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20화 (20/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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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으로 향하는 복도에 어제까지만 해도 없던 게시판과 간이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다가가서 보니 그것은 사랑의 달 연회에서 5학년을 대상으로 선출할 연회의 왕과 여왕 후보를 추천받는 투표함이었다.

너무 일렀다. 사랑의 달 연회 기간은 5월 중순이었으므로 빠르면 4월 중순, 늦으면 4월 말 쯤에 후보를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거기에 의문을 가지려니, 배식을 담당한 마법 인형 몰래 칠면조 구이를 더 챙기던 카일이 브라이스 나돈이 어지간히도 로즈마리 블로썸을 여왕으로 만들고 싶었던 모양이라고 비아냥댔다.

잠깐 생각하다가 수긍했다. 5학년 여학생 중 여왕으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은 아나이스 오브라이언인데, 그녀는 입학 이래 외모와 인기로 유명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므로 이변이 없는 이상 무난하게 관을 차지할 확률이 높았다.

로즈마리 블로썸은 올해에나 아카데미에 얼굴을 비춘 전학생이었기 때문에, 아나이스 오브라이언보다는 그런 면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했다. 그래서 연회의 준비와 진행을 주관하는 학생회의 나돈은, 후보 등록 및 투표 기간을 늘림으로써, 블로썸의 매력이 더 많은 학생들에게 노출될 기회를 늘리려는 것 같았다.

나는 혀를 내둘렀다. 평범하게 진행된 지난 다섯 번의 연회에서도 여왕은 항상 블로썸이었다. 아나이스 오브라이언에게 무슨 흠결이 있거나 한 건 아니었고, 그냥 로즈마리 블로썸의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 그리고 귀족이 아닌 특례 입학생으로서 가지는 상징성이 박힌 돌을 빼낼 정도로 빛났기 때문이다.

가만 두면 충분히 원하는 대로 될 것을, 나돈은 본인의 평판마저 깎아 가면서 블로썸의 편의를 봐주었다. 카일의 말대로 어지간히도 푹 빠졌나 보았다.

아니면 학생회 일원으로서 그녀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한 선택일 수도 있었다. 열흘가량 늦기야 했지만 블로썸은 이번에도 학생회의 서기가 되었다. 당연한 수순으로 평민인 그녀가 피츠시몬스의 푸른 피 중에도 가장 고귀한 피만이 모인 학생회에 합당한지에 대한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와중이었다.

연회의 여왕은 확실히 명예로운 자리였고 선출만 된다면 여론은 잠잠해질 것이었다. 줄곧 그래 왔다.

아무튼 나와는 별 관련 없는 일이었다. 내게 중요한 건 연회를 위해 올 초부터 준비한 드레스가 얼마나 튼튼하게 제작되었냐는 것뿐이었다.

내가 첫 번째 아리엘 달튼이던 시절, 제대로 꿰매지지 않은 드레스로 인해 만천하에 등짝을 내보이는 참사가 벌어졌었다. 하필이면 사랑의 달 연회 때였다.

누군가 재빨리 마법 잉크로 그 장면을 그려 놓은 탓에(크리스타 에드워즈임을 확신한다. 증거는 없지만.), 피츠시몬스 타임즈에 박제되어 두고두고 창피를 당하기도 했다.

5월에 있는 사랑의 달 연회와 12월에 있는 졸업 연회는 피츠시몬스에서 거의 다달이 열리는 연회들 가운데 가장 특별한 것으로 꼽히는 행사였다.

특히나 사랑의 달 연회는 테마가 ‘사랑’인 만큼 많은 학생들이 누가 자신의 잠재적 연인이며 미래의 배우자인지를 탐색하곤 하는 자리였던 것이다. 두 번째 연회부터는 문제를 미리 봉합하여 별문제가 없었다지만, 자칫하다가는 혼사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수도 있었으므로 긴장을 놓지 않는 편이 좋았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며 칠면조 구이를 물어뜯는데, 별안간 나와 마주 보고 앉은 카일의 옆자리에 식판 하나가 내려앉았다.

“브레넌? 리즈는 어디다 두고 너 혼자야?”

“진로 상담. 오래 걸릴 것 같다고 먼저 먹으래.”

엘리자베스 맥카시와 뜨거운 연애 중인 브레넌 스톡스가 주머니를 노리고 달려드는 레프러컨을 쳐내고 말했다.

맥카시 백작가는 영지 경영 이외에 이렇다 할 사업을 하는 것이 없었다. 장자인 것도 아닌 리즈가 가문을 물려받을 일도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나나 일부 학생들과 달리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해야만 했다.

“걔 마법에 재능 있잖아. 마탑으로 안 간대?”

“밀루아에서 암만 재능 있어 봐야 나돈이랑 일레스티아 아무 동네에나 사는 열 살 배기만도 못해, 알잖아.”

브레넌이 음울하게 말했다. 우리는 셋 다 밀루아 출신이었으므로 차마 거기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아무튼, 내가 굳이 식당까지 너희를 찾아온 건 다 이유가 있어서야.”

“같이 밥 먹을 친구가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넌 줄 아냐, 아리엘.”

나는 방정맞게 웃는 카일의 주둥이를 칠면조 구이로 틀어막았다. 브레넌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고는 우리를 가까이 불러 모았다. 세 개의 머리통이 테이블 가운데에서 만났다.

“나, 사랑의 달 연회 때 리즈한테 청혼하려고.”

“헉, 진짜? 어떻게?”

“그걸 모르겠으니까 이러고 있는 거 아냐. 뭐 좋은 방법 없을까? 아리엘 달튼, 카일 빌라드 하면 창의력이잖아. 소중한 칠면조 구이를 바칠 테니까 생각 좀 해 봐.”

고작 조류의 다리통으로 나와 카일에게 그럴듯한 청혼 방법을 뜯어내고자 하는 브레넌의 심보가 괘씸했다. 나는 그가 건네는 칠면조 구이 반쪽을 내 식판으로 옮겨 담으며 브레넌을 흘겨봤다.

“청혼도 혼자 못 하면서 무슨 결혼이야?”

말이야 뾰족하게 나왔지만 내 머리는 이미 어떤 방식의 청혼이 엘리자베스 맥카시를 가장 감동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궁리로 가득 차 있었다. 심각하게 턱을 쓰다듬는 카일 역시 비슷한 듯했다.

대륙 전쟁 이전에야 데뷔탕트가 열두 살, 결혼 적령기가 열여섯, 이랬다고는 하지만 요새는 스물은 되어야지 가정을 책임질 준비가 되었다고 보았다. 그래도 열아홉이면 밀루아 사교계에서는 약혼이나 결혼을 하기에 아예 무리가 있는 나이는 아니었다.

브레넌 스톡스와 엘리자베스 맥카시는 내가 아는 가장 완벽한 연인이었고 나는 두 사람을 아주 좋아했으므로, 가능하면 도움이 되어 주고 싶었다.

“생각해 본 건 있는데 말이야. 광장 같은 데서 청혼가를 부른다거나. 사실 이미 가사도 써 놨거든. 내가 또 시인이잖아.”

“맙소사, 브레넌 스톡스. 네가 청혼을 혼자 못 하는 사람이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이미 공개 고백이 얼마나 끔찍한지 아는 바가 있는 내가 경악을 했다. 거기다 직접 쓴 노래라니! 브레넌이 노래를 얼마나 잘 부르는진 모르겠지만 그런 건 목소리로 사람을 홀린다는 세이렌이 한대도 사양이었다.

“너 앞으로는 엘리자베스한테 편지 보낼 때도 우리한테 물어보고 해라.”

카일은 칠면조의 뼈를 브레넌 쪽으로 집어 던지며 엄숙하게 말했다. 우리가 보인 부정적인 반응에 브레넌은 되게 시무룩해졌다. 나는 그를 위로하기 위하여 재빨리 머릿속을 뒤졌다. 리즈가 자신의 낭만 같은 것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던가? 다행히 나는 그녀와 거의 10년 가까이 우정을 쌓아 왔으므로, 한 번쯤은 그런 종류의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 분명했다.

“마력선!”

마침내, 나는 브레넌에게 도움이 될 만한 기억을 떠올려 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과거의 일이었다.

나돈의 쌍둥이가 블로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거대한 마력선을 빌려 연회를 열었다. 나는 카일과 함께 연회장에 술을 반입하려다 쫓겨났던 터라 나중에 리즈에게 마력선에서의 연회가 어땠는지 물어봤었는데, 그녀는 꿈을 꾸는 듯한 눈을 하고 이렇게 대답했다. ‘완벽했어.’

“마력선?”

카일이 여상스럽지 않게 물었다. 브레넌의 얼굴에도 물음표가 가득했다.

“그래, 마력선. 마력선을 빌리는 거야. 별이 빛나는 하늘 위에서 저녁도 먹고, 원한다면 네가 쓴 시도 읊고, 대신 노래는 말았으면 좋겠는데, 아무튼 낭만적이잖아.”

“낭만적이긴 한데, 돈이 어디서 나서 마력선을 빌려?”

브레넌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밀루아 변경의 남작가 출신이었으므로 형편이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연회를 열 만큼 거대한 규모의 마력선을 빌리는 것이 아니더라도 그것이 그에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었다. 만일 아리엘 달튼처럼 멋지고, 착하고, 또 의리 있는 친구가 없다면 말이다!

“브레넌 스톡스, 앞으로 1년은 아침마다 내가 사는 곳으로 절해야 될 거다.”

나는 퍽 의기양양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너 내가 작년에 마법 자물쇠 팔아서 대박 났던 거 기억하지?”

“어떻게 기억을 못 해? 네가 나한테 원가의 다섯 배 받고 팔았잖아. 그렇게 못되게 장사하니까 패가망신을 하지.”

“그 못돼 처먹은 장사, 네가 하면 어떨 거 같아?”

그제야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를 깨달았는지, 브레넌의 눈에 감동의 물결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다음 주에 부모님이 오실 건데, 마법 자물쇠로 아마 궤짝 두 개는 채우셨을 거야. 내가 그거 원가만 받고 넘겨줄게.”

“오, 아리엘. 너는 내 여왕이야. 아나이스 오브라이언도, 로즈마리 블로썸도 네 고결함엔 비할 바가 못 돼.”

시인이라는 말이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갖은 시적인 표현을 들먹이며 나를 찬양하기 시작한 브레넌은 거의 신전이라도 세워서 기둥마다 내 모습을 조각할 기세였다. 카일은 브레넌이 감격하여 내 손을 잡자마자 자신이 마법 자물쇠의 못된 판매를 도와주겠노라고 말했는데, 나만이 그에게 칭송받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바다에 떨어져도 주둥이만 동동 뜰 카일 빌라드는 그야말로 엘프에게도 고기를 먹일 위인이었다. 브레넌은 이제 카일의 열렬한 신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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