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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이 되었음에도 내 다리는 멀쩡했다. 다리를 부러뜨리는 모든 방법이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라도 된 듯이 축축 처지는 걸음으로 학생회실로 향했다.
볼턴은 축음기와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내 얼굴을 보자마자 음악을 틀었다. 나는 가방을 손에서 놓지도 못하고 내가 아는 몇 가지 기본 스텝을 밟았다. 그랬더니 그는 나에게 어떻게 모든 박자를 틀릴 수가 있냐고 물었다. 나는 되게 머쓱해졌다.
내가 박자를 못 맞추는 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아카데미 이전에 참석해 온 거의 모든 연회에서 내 파트너는 카일이었다. 걔는 춤이라는 건 추는 사람이 신나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했기 때문에 내 박자가 어떻든 신경 쓰지 않았다.
아카데미 이후의 연회는 애덤 월시와 다녔는데, 월시는 나와 비슷한 수준의 절망적인 춤 실력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우리는 관중이 있는 곳에서는 거의 춤을 추지 않았다.
그렇게 항변하자 볼턴은 안경을 벗고 콧잔등을 눌렀다. 험프리스 교수의 파리한 얼굴이 떠올랐다.
“일단… 여기로.”
그가 내 어깨에 걸린 가방을 벗겨 아무 데나 두고는 구두코로 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가리키는 곳에 서자, 그는 오른발을 뒤로 빼며 군더더기 없이 우아한 동작으로 인사하고는 왼팔을 내 눈높이로 뻗었다. 맞잡으니 어깨뼈 바로 아래로 손이 올라왔다. 살짝 긴장이 됐다.
볼턴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던 와중에 학생회실의 한쪽 구석에서 스펜서가 교재에 코를 박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테이블에 펜과 빈 종이가 놓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과제 중인 것 같았다. 그의 산만한 몸집에 비해 테이블과 의자는 안쓰러울 정도로 작아 보였다.
‘있잖아, 볼턴. 스펜서용 테이블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까치발을 들고 볼턴의 귀에 속삭였다. ‘그런 데 쓰는 예산은 없어?’ 볼턴은 내게서 고개를 멀리 떨어뜨리며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그럴 예산이 있으면 네 춤 선생부터 고용했겠지. 딴소리 말고 집중해.’
그래서 나는 마과학 수업에서 내가 하는 것보다 약간 더 집중했다. 그러다 보니 깨닫게 된 것이 있는데, 볼턴이 춤에는 엄청난 소질이 있을지언정 가르치는 데에는 영 소질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인내심도 초 심지만큼 짧아서 내 발이 조금만 꼬여도 쉽게 화를 냈는데, 나는 쉽게 화를 내는 사람에게 쉽게 화를 냈으므로 우리의 대화는 점차 의사소통이 아니라 인신공격이 되어 갔다.
나는 그가 징크스에나 연연하는 소인배이기 때문에 블로썸을 사이에 둔 낭만적 전투에서 브라이스 나돈에게 밀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볼턴은 피츠시몬스 타임즈에서 묘사한 그의 속옷보다 시뻘개진 얼굴로 크라켄이 나보다 춤을 잘 출 것이라며 비난을 아끼지 않았다.
내 생각에 크라켄은 다리가 열 개나 있었으므로 나보다 다섯 배는 뛰어나야 하는 게 맞았다. 내가 빈틈없는 논리를 들이밀자 그는 할 말을 잃은 듯했다. 나의 승리였다.
“제이든, 잠깐 이리 와 주겠어?”
볼턴이 씩씩거리며 대법관을 불렀다. 졸지에 전장 한가운데 놓이게 된 스펜서가 어두운 안색으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안타깝게도 학생회실에 ‘제이든’은 제이든 스펜서 하나였다.
“네가 달튼을 리드해 봐.”
분명 나는 최악의 학생이었고 그걸 알았지만, 볼턴은 자신이 최고의 선생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할 수 없는 것 같았다. 그가 우물쭈물 걸어 나온 스펜서를 잡아당기자 스펜서는 휘청거리며 내 앞에 섰다. 덩치가 어찌나 큰지 내 시야가 삽시간에 그의 어깨로 가득 찼다.
평소와 완전히 같은 무표정이었으나 나는 어쩐지 스펜서가 당황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가 엄지와 검지로 블라우스의 옷감을 꼬집어 쥐었다. 왼손은 내 오른손과 간신히 닿아 있었다. 볼턴이 코웃음을 치며 그의 자세를 바로잡아 주었다. 마지못해 내 등과 손을 감싼 그의 손은 굉장히 크고 뜨거웠다.
음악이 흐르자 스펜서는 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는 분명 나를 리드하는 입장이었지만, 볼턴처럼 그의 완벽한 박자에 엉망진창인 나를 쑤셔 넣기보단 나의 엉망진창인 박자에 완벽하게 맞추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마침내, 우리는 다리가 얽히는 일 없이 짧은 왈츠 음악의 끝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자 볼턴은 안경을 닦는 척하며 내 눈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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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레스티아에서 두 번째로 세가 강한 가문의 소가주와 파트너를 맺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편지에 적었더니 엄마는 거의 까무러치려고 했다. 나는 그녀의 떨리는 글씨에서 피니건 거리에서 유명하다는 액세서리 장인의 정보를 겨우 끄집어내었다. 볼턴은 특히나 의복에 까다로웠으므로, 그의 부토니에는 반드시 그의 구미에 맞게 제작되어야 했다.
나의 이러한 노력은 딱히 볼턴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단지 성에 차지 않는 부토니에를 들이밀었을 때 그가 내 트집을 얼마나 잡을까가 걱정되어서였다. 스펜서 대법관이 나에게 무죄, 그에게 유죄를 내린 이후 마르퀴즈 볼턴은 춤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꺾인 태도를 보였지만 그 외의 부분에서 두 배는 더 깐깐해졌다.
침대에 엎드려 다리를 흔들며 엄마에게 액세서리 장인의 정보와 릴루의 초상화(용맹한 릴루가 쥐를 잡는 장면이 생생하게 담겼다.)에 감사를 표하는 답장을 작성하는데, 문득 누군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이내 드워프족의 두 사람이 자신들의 몸뚱이만 한 상자와 발돋움용 스툴을 지고 들어왔다. 볼턴이 주문한 드레스를 가봉하러 왔다고 했다.
그들은 꼼꼼하게 봉인된 상자를 능숙하게 풀어헤치고 그 안에서 무릎보다 약간 긴 기장의 연노란색 드레스를 꺼냈다. 나는 패션 센스가 그리 뛰어나지 않았지만 연노란색이 내 피부 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쯤은 숙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만 아연실색했다.
더구나 볼턴이 분명히 내 드레스에 자신의 의복을 맞췄으니 청색 부토니에를 준비하라고 했었는데. 연노란색 의복에 청색 부토니에가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아무래도 무언가 착오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거 정말 내 드레스야?”
내가 다급하게 물었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그들도 서로의 얼굴과 드레스와 나를 번갈아 보며 귀엣말을 나누었다. ‘이건 그전에 취소된 거잖아.’ 둘 중 조금 더 키가 큰 쪽이 작은 쪽에게 면박을 주었다. ‘갈색 머리 아가씨는 남색 드레스야, 멍청아.’
듣자하니 볼턴이 내 드레스를 주문하기 이전에 다른 사람의 드레스를 주문했던 모양이었다. 나를 ‘갈색 머리 아가씨’라고 부르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갈색이 아닌 머리색의 아가씨가 따로 있는 것 같았고.
그들이 가져온 연노란색 드레스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가슴께와 소매를 섬세하게 감싼 레이스에 작은 진주알이 꿰어져 있었다. 움직임에 맞추어 흩어지며 은은한 향을 풍기는 치맛단에는 진짜 꽃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실감나는 장미가 수놓였다.
아하. 나는 순식간에 모든 것을 이해했다. 로즈마리 블로썸을 위한 것이었군.
내가 알기로 블로썸의 파트너는 나돈이었다. 애초에 그녀는 볼턴과 같은 일레스티아 출신이었으므로, 그와 파트너를 맺을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로썸에게 드레스를 선물해 주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결국 취소되었다는 것을 보면 전하지 못한 듯 했고. 아마 볼턴이 고민하는 사이 나돈이 선수를 쳤겠지.
나는 볼턴을 검술 훈련장이 아닌 곳에서는 최근에나 세 번 만났을 정도로 그와 친분이 없었지만 그가 이런 문제에 있어서 행동이 빠른 타입이 아니라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서로를 욕하며 춤보다는 싸움에 가까운 행위를 하고 있을 때 나돈이 블로썸을 데리고 학생회실을 드나든 적이 있었는데, 볼턴은 자칭 춤의 달인답지 않게 내 발등을 밟고 블로썸을 훔쳐보면서도 끝끝내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더랬다.
주인을 찾지 못한 블로썸의 드레스는 다시 상자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키가 작은 드워프가 꾸지람에 쫓겨 허둥지둥 갈색 머리 아가씨의 남색 드레스를 가지러 간 동안 키가 큰 드워프는 스툴에 올라서서 내 치수를 가늠했다.
내가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 그들의 연노란색 드레스에 대한 칭찬을 건네자, 그녀는 우쭐해져서 자신의 작업물 중 가장 공이 많이 든 것이라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만큼 천문학적인 가격을 지불해 놓고서 완성을 앞두고 제작을 취소한 볼턴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도 했다.
나는 얄미운 마르퀴즈 볼턴의 약점을 어떤 것이든 잡고 싶었으나 그의 안쓰러운 짝사랑에 왈가왈부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더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자 우리는 다시 어색해졌다. 그게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