에, 거기서 느껴지는 열기에 꽁꽁 묶이기라도 한 것 같았다.

긴장으로 팽팽하게 당겨진 침묵이 내 아랫배를 조였다. 일레스티아의 결 좋은 금발이 내 이마를 간지럽혔다. 코가 서로 맞닿았다. 그의 더운 숨이 내 인중을 쓸어내렸고, 광대뼈쯤으로 뭐가 떨어져 흐르는 것이 어렴풋 느껴졌다. 눈물이었다.

“왜, 왜 그래?”

“내 잘못이야, 아리. 난….”

일레스티아의 황태자가 아이처럼 훌쩍이는 모습에는 아무리 뻔뻔한 것이 장점인 나라도 당황을 감출 길이 없었다. 손을 들어 눈물을 훔치고 나서 손수건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가 내 손목을 쥐고 거기에 하염없이 입을 맞춰 댔으므로 그럴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일레스티아가 9개월이 다섯 번 반복되는 동안 나에게 죄를 저지른 적이 있던가를 곱씹어 봤는데, 블로썸을 가운데에 두지 않은 이상 눈을 마주치지조차 않아 왔으므로 그럴 리는 없었다.

그가 나를 블로썸이나 다른 사람과 착각했을 가능성은? 로즈마리 블로썸은 어떻게 줄여도 ‘아리’가 될 수 없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내가 알기로 우리 학년에서 ‘아리’라는 애칭을 쓰는 것은 나뿐이었다.

아니면 설마 우리에게 기억하지 못하는 무언가라도 있다는 말인가?

내가, 여섯 번째 아리엘 달튼이, 아닐 수도 있나?

허겁지겁 매달려 오는 일레스티아의 잔뜩 옹송그려 뼈마저 만져지는 등을 어설프게 쓰다듬다가, 불현듯 높은 곡면 천장을 남김없이 밝히는 샹들리에가 눈에 들어왔다. 이 방에 발을 들이던 때부터 크리스털 장식의 커팅이 지나치게 내 취향이라고 느낀.

그러고 보니까 테이블 러너에 수놓인 것은 밀루아 소수 민족의 전통 문양이었다. 자연스러운 멋을 살린 통나무 벤치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솔향이 났다.

다른 감각 기관을 거치지 않고 의식을 곧바로 찌르는 것이 있었다. 나는 과거이자 미래의 어느 순간에 켈란 일레스티아와 함께했었다. 바로 여기서.

***

이제 밤을 지새우는 건 내가 되었다. 나는 새로이 얻게 된 깨달음에 시달리느라고 어둠이 깊어지도록 잠들지 못했다. 그렇게나 절실하게 굴던 일레스티아의 태도가 별안간 손바닥 뒤집듯 바뀌어 버리는 바람에 더욱 그랬다.

한참이나 눈물을 쏟아 내던 일레스티아는 갑자기 임계점에 다다르기라도 한 듯이 픽 쓰러졌다. 나는 어쩔 줄을 몰라 발을 구르다가 겨우 벤치 의자에 그를 눕혔다.

속으로 대충 삼백 정도를 세었을 때쯤 그는 정신을 차렸는데, 열기가 남은 눈두덩이를 손등으로 누르며 묻는다는 게 자기가 잠깐 졸았냐는 거였다. 말하는 투가 너무 심상해서 거짓말은 아닌 듯했다.

나는 그가 잠에 들었지만, 깼고, 울었고, 나를 ‘아리’라고 불렀다는 것을 되짚어 줄까 하다가 말았다. 그 모든 난리를 ‘잠깐 졸았다’고 표현하는 일레스티아에게 그것들은 엄청나게 신선한 수작처럼 들릴 것이었다.

완전한 줄만 알았던 나의 지나온 나날은 이제 오래 묵힌 치즈처럼 구멍 난 것이 되었다. 일레스티아 또한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게 분명했다. 헤어지기 전에 나는 그에게 ‘애덤 윌리’에 대해 물었다. 누가 귀에다 대고 속삭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 이름이 번뜩 떠올랐다고 했다.

내친김에 지난 다섯 번의 9개월에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 것들에 대해 에둘러서 말해 보았다. 대부분의 경우 생소하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대부분의 경우라 함은 거기에 속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는 거였다. 예를 들어 일레스티아는 카일이 작년 농담의 달 연회에 밴시 분장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4학년 때가 아니라 내가 세 번째로(사실 그건 이제 세 번째가 아닐 확률이 더 높았지만, 아무튼.) 5학년이 되었던 때였다. 그가 소맷부리에 숨기고 다닌 음성 기록 및 재생용 마도구에 그럴듯한 울음소리를 녹음해 준 것이 나여서 정확히 알았다.

내 기억에 구멍이 나 있다면 일레스티아의 기억은 뒤섞여 있었다. 오늘 만난 남자는 아마도 그의 엉망진창으로 꼬인 기억이 끄집어낸 존재인 듯했다. 케이틀린 대제의 비밀의 방에서 ‘아리’와 함께했을, 언젠가의 켈란 일레스티아. 눈물로 참회할 죄를 옹송그린 등에 진.

그게 누가 되었든 간에 지금의 나로서는 알지 못하는 일레스티아임은 틀림이 없었다. 내가 아는 일레스티아는 나나 다른 학생들뿐만 아니라 블로썸에게도 잘 그려 낸 듯한 표정을 자주 지었다. 그런데 그 순간만큼은… 글쎄, 그렇게 섬세한 그림은 유니콘의 갈기로 붓을 만든대도 그리지 못할 것이었다.

눈썹과 눈꼬리, 꿀을 녹여 바른 눈동자, 일그러진 입매에서 서로 다른 감정이 한꺼번에 느껴졌다. 환희와 애달픔과 분노와 안도감과 회한이, 뼈저리게.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바로잡아야 되는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애초에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일레스티아가 누구인지는 어떻게 알까.

막막해 죽겠어서 겉옷만 챙겨 입고 무작정 기숙사를 나왔다. 새벽의 공기는 마나의 함유량이 높고 흐름이 활발했으므로, 치즈를 양손에 쥔 고릴라의 뇌도 돌려줄는지 모를 일이었다.

기숙사 건물의 뒤쪽으로 돌아 광장을 끼고 이어진 길을 지날 때쯤이었다. 화단의 구석에 마나가 안개처럼 덮여 있었다. 수상해서 가까이 갔더니 사람 그림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손아귀에 다른 사람의 목줄기를 틀어쥐고 있었는데, 기세가 퍽 흉흉했다.

곧 마나의 안개를 뚫고 엄청나게 큰 불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어림잡아도 내 키의 두 배는 되는 높이였다.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가까스로 몇 발자국 뒷걸음질을 쳤는데, 실수로 기척을 내고 만 모양이었다.

눈이 마주쳤나 싶었다. 진득한 어둠과 두터운 마나를 비집고 기어 나온 살기에 발목이 붙들렸다. 선뜩한 기운이 발뒤꿈치에서부터 정수리까지 나를 관통했다. 공포가 심장을 옥죈 찰나였다.

“뭐야, 너였어?”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태평한 목소리였다. 주춤거리며 근처로 가자, 에드가 라모스는 반갑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손바닥이나 셔츠에 새까만 재가 묻어 더러웠다.

사람은 불에 태운다 한들 재가 되지 않았다.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철심이 박힌 원통형 물체가 타다 만 흔적과 엄청 복잡한 마법 회로의 조각이 그가 선 바닥의 여기저기에 흐트러져 있었다.

마법 인형의 동작을 위해 구축된 회로는 대개 보안을 위해 인형의 파괴와 동시에 지워지도록 되어 있었다. 라모스가 상대한 인형에게는, 아마도 절명을 인지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새삼 그가 굉장한 마법사라는 것이 실감났다. 실습용 마도구 보관실에서 했던 말마따나, 이 정도의 힘을 쏟아부었다가는 문짝을 부수기 전에 내가 구워졌을 것이었다.

“뭘 한 거야?”

나는 최대한 겁먹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땀에 젖어 이마를 거의 덮은 밀색 앞머리 아래 적자색 눈동자는 전투의 흥분이 남아 더욱 붉게 보였는데, 동공이 확장되어 사나운 짐승 같은 분위기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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