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15화 (15/178)

***

험프리스 교수의 사무실에 들르느라고 점심시간이 약간 빠듯해졌다. 라모스도 마찬가지라고 해서, 우리는 매점에서 간단하게 먹을 몇 가지를 사서 광장 계단에 나란히 앉았다.

“오, 초코 골렘 빵은 내 거.”

“그거 나 먹으려고 산 거야!”

“그럼 좀 더 민첩했어야지.”

라모스가 초코 골렘 빵 봉지를 흔들며 나를 약 올렸다. 나는 이를 갈며 레프러컨 시리얼이 담긴 용기에 우유를 부었다. 귀리와 옥수수로 된 레프러컨들이 우유를 가르고 헤엄쳤다.

“레프러컨 시리얼이 벌써 나왔어?”

“다음 주가 시작의 달 연회잖아.”

“슬슬 주머니 단속해야겠네. 올해는 자물쇠 안 팔아?”

시작의 달 연회가 끝나고 4월 첫째 주가 되면 온 피츠시몬스에 모나한 교수가 풀어놓은 레프러컨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명목상으로는 ‘레프러컨 축제’로, 황금을 좋아하는 레프러컨의 습성을 이용하여 아카데미 곳곳에서 학생들이 잃어버린 금화를 찾아 아카데미 운영비에 보탬을 하겠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행사였다.

하지만 탐욕스러운 레프러컨들이 바닥에 떨어진 금화로 만족하지 못하고 학생들 주머니 속의 금화까지 노리곤 하였으므로, 이 시기가 오면 너도나도 가방을 끌어안고 다니곤 했다.

나는 어땠냐면, 미래의 달튼 상단주로서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부모님께 편지를 보내 대량의 마법 자물쇠를 구했는데, 너무 불티나게 팔리는 통에 남는 물건이 없어서 정작 내 주머니를 레프러컨에게 털리고 말았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분통이 터졌다. 올해 모나한 교수가 들여온 히포그리프의 적어도 두 마리 정도는 내가 샀을 것이었다.

“그 얘기 하지 마라.”

내가 엄숙하게 말하자 라모스는 코코아 가루를 뿜어 대며 웃었다. 으, 더러워.

“연회 파트너는 어떻게 하려고?”

“몰라. 브리아나 모슬리한테 얼마나 매달리면 같이 가 줄까? 걔 남친이랑 같은 일레스티아 출신이잖아.”

“모슬리 스톡스랑 간다던데. 걔랑 맥카시도 둘 다 밀루아인이잖아. 모슬리가 스톡스랑, 월시가 맥카시랑. 이런 거 같더라고.”

맞네. 라모스의 말에 이마를 탁 쳤다. 전에도 그랬었지.

“다시 한번 미안하게 됐다.”

“아까도 말했잖아, 그럴 필요 없다고.”

‘그래도….’ 라모스가 민망한 듯 코를 찡긋거리다가 말했다.

“더러운 소문은 내가 어떻게든 수습해 볼게.”

“네가 무슨 수로?”

“너무 불신하는 거 아냐? 이래 봬도 왕족인데.”

별로 왕족이라고 해서 피츠시몬스 아카데미의 모두의 뇌리에서 그 개 같은 기사를 지워 버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대충 고개를 끄덕여 맞장구쳐 주었다. 그가 나에게 초코 골렘 빵에서 제일 크림이 많이 든 몸통 부분을 건네주었기 때문이다.

***

오후 서너 시쯤부터 하품이 십 분에 한 번씩 나오길래 결국 저녁은 거르기로 했다. 크리스타 에드워즈가 식판에 무지개 슬라임을 쏟아 내는 꼴이 너무 보고 싶었지만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침대에 들어가기 찝찝하지 않을 정도로만 씻고 나왔더니 건너편 침대 위에 아까는 없던 이불 한 더미가 있었다. 잠시 귀를 기울이자 거기서 작은 훌쩍임이 들려왔다. 나의 룸메이트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일 있어?”

브리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의 눈물이 월시로 인해 비롯되었음을 직감했다. 감히 추측해 보건대 나를 라모스와 실습용 마도구 보관실에 가두고 더러운 소문을 낸 일로 월시와 싸운 것이 아닐까 싶었다.

나는 브리가 나를 위해 나서준 것에 고마움을 느꼈지만, 동시에 그녀가 월시와 나 사이에 있던 일로 인하여 고통받지 않기를 바랐다. 그것이 내가 그 개자식에게 일방적으로 엿을 먹은 일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이불에 감싸인 브리아나의 등을 어설프게 쓰다듬자,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저리 가. 지금은 네 얼굴 보고 싶지 않아.”

브리의 말대로 그녀에게 감정을 추스를 시간을 주기로 했다. 대신 내가 며칠 전에 창문가에 내팽개쳐 놓은 놀이용 마도구를 주워 들어 이불 더미 옆에 두었다.

그녀는 내가 두 개의 고리를 양손에 바나나를 쥔 고릴라처럼 멍청하게 맞부딪칠 때마다 곁눈질로 답답해 죽겠다는 시선을 보내곤 했었다.

“뭔가 집중할 게 있으면 기분이 좀 나아질 거야.”

나는 그렇게 말하고 벽을 본 채 침대에 누웠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등 뒤에서 문득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잽싸게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브리아나 모슬리는 갓 태어난 아기사슴처럼 섬세한 애라서, 내가 카일을 대할 때처럼 놀려 대기라도 하면 깊은 숲 속으로 도망칠 것이 분명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둥지 위에 위풍당당 선 와이번이 머리맡에서 나를 맞았다.

그것을 주워 들자, 눈이 팅팅 부은 채로 교복을 입던 브리아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사뭇 새침한 태도였다.

“그거, 너무 쉽더라. 다른 건 없니?”

“다음에 집에 편지 쓸 일 있으면 물어볼게, 모슬리.”

“‘브리아나.’”

“응?”

“‘브리아나’라고 부르라구, ‘아리엘’.”

나는 아주 감격스러워졌다.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고 우는 시늉을 했더니 브리아나가 핀잔을 던졌다. ‘오버하지 마.’ 기껏 편 머리카락 한 줌을 손가락에 감아 빙글빙글 꼬아 대는 그녀는 되게 쑥스러워 보였다.

“‘브리’는 안 돼?”

“그건 안 돼.”

하는 김에 조금 더 나가 보았더니만 단칼에 거절이 돌아왔다. 아직 거기까지는 아닌 모양이었다. 아쉬웠다.

날이 많이 흐렸다. 나는 친구 많은 애들이 피니건 거리에서 비를 맞고 허둥지둥하는 것을 상상하며 마도구 제작 실습실의 문을 열었다.

일레스티아는 창틀에 등을 기대고 고개만 돌려 밖을 보고 있다가 내가 인기척을 내자 일어섰다. 교복 차림이 아닌 일레스티아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못생긴 스웨터 대회에서나 입을 법한 스웨터를 입고 있었음에도 얼굴로 가까스로 극복하고 있었다.

“일레스티아, 그 스웨터 되게 웃긴다. 어디서 났어?”

“어머니가 짜 주신 거야.”

“웃음이 나올 정도로 완벽하네. 대제께서는 미적 감각이 뛰어나시구나.”

일레스티아에게 어머니라 함은 신성 일레스티아 제국의 황제인 케이틀린 대제를 의미했다. 나는 등줄기에 땀이 배어 나오는 것을 느끼며 헐레벌떡 둘러댔다.

“고마워. 어머니께 전해 드릴게.”

“아냐, 그럴 필요는 없어.”

밀루아 변방의 자작령에서도 케이틀린 대제가 엄청난 카리스마와 무자비한 신성력으로 일레스티아를 철권통치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지금껏 졸업 연회 적에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 왔지만, 굳이 실험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그 케이틀린 대제도 아들의 스웨터를 짜는구나. 나는 그녀가 정적의 사형 집행을 구경하며 못생긴 스웨터를 짜는 장면을 떠올렸다.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굉장히 강렬한 느낌이긴 했다.

“근데 <패치 노트>는 어디 있어?”

일레스티아가 이제 케이틀린 대제와 스웨터를 내가 어떻게 모욕할 뻔했는지에 대해서 그만 생각했으면 좋겠어서 적당히 말을 돌렸다. 주변을 대충 보았을 때 책 같은 것이 없어서 그러기도 했다. 나와 일레스티아가 있는 마도구 제작 실습실에는 마법 회로를 새겨 넣기 위한 공구들과 아마도 졸업생들이 만들었을 조악한 마도구로 가득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내 물음에 일레스티아는 대답 대신 고갯짓을 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따라오라는 뜻인 것 같았다.

그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마도구 제작 실습실의 한구석이었다. 긴 돌을 엇갈리게 얹어 촘촘하게 세운 벽에 푸른 이끼가 끼어 있었다. 혹시 무슨 장치라도 되어 있는 비밀 금고인가 싶어서 만져 보았는데, 손끝에 찝찝함만 남았다.

일레스티아는 내가 손톱에 낀 이끼에 아주 질색을 하는 것을 보고 조금 웃더니 이내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마차에서 막 내린 파트너를 연회장으로 에스코트라도 하는 듯한 자세였다.

“잡으라고?”

“잡아야 해.”

퍽 단호하게 말하기에 하는 수 없이 손을 잡았다. 신성력 때문인지, 그의 손은 내 손보다 훨씬 따뜻했다.

일레스티아는 내가 어색하게 얹어놓은 손을 고쳐 쥐고는 깍지를 꼈다. 그의 길다란 손가락이 내 손가락 사이사이로 꽉 차게 들어왔다. 이건 약간 민망했는데, 일레스티아가 너무 아무렇지도 않아 보여서 나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했다. 남자랑 손깍지 같은 건 매일 낀다는 듯이 허세를 부렸더니 얄미운 켈란 일레스티아는 자기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괜히 나만 난봉꾼이 되었다.

일레스티아와 깍지를 낀 손이 점점 더 뜨끈해졌다. 신성력을 사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윽고 그가 다른 손으로 벽을 짚었다. 그러자 그것이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는데, 그러더니, 마침내는, 돌벽의 일부가 고운 빛가루로 변해 무너지며 아치가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거기서 이어지는 것은 끝을 알 수 없이 어두운 통로였다. 손을 잡으라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런 데 나 혼자 떨어졌다간 평생 동안 헤매고 말 것이었다.

“이런 건 어떻게 알았어? 언제부터?”

나와 보조를 맞춰 다소 느린 속도로 걷는 일레스티아의 조각 같은 옆모습이 아주 희미하게 보였다.

“나도 최근에 알았어. 어떤 졸업생한테서 들었거든.”

“누군지 몰라도 엄청 말썽꾸러기였나 보다.”

피츠시몬스 아카데미는 그 역사의 길이가 긴 만큼 많은 비밀을 가지고 있었지만 착하게 교실과 기숙사만을 오가며 수업을 듣는 학생들로서는 찾아내기 힘든 것이 대부분이었다. 나름대로 한 장난 한다고 소문난 카일과 나도 제법 아카데미의 구석구석을 누볐는데, 식당에 배치된 술통 중 왼쪽에서 세 번째 술통에 들어가 ‘모두가 초콜릿을 좋아해’라고 말하면 벽과 바닥을 포함하여 모든 것이 초콜릿으로 된 방에 갈 수 있다는 것밖에는 몰랐다(내가 2학년 때 치통으로 고생을 했던 것은 오로지 그 방 때문이었다.).

“하하, 그것도 전해 드릴게.”

“대제께서는 학창시절에 참 활달하셨구나.”

젠장, 케이틀린 대제! 왜 그렇게 열심히 사셨던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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