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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 날이 되면 기숙사는 항상 그렇듯이 분주해졌다. 학생들이 불러 온 사용인들이 제 고용주의 의복이며 구두, 액세서리를 들고 복도를 누비곤 했는데, 이들은 피츠시몬스의 계급을 따지지 않는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았으므로 어깨를 부딪칠 때마다 싸움이 벌어졌다.
내가 달튼의 말괄량이이던 시절 내 치장을 도와주던 사람은 유모인 매디였다. 그녀는 이제 거의 예순이었기 때문에 산을 넘고 물을 건너 피츠시몬스까지 오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볼턴이 보낸 드레스를 입고 입술연지만 바름으로써 모든 준비를 마쳤다.
브리는 공식적으로 귀족 취급을 받지 못했지만, 넘치는 자본으로 충성을 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이미 대여섯 명의 시중을 받고 있었다. 거울로 완벽하게 펴진 뒷머리를 확인하다가 문간에 선 나를 발견한 브리아나가 기함을 했다.
“아리엘 달튼! 너 거기서 한 걸음이라도 더 가면 절교할 줄 알아!”
이윽고 브리아나의 사용인들이 도망갈 수 없도록 나를 둘러싸고 침대에 앉혔다. 순식간에 목덜미와 가슴팍에 향유가 끼얹어졌다. 대충 발라 뭉텅이가 진 연지는 우악스러운 손길 아래 깨끗이 지워지고, 꽃을 빻아 기름에 갠 것이 볼과 입술에 발렸다. 누군가는 내 옷자락에 반짝거리는 가루를 뿌렸다. 그것은 광택이 있는 짙은 남색의 옷감 위에서 별처럼 빛나 마치 밤하늘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야무지게 땋아 올린 머리카락을 뒤통수에 고정하고 나니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되었다. 브리아나는 내가 오래 묵은 빨랫감마냥 축 처진 것을 보고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이래야 내 친구지.”
브리는 자신의 성취가 자랑스러운 듯했다. 나는 브리가 나를 ‘친구’라고 말해 준 게 자랑스러웠다. 그래서 우리는 다정스럽게 팔짱을 끼고 방을 나섰다.
여자 기숙사 건물 앞에서는 남학생들이 무리를 지어 구울처럼 서성거리고 있었다. 자신의 파트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브리를 브레넌에게 맡기고 볼턴의 모습을 찾았으나, 공작새처럼 차려입은 멀대는 코빼기도 비추질 않았다.
대신 아나이스 오브라이언의 손가방을 겨드랑이에 낀 에드가 라모스가 아는 체를 했다. 나는 잽싸게 그에게 다가가 정강이를 발로 깠다. 학생용 단화를 신고도 스텝이 엉키는 나를 위해 볼턴이 엄선한 구두는 굽이 낮은 대신에 매우 화려했다. 뾰족한 앞코에 보석이 빼곡하게 박혀 있었으므로 꽤나 큰 고통을 선사할 것이었다.
“아야… 왜 그래? 내가 뭐 잘못했어?”
라모스가 정강이를 붙잡고 끙끙거렸다.
“알아서 수습해 본다는 게 그거야? 빌어먹을 인터뷰?”
어제 발간된 피츠시몬스 타임즈에는 에드가 라모스와의 독점 인터뷰가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나와의 스캔들에 대해 그의 입으로 밝히는 내용이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순 거짓말 투성이였다.
라모스는 클리블랜드나 월시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변덕스러운 여자 취향과 수작을 부리기 위해 그가 사용하는 기술들 중 일부가 아주 치밀하다는 것과 ‘잃어버린 여덟 시간’ 동안 나를 유혹하려 했지만 내가 어떻게 거절했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즉 나와 그를 실습용 마도구 보관실에 가둔 것이 그 스스로이고, 가볍고 더러운 동기에서 저지른 짓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결한 성품의 아리엘 달튼이 결코 그의 함정에 빠지지 않았음을 주장한 것이었다. 얼토당토않은 소리였지만 어찌나 썰을 잘 풀었는지 읽다 보면 당사자인 나까지 혹할 정도였다.
그러니 어련할까. 모든 추문을 혼자 떠안고자 했던 라모스의 의도대로 이제 피츠시몬스는 나나 카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에드가 라모스가 얼마나 쓰레기 같은 자식인지에 대해 떠들 뿐이었다. 나돈 출신의 몇몇은 왕위 계승권을 포기한 게 나돈이 아니라 라모스 쪽이어서 다행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니기도 했다.
내가 그에게 기대했던 ‘수습’은 그런 게 아니었다. 차라리 헛소리를 지껄이는 애들의 엉덩이를 구워 버렸다고 해도 이렇게 열받진 않을 것이었다. 오히려 잘 했다고 박수나 쳐 줬겠지.
“너도 알잖아. 그렇게 안 하면 1면은커녕 실어 주지도 않았을걸.”
라모스가 대수롭잖게 말했다. 그의 말이 맞기는 했다. 자극적이지 않은 정보에 그 어떤 의미도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크리스타 에드워즈는 우리가 암만 사실을 밝힌들 거들떠도 보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네 평판이 전보다 더 시궁창에 처박혔잖아.”
“그 말은 전에도 시궁창이었다는 걸로 들리는데?”
라모스가 팔짱을 끼고 위협적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높지도 않은 구두굽 때문에 발가락이 떨어질 것 같다는 핑계를 대고 자리를 떴다. 헐레벌떡 돌아선 내 뒤통수에다 대고 그가 문득 소리쳤다.
“달튼, 근데 너 오늘 되게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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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브리아나와 브레넌, 엘리자베스와 월시, 켈리와 그녀의 밴조를 배웅할 때까지 볼턴과 만나지 못했다. 약간 서운해졌다.
물론 나와 볼턴은 연인도 아니었고, 사이가 아주 좋은 것도 아니었으므로 그가 무조건 나를 연회장까지 에스코트할 의무는 없었다. 굳이 따지면 우리는 사이가 나쁜 편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지난 며칠의 만남에서 서로를 조롱하거나 비난하는 말만을 나누어 왔기 때문이다. 딱히 원해서 파트너가 된 것도 아니었다. 나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볼턴은 그의 상사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었으니까.
근데 아무리 그랬다고는 해도, 볼턴이 예법은 밥 말아 먹은 월시조차 챙기는 에스코트를 생략할 만큼 나에게 감정이 좋지 않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밤의 장막이 깔리기 시작하는 하늘을 멀거니 보며 우리가 쌓은 추억들을 떠올렸다. 역시 연회 날에도 그 속옷을 입냐고 물어봤던 건 너무했던 걸까.
“여기서 뭐 해, 아리?”
익숙한 애칭에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카일 빌라드였다. 카일은 평소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던 빨간 머리를 웬일로 깔끔하게 넘겨 이마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의 한쪽 팔에는 잘 모르는 여학생이 매달려 있었는데, 얼굴이 앳되고 몸집이 작으며 무엇보다 표정이 거만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1학년인 것 같았다.
그녀는 내가 묻기도 전에 아주 긴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그녀처럼 아직 대접받는 것에 익숙한 1학년 학생들을 놀리길 좋아했으므로, 거의 땅에 달라붙을 기세로 정중해짐으로써 그녀의 기대에 보답했다.
“놀리지 마. 노먼의 사촌이란 말이야.”
“이번에도 노먼 케이시가 훈련 빼 준대?”
내가 그의 귓가에 속삭이자 카일이 대답 대신 엄지를 치켜들었다.
“너는 그렇게 훈련을 싫어하면서 왜 그리폰 크리켓 부에 들었어?”
“네가 멋있다고 했잖아.”
“내 핑계 대기는. 여자들한테 인기 얻으려고 한 거지?”
카일은 어깨를 으쓱이고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저거 네 파트너 아냐?”
카일의 말마따나 그가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 볼턴이 있었다. 블로썸과 나돈이 함께였다. 나는 소꿉친구와 케이시의 귀여운 사촌동생에게 다시금 한껏 과장된 인사를 건네고 그쪽으로 발을 옮겼다.
볼턴은 내 드레스와 완전히 같은 옷감으로 지은 의복을 입고 있었다. 재킷 주머니는 이미 꽉 차 있었는데, 다른 남학생들이 그러하듯 그의 파트너로부터 받은 것은 아니었다. 피니건 거리의 액세서리 장인이 제작한 부토니에는 아직 내 손에 있었다.
마르퀴즈 볼턴의 새로운 부토니에에는 그가 나에게 요구했던 라벤더 꽃도, 흰올빼미 깃털도 없었다. 심지어 청색조차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가슴께를 내려다보는 그의 미소가 부드러웠다. 나는 그 부토니에를 준 사람이 블로썸이라는 것에 거의 다 걸 수 있었다.
“볼턴!”
큰 소리로 외쳤더니, 그는 겨우 아리엘 달튼이라는 사람이 존재하였음을 깨달은 것 같았다. 꿈에서 막 깬 듯이 몽롱한 시선이 나를 향했다.
마르퀴즈 볼턴의 근처에서 브라이스 나돈의 팔짱을 낀 블로썸은 상아색의 실크 소재로 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파니에를 받쳐 부풀린 치맛단이 깜찍했다. 볼턴과 달리 그녀와 나돈은 결코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볼턴이 나의 목소리에 반응했으므로 바로 곁에 있는 그들도 그래야 마땅했으나, 글쎄, 아예 무시하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내가 그를 다시 불렀을 때 볼턴은 뭔가를 기억해 내려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자 블로썸은 제 눈높이의 허공을 두드렸다. 전학온 날 식당에서 취했던 바로 그 동작이었다.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던 일레스티아의 모습을 뇌리에서 끄집어냈다.
볼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엄청나게 멍청한 표정으로 블로썸을 봤다. 아니, 블로썸만을 봤다. 피츠시몬스 최고의 냉혈한이자 일레스티아의 성기사라 불리는 인물답지 않게 총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모습이었다.
“야, 마르퀴즈 볼턴! 재수 없는 안경남! 빨간 팬티!”
나는 다급하게 이름뿐만 아니라 그가 질색하는 몇 가지 별명을 입에 올려 보았다. 세상에, 들은 척조차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내 기분을 완벽하게 망쳐 놓기 위함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내 것이었을 코사지로 블로썸의 머리를 장식하는 것이 아닌가! 보존 주문이 걸리지 않아 싱그러운 과꽃과 델피늄, 백합꽃은 장미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굽이치는 금발에 야속할 정도로 어울렸다.
곧 아리엘 달튼을 유령 취급하는 모임의 행렬이 우두커니 선 나를 스쳐 지나갔다. 떠나간 파트너가 맞춰 준 밤하늘 색의 드레스를 입은 채 밤하늘 아래 홀로 남겨진 나는 이제 아주 많이 서운했다. 이번에는 나의 슬픔에 공감해 줄 거대 거북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