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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덜터덜 연회장으로 향했다. 내 파트너가 나를 배신했다고 해서 내가 연회에 참석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던 탓이었다.
연회장 앞은 한산했다. 참석할 만한 사람들은 다 안에 있는 모양이었다. 문 틈 사이로 북적거리는 소리와 즐겁게 떠드는 소리,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걸 듣고 있자니 확실히 약간 망설여지긴 했다. 적어도 월시에게만은 내가 볼턴과 드레스를 맞춰 입고도 홀로 남은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가능하면 크리스타 에드워즈에게도.
그러나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왔으므로, 나에게는 가능한 모든 비난의 말을 상상하며 다가올 창피에 대비하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근데 아무리 힘을 써도 열릴 생각을 않는 것이 아닌가. 잘 보니 누군가의 커다란 손이 문짝을 붙잡고 있었다. 그것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용기사의 무뚝뚝한 얼굴이 나타났다.
“마르퀴즈는?”
“이미 입장했을걸, 로즈마리 블로썸하고.”
내가 낭만적인 음악과 낭만 그 자체로 가득한 문 너머를 턱짓하자 스펜서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갔다.
“왜?”
“그걸 알면 내가 이러고 있겠어?”
나는, 그러지 않으려고 했지만, 기분이 너무 엉망이었기 때문에 상관없는 사람에게 짜증을 내고 말았다. 스펜서는 내가 성질을 부리자 당황하여 주머니를 뒤졌다. 이내 그의 손아귀에서 마법처럼 달콤한 초콜릿 한 조각이 나왔다. 당은 사람을 찰나나마 행복하게 했으므로 스펜서의 선택은 매우 옳았다고 할 수 있었다.
“미안해.”
그래서 솔직하게 사과할 마음이 들었다. 스펜서는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는 뜻인 것 같았다. 그는 어깨 장식이 있는 베이지색 의복에 붉은 망토를 걸치고 있었는데, 가만 보니까 그것은 밀루아 왕실 기사단의 제복이었다.
일반적으로 파트너가 있는 사람은, 볼턴이 그랬듯이, 파트너와 의복을 맞추곤 하였으므로 기사단 제복 같은 것은 입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까 그의 가슴께가 허전했다. 나는 충동적으로 줄곧 쥐고 있던 볼턴의 부토니에를 거기에 달았다.
“너한테 훨씬 잘 어울리네.”
사실 붉은 망토와 청색 부토니에는 영 아니었지만 나는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그거 비싼 거야, 가져.’ 볼턴이 흠 잡지 못할 정도로 완벽하게 새하얀 깃털을 구하기 위해 피니건 거리의 액세서리 장인에게 얼마나 많은 금화를 찔러 주었던가.
제이든 스펜서는 내가 달아 준 마르퀴즈 볼턴의 부토니에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짓고 있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가 그것을 달가워하는지 아닌지 가늠할 수 없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그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뭘 찾느냐고 물으니 별 대꾸 없이 길가에 꾸며 놓은 화단 쪽으로 사라졌다. 그러고는 금방 돌아왔다. 이름 모를 들꽃 여러 송이와 함께였다. 도대체 어디다 박은 건지 몰라도 짧게 올려친 머리카락에 나뭇잎이 왕창 붙어 있었다.
나는 깔깔대며 웃었다. 머리에 나뭇잎을 얹은 채 손가락보다 가느다란 꽃을 소중하게 든 집채만 한 스펜서라니 너무 재밌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왜 웃어?”
그렇게 말하는 스펜서의 목소리는 드물게도 부루퉁하게 들렸다. 나는 그를 내 손이 닿게끔 수그리도록 한 다음에 그의 머리카락에 달라붙은 것들을 뭉텅이로 떼어 냈다. 나는 발돋움을 해도 그의 턱쯤에 겨우 닿았기 때문에 그는 허리를 굉장히 많이 굽혀야만 했다.
모든 조치가 끝나자, 그는 머쓱한 듯이 머리를 쓸어 올리고 나서 가져온 들꽃들을 팔찌 형태로 엮었다. 꼼질거리는 손끝이 의외로 야무졌다.
이내 스펜서가 만든 들꽃 코사지가 내 손목에 걸렸다. 과꽃, 델피늄, 백합만큼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수십 배는 더 감동적이었다. 보고 있자니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는데, 이걸 말해도 되나 싶어 스펜서의 눈치를 보았다.
그의 가라앉은 이끼색 눈에서는 아무것도 읽어 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말하기로 했다. 낯이 두꺼운 것은 내 장점이었으므로 고민은 길지 않았다.
“있잖아, 스펜서. 혹시 지금이라도 불쌍한 아리엘 달튼을 구제해 줄 생각이 있어?”
그러자 그가 지체 없이 내 손을 잡아 왔다. 학생회실에서 블라우스를 꼬집던 쑥맥답지 않게 퍽 강한 힘이었다.
***
자칫 재앙이 될 뻔했던 시작의 달 연회를 무사히 마치고 바로 주말이었다. 월시와의 약속을 위해 방을 나서던 브리아나가 문 밖에서 뭔가 발견한 모양인지 살짝 주춤했다. 그러더니 이내 침대에 누워 천장 무늬를 세고 있던 내 쪽을 돌아보고 말했다.
“아리엘, 네 ‘파트너’ 왔다.”
잔뜩 비꼬는 말투에, ‘파트너’를 강조했으므로, 나는 그녀가 말한 사람이 스펜서가 아닌 볼턴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 사랑하는 나의 친구 브리아나. 개의치 않는다면 그 자식에게 꺼지라고 해 주겠어?”
“들었지? 꺼지래.”
이를 악물고 말하는 브리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이내 매정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나는 문과 바닥 사이로 서성거리는 구두 그림자를 조금 보다가 다시 고개를 바로 했다. 갓 세탁한 이불에 감싸여 잠들 듯 말 듯한 상태를 즐기는 것은 내가 휴일에 하는 가장 좋아하는 일이었는데, ‘파트너’ 따위에게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갔는지 몰랐다. 잠들 듯 말 듯이 아니라 진짜 잠들었기 때문이다. 배가 고픈 정도를 가늠해 보면 한 시간쯤 지난 것 같았다. 옷을 대충 챙겨 입고 나가려는데, 문짝 근처에 편지 한 통이 있었다. 볼턴이 문틈으로 밀어 넣은 모양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읽어는 봤다. 아니나 다를까 구구절절한 반성문이었다. 자기도 자기가 왜 그렇게 한심한 짓을 저지른 건지 모르겠다고 했다. 스스로 뺨을 치고 싶다고도 했다. 장식이 많은 글씨 한 자마다 종이가 꾹꾹 눌려 있었기 때문에, 그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진심으로 반성한다고 해서 내가 그를 봐줘야 하는 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혀를 차며 문을 열었다. 그러자 복도 한쪽에 기대어 있던 볼턴이 부리나케 몸을 일으켰다.
“뭐야, 왜 아직 여기 있어?”
“음, 그러니까, 달튼….”
그가 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체면을 잃고 싶지는 않은데 나에게 매달리고도 싶어서 쩔쩔매는 것이 웃겼다. 그러고 보면 아무리 일레스티아의 성기사네 뭐네 해도 아직 열아홉이었다. 나는, 따지면, 다른 5학년 애들보다 되돌아간 다섯 번의 9개월만큼을 더 살았으므로 스무 살은 훌쩍 넘겼다고 봐도 되었다. 엄마나 매디가 들었다가는 드워프 키 재는 소리나 한다고 면박을 당했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문득 손아귀 속 볼턴의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자신의 뺨을 때리는 꼴을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으나, 그것보다 더 좋은 장난이 생각났다.
나는 볼턴의 사과 편지를 비행기 모양으로 접었다. 그리고 그것을 계단 아래로 집어 던졌다. 그의 애절함이 담긴 문장들이 굽이진 사각 나선형 계단 아래 기숙사 건물 로비로 떨어졌다. 볼턴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외쳤다.
“야, 너 뭐 해!”
그건 아마 그가 준비했을 체면 차리며 용서를 구하는 말 목록에는 없을 것이었다. 나는 누가 그것을 줍기라도 할세라 껑충껑충 뛰어 내려가는 볼턴의 긴 회색 머리가 나부끼는 것을 보며 폭소를 멈추지 못했다(볼턴은 원래 머리를 말 꼬리처럼 묶고 다녔지만, 오늘은 어쩐지 치장을 대충 한 상태였나 보았다. 그래서 1층 계단참에 도착할 때쯤에 그는 머리끈을 잃어버렸다.). 배가 당겨서 눈물이 날 때까지 웃었으니까 똑같은 짓을 네 번 정도 반복했다고 보면 되었다.
백여 개의 계단을 네 번이나 오르락내리락하면서도 주워 온 편지를 꿋꿋이 내 손에 쥐여 주는 볼턴의 성의가 가상해서 다섯 번째 비행기는 이륙하지 않았다. 그가 필사적으로 읊조리는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가 진짜일 가능성이 있기도 해서 그랬다.
내가 그의 파트너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처럼 굴 때 그의 상태는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이 아니었다. 그리고 볼턴을 그런 상태로 만든 것은 아마도 블로썸의 특정한 동작일 것이었다. 허공을 두드리는.
어떤 경지에 오른 마법사들은 진을 그리지 않고도 마법을 쓸 수 있다고 했다. 내가 알기로 로즈마리 블로썸은 그리 뛰어난 마법사가 아니었지만, 일레스티아와 볼턴의 태도가 바뀌기 직전에 블로썸이 꼭 그 동작을 취했던 것을 생각하면 확신할 수 없었다. 또 이상할 정도로 블로썸에게 구애되는 카일은 어떻단 말인가. 그는 자신이 그녀를 위해 존재한다고 말했다.
어쩌면 블로썸은 누군가를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주문을 알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다시금 그녀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현존하는 가장 강한 존재인 용도 다른 지적 생명체를 조종할 수는 없었다. 그런 건 신이나 가능했다.
끔찍스러운 레프러컨 축제 기간이 돌아왔다. 나와 같은 5학년에게는 진로 상담과 학부모 방문 기간이기도 했다. 내 진로는 너무나도 확고했기 때문에 험프리스 교수와의 면담에는 십 분도 필요가 없었다.
내가 오로지 졸업만을 위해 아카데미를 다니고 있다는 사실은 험프리스 교수도 익히 아는 바여서, 그녀는 나에게 기관들의 팸플릿을 내밀 마음조차 없는 것 같았다. 대신 우리는 다른 이야기를 했다.
“라모스가 최근에 재미있는 인터뷰를 했더구나.”
험프리스 교수는 재미의 조각조차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이렇게 말했다.
“덕분에 클리블랜드와 월시에게 명분이 생겼어.”
“말도 안 돼요! 그 인터뷰가 거짓말이라는 건 크리스타 에드워즈도 알고 있다고요! 걔는 그냥, 소문 때문에….”
“이유가 뭐가 됐든 라모스가 자백을 한 이상 클리블랜드나 월시를 처벌할 순 없단다.”
애초에 증거라고는 나와 라모스의 증언뿐인 상황에서 월시와 클리블랜드에게 만족스러운 벌이 내려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예 엮을 수조차 없을 줄은. 화가 나서 심장이 마구 뛰었다.
라모스가 굳이 어처구니없는 거짓 자백을 하게 된 이유가 뭔데. 다 그 자식들 때문이 아니던가.
근데 정작 그 자식들을 잡아넣지 못하는 이유가 라모스의 거짓 자백이라니, 머리로는 이해를 해도 도무지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라모스에게 최대한 약한 징계를 내리는 것뿐이구나.”
험프리스 교수가 퍽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나를 달랬다. 일단 공식적으로 실습용 마도구 보관실 감금 사건은 라모스가 범인인 것으로 종결되었으므로 그가 징계를 받는 것이 맞았지만, 통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세상만사 내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구나. 하긴 졸업할 때까지 사는 것도 제대로 못 하고 있는데.
나는 우울감과 패배감에 젖어 그녀의 사무실을 나왔다. 힘없이 걷는데, 문득 복도의 간이의자에 앉아 다리를 떨고 있던 사람이 나를 보고 몸을 일으켰다.
“아리엘, 왜 또 심통이 났어? 험프리스 교수님이 너더러 야생 마물 관리국이라도 넣어 보래?”
“카일? 너 상담했다고 하지 않았어?”
“했지. 오늘 훈련 없는 날이어서 너랑 점심 먹어 주려고.”
“훈련 없는 날이 아니라 훈련 빠지는 날이겠지.”
내가 빈정거리자 카일은 능청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나는 도대체 그가 어떻게 그리폰 크리켓 부에서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노먼 케이시가 어떻게 주장을 하고 있는지도.
“빨리 가자, 오늘 칠면조 구이 나온대.”
“9월도 아닌데 웬 칠면조? 그거 진짜 칠면조 맞아? 닭 아냐?”
“드워프 상인들이 수확의 달 연회 기간을 착각해서 잔뜩 들여왔다나 봐. 걔들은 날짜 개념이 좀 부족하잖아.”
“그러니까 진작에 햇빛 보면서 살았어야지.”
드워프족은 사시사철 땅 밑에서 살다 보니 날짜나 계절 감각을 잃는 경우가 허다했다. 아카데미에도 드워프 직원이 몇 있는데, 대개 여름이나 겨울에 급격하게 변하는 대륙의 기후를 견디질 못하고 그들의 동굴로 돌아갔기 때문에 반년 주기로 사람이 바뀌곤 했다.
카일과 나는 식당으로 향하는 내내 마도구 제작 실습을 담당하는 드와이어 교수가 작년에 입었던 괴상한 형태의 여름나기용 로브에 대해 이야기했다. 일반적인 로브에 옷감을 덧대어 꿰매고 옷감과 옷감 사이에 냉매 역할을 할 마나를 넣어 중간중간 동여맨 것으로, 그걸 입은 드와이어 교수는 엄청난 근육질 아기처럼 보였었다.
“올해도 입어 주시면 좋을 텐데. 농담의 달 연회에 분장하기 딱 좋을 것 같단 말이지.”
카일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나는 드와이어 교수의 로브를 입은 카일의 모습을 상상하고 웃다가 사레에 들렸다.
그가 내 등을 한참 두드리고 나서 우리의 대화 주제는 농담의 달 연회가 되었다. 연회가 있는 10월까지는 아직 멀었지만, 아카데미를 놀거나 놀리기 위해 다니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달 연회나 졸업 연회만큼 큰 행사였으므로 할 말이 많았다.
사실 나는 올해야말로 이마가 늘어난 험프리스 교수 분장을 하려고 했는데(사건에 책임이 있는 입장에서 3년이면 충분히 예를 다했다고 보았다.), 그녀가 아직 나에게 앙금이 남은 것 같아서 노선을 변경해야 했다.
카일은 메두사 분장을 하려고 그럴듯한 가짜 뱀을 스무 개나 사 뒀다고 했다. 꽤 괜찮은 생각인 것 같아서 그가 만일 드와이어 교수의 분장을 한다면 뱀은 내가 양도 받기로 합의를 봤다.
나는 마법에 서투르기 때문에 석화 주문 같은 건 외울 수 없었지만, 적당한 농도의 마비 가루를 뿌리고 다니면 실감나고 재미있을 거였다.
“‘적당한 농도’는 어느 정도야, 아리?”
“글쎄, 월시 거시기가 쪼그라들 정도?”
“아예 없애지 않으려면 정말 조금만 써야 되겠는걸.”
카일이 새끼손가락을 구부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그의 완벽한 표현력에 웃느라고 거의 정신을 잃을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