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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틀린 대제의 비밀 통로는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일레스티아와 나는 아늑하게 꾸며진 방에 다다랐다. 샹들리에와 벽난로에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고, 작은 통기창 외에 창문은 없었지만 별로 답답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적당한 크기의 통나무 테이블 위에는 고급스러운 문양이 수놓아진 테이블 러너가 깔려 있었다. 마감이 잘된 벤치 의자에서 고전적인 느낌이 났다.
전체적으로, 엄청 내 취향이었다. 나는 호들갑스럽게 케이틀린 대제의 진짜로 완벽한 인테리어 센스에 대해 떠들었다. 일레스티아는 나의 오십 가지 미사여구를 웃는 낯으로 듣고 있다가 사실 이 방은 대제께서 발견하셨을 때부터 이미 완성되어 있었노라고 고백했다.
“그런 중요한 얘기는 처음부터 해 줬으면 좋잖아.”
“미안, 네가 너무 재밌어서….”
내가 정색을 하자 일레스티아가 드물게도 큰 소리를 내서 웃었다. 나는 그가 무의식적으로 입가에 가져간 내 손등에 그의 웃음이 닿고 나서야 우리가 아직 손을 잡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손아귀의 열기가 볼까지 올라오는 것 같아서 재빨리 깍지를 풀어냈다. 일레스티아는 자신의 빈 손을 흘깃 내려다보았으나 뭔가 말하지는 않았다.
“무슨 주문이 걸린 건지는 모르겠는데, 도서관이나 교실처럼 ‘책을 읽을 만한 곳’에서는 눈에 잘 들어오질 않더라고. 이 방은 마력이 차단되어 있어서 그런지 괜찮았어.”
“그래서 검술 훈련장이었구나.”
테이블의 가운데 놓인 <패치 노트>를 펼치며, 일레스티아가 수긍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하다니, 나쁜 아리엘 달튼.
우리는 <패치 노트>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전에 봤던 것보다 훨씬 많은 메모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 옆에는 표 같은 것이 그려진 공책이 있었는데, 일레스티아는 나에게 거기 있는 알 수 없는 언어의 문자들 중 어떤 것이 자음이고 어떤 것이 모음인지 설명해 주었다.
브리아나의 눈에 양손에 바나나를 쥔 고릴라인 나에게 그것들은 글자보다는 그림처럼 보였다. 그중 하나는 멋진 모자를 쓴 사람 같아서 귀여웠는데, 그렇게 말했더니 일레스티아는 날숨을 쉬는 척하면서 얕게 한숨을 뱉었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숫자인 것 같아. 모든 페이지의 최상단에 쓰여 있었는데, 내 생각에는 날짜가 아닌가 싶어.”
“일기인가?”
“그럴 수도 있지.”
만일 그의 말대로 각 페이지의 최상단에 쓰인 것들이 날짜가 맞다면 이전 장보다 다음 장에 쓰인 것이 더 큰 숫자일 것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그것들 중 어떤 것이 우리의 어떤 숫자에 대응하는지 파악해 내는 것이 내가 할 일이었다.
다행히 <패치 노트>를 분석하는 것은 휴스턴 교수의 마과학 수업을 듣는 것보다 덜 지루했다. 책장을 넘겨 가며 숫자와 그림 같이 생긴 문자를 마구잡이로 적다가, 문득 수상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일레스티아, 여기 한 장이 빠진 것 같은데?”
어찌나 꼼꼼하게 뜯어냈는지 얼핏 봤을 때는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분명히 찢긴 자국이었다. 내가 <패치 노트>의 한 부분을 일레스티아의 눈앞에 들이대자 그가 대번에 심각해졌다.
“진짜네. 누가 찢어 갔나 봐.”
“우리 이전에도 <패치 노트>를 만진 사람이 있는 걸까?”
내 말에 일레스티아가 턱을 괴고 고민에 빠졌다. 그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인 펜이 가파른 턱선을 톡, 톡, 두드렸다. 뭔가 짚이는 게 있기는 한데 섣불리 말하기는 애매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캐물어 볼까 했는데 가르쳐 줄 것 같지가 않았다. 대신 나는 누군가 찢어 간 <패치 노트>에 골몰했다. 대체 누가, 왜 그걸 찢어간 걸까? 거기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었든 간에 아주 중요할 것임이 틀림없었다. 찾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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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시 일레스티아의 손을 잡고 돌아왔을 때 마도구 제작 실습실은 노을로 가득했다. 정말로 비가 잠깐 내린 모양인지 반쯤 열린 창으로 들어와 커튼을 날리는 바람에서 축축한 냄새가 났다.
“아직 못 구했다며? 시작의 달 연회 파트너.”
별관의 나선 계단을 돌아 내려가는 길에 일레스티아가 대뜸 말했다.
“놀리려는 거면 1절만 해 주면 안 될까? 이미 카일 빌라드가 한 32절까지 해 먹었거든.”
나는 시작의 달 연회에 파트너 없이 참석하기로 어느 정도 마음을 먹었다. 애초에 연회가 일주일 남은 시점에 파트너를 구하려고 한 내가 안일했던 게 맞았기 때문이다.
내기를 걸었답시고 받아 준 라모스가 특이한 거지, 보통 이 시기에 파트너 찾기는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였다. 연회를 코앞에 두고 혼자라 함은 아예 참석할 생각이 없거나, 혼자 참석하고자 하는 이유가 있거나, 인성이나 사회성에 하자가 있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괘씸한 카일 빌라드는 아카데미의 어느 곳에서든 쉽게 아는 얼굴을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인간관계망을 형성하고 있으면서도, 딱한 처지의 소꿉친구를 도울 생각은 않고 약이나 올려 댔다. 정 안 되면 라일라를 빌려 주겠다나.
솔직히 연회장에 그리폰을 타고 등장하는 건 멋있을 것 같았다. 근데 그랬다가 모나한 교수가 그와 내가 비슷한 성 취향을 가지고 있다는 착각이라도 하게 되면 여간 큰일이 아니어서 엄두는 내지 않았다.
“카일이랑은 정말 친한 모양이네.”
“가족 같은 사이지.”
나는 일부러 ‘족’에 강세를 두었다.
“같은 욕조에 들어갈 정도면 가족이 맞지.”
듣고 싶은 대로 듣는 일레스티아는 나의 배배 꼬인 말에서 비아냥을 꼼꼼히 거르고 쓸모없는 사족을 붙여 대답했다. 나는 브리아나 모슬리로부터 퍼져 나간 소문이 얼마나 멀리까지 왔는지에 대해 감탄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아무튼, 놀리려는 건 아냐.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네가? 마담 바틀렛을 에스코트해야 되는 거 아니었어?”
일레스티아는 학생회장으로서 모든 연회에서 아카데미장인 마담 바틀렛의 파트너가 되어야만 했다. 그녀는 항상 자신이 용모 단정, 성적 우수, 품행 방정한 일레스티아의 황태자와 나란히 섰다는 사실을 과시하지 못해 안달이 나 있었으므로, 갑자기 파트너 자리를 양보할 리 만무했다.
“나는 그렇지.”
“그럼?”
의아해져서 묻자, 일레스티아는 되게 기발한 장난을 생각해 낸 꼬마애 같은 말투로 곧 알게 될 거라고 했다.
일레스티아의 말마따나 나는 금방 그가 계획한 바에 대해 알게 되었다.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향하는 길에, 평소에는 나를 소 닭 보듯이나 하던 마르퀴즈 볼턴이 별안간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드레스는 사흘 안에 네 방으로 갈 거야.”
“뭐?”
“내 의복은 네 드레스와 맞춘 색이니 청색 계열의 부토니에를 준비해 두도록 해. 라벤더에, 음… 흰올빼미 깃털 장식도 나쁘지 않겠네. 상인 가문이라니 그 정돈 구할 수 있겠지.”
“무슨 소리야?”
“켈란 전하께 아무 말도 못 들었어?”
켈란? 켈란 일레스티아? 나는 그제야 마르퀴즈 볼턴이 켈란 일레스티아의 부관이었다는 사실을 더듬더듬 기억해 냈다.
“맙소사, 네가 내 파트너야? 일레스티아가 말한?”
“그 당연한 사실을 유추해 내는 데 4분 30초가 걸렸구나, 달튼.”
재수 없는 안경남이 재수 없는 동작으로 안경을 추켜올리며 재수 없게 말했다. 입꼬리는 여전히 비스듬했다. 갑자기 보름쯤 전에 그의 목검에 늘씬하게 얻어맞은 옆구리가 쑤셔 왔다.
마르퀴즈 볼턴은 일견 딱딱해 보이는 인상과는 다르게, 한때 신성 일레스티아 제국의 사교계를 주름잡았던 어머니 밑에서 자란 탓인지 연회와 같은 사교 행사에 완전히 진심이었다.
그의 예법은 흠 잡을 데가 없었고 춤 실력은 준수했다. 의복과 액세서리를 고르는 센스는 특히 좋아서 볼턴이 걸쳤던 모든 것들이 고스란히 피츠시몬스 남학생 간에 유행하곤 했다.
애덤 월시만 해도 그가 착용했던 것과 비슷한 크라바트나 커프스 단추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지 않듯이 월시가 그걸 착용한다고 해서 볼턴이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그런 면에서 따지면 일레스티아의 판단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나의 파트너가 된 이상 볼턴은 우리가 참여할 연회를 완벽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었다. 말하는 꼴을 보아하니 이미 내가 입을 드레스까지 주문해 놓은 듯했다.
하나 우리 사이에는 아주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볼턴에게 상대의 화를 돋우는 신묘한 재주가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걸어 오는 싸움은 피하지 않으며 평생을 살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부류와는 필연적으로 안 좋은 결말이 났다.
과연 내가 파멸이 약속된 관계를 당장의 연회에서 면이 팔리지 않기 위해 이어 나가야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뭐가 어찌 되었든 간에 날개가 없고 말고기 육포를 먹지 않는 파트너를 얻었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좋아, 연회 날에 만나.”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부토니에 이야기를 해서 말하는 건데, 내 코사지에는 보존 주문이 걸리지 않은 생화를 사용했으면 좋겠어. 향기가 훨씬 강하거든.”
볼턴은 아무래도 나만큼 만족하지 못한 것 같았다. 하긴 지난 다섯 번의 5학년을 반추해 보면 그는 블로썸과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기 전까지 스스로의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연회에 홀로 참석하곤 했다.
“내 기억에 네가 춤을 잘 추진 않았던 것 같은데.”
“네 기억이 잘못됐네.”
나는 춤을 잘 추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목각 인형이었다. 내가 스텝을 밟는 경우가 있다면 그 이유는 누군가의 급소를 찌르기 위해서였지 음악에 몸을 맡기기 위함이 아니었을 것이었다.
사실을 정정해 주자, 볼턴은 갖고 놀던 장난감이 가구 틈으로 굴러가 버린 우리 집 고양이 릴루처럼 망연자실해졌다. 나는 아리엘 달튼이 마르퀴즈 볼턴의 사교 역사에 전무후무한 존재가 될 것임을 직감했다.
“달튼, 너 방과 후 활동 하는 거 있던가?”
“아… 니?”
볼턴이 심각하게 물었다. 반사적으로 대답하고 나서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월요일부터 수업 마치고 학생회실로 와.”
볼턴의 얼굴이 문득 어떤 사명이라도 띤 것처럼 결연해지기에, 나는 사실 내가 아주 뛰어난 춤꾼이고 목각 인형은 그냥 해 본 소리라고 말해 보았다.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는 다짐의 말을 거듭해서 듣고 나서야 겨우 나를 놓아 주었다. 나는 저녁을 먹는 내내 안 아프게 다리가 부러질 방법이 뭐가 있을지를 궁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