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라모스에게 궁금한 건 점술 시간 강사와 만나는 게 정말인지가 다였다. 내 미래의 기억 속에서 그녀는 곧 학부모 방문 주간에 만날 스테판 커크패트릭의 아버지와 눈이 맞아 두 달 만에 커크패트릭 자작부인이 되기 때문이다(커크패트릭은 그녀가 수정구로 보고 귀띔해 주었다는 족보를 암암리에 판매하여 용돈을 벌었는데, 당최 맞는 내용이 하나도 없어 기말시험 이후 여러 살생부에 이름을 올렸다.).
아니, 하나 더 있구나.
“로즈마리 블로썸 말인데.”
“브라이스가 지금 절찬리 삽질 중인?”
“네가 그렇게 표현하고 싶다면야, 뭐, 그래. 아무튼 걔 학생회에 넣을 생각은 없어?”
여기서 갑자기 로즈마리 블로썸이 왜 나와? 라모스는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뜬금없게 들려도 나한테는 중요한 사안이라고. 속이야 어떻든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했다.
“서기라든가, 나쁘지 않잖아. 페드로 캔트렐 같은 차별주의자한테서 보호할 수도 있고, 학생회 전원과 친분도 있고, 글씨도 예쁘고.”
글씨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아마 예쁘겠지. 솔직히 로즈마리 블로썸은 안 예쁜 구석이 없었다.
“재밌네. 브라이스가 너랑 정확히 똑같은 소리를 했는데.”
“근데?”
“조금 더 두고 보자고 하더라고, 켈란이.”
또, 켈란 일레스티아였다. <아리엘 달튼의 의문>이라는 책을 펼치면 두 줄에 한 번은 등장할 이름. 내 상상 속, 지독한 고문을 받던 애덤 월시 대신에 깎아낸 듯한 미남이 나타났다. 아침마다 산수유나무와 자작나무, 동백나무 사이에 경건히 앉아 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
그가 또 로즈마리 블로썸의 로맨스 소설 같은 아카데미 생활에 제동을 걸고 있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일레스티아에게 정말 지난 5년 동안의 기억이 있다 해도 그게 로즈마리 블로썸에게 거리를 둘 이유가 되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일레스티아는 5년 내내 블로썸을 사랑했으니까.
***
잠깐 졸다가 깼다. 눈을 뜨면 그리운 내 방과 사랑하는 브리아나가 나타날 줄 알았는데, 여전히 퀴퀴한 실습용 마도구 보관실에 녹색 털공 같은 것을 가지고 노는 에드가 라모스가 있었다. 실망이 컸다.
“달튼, 너 이거 알아?”
내가 정신이 든 것을 발견하자마자 라모스가 나에게 쥐고 있던 털공을 들이밀었다. 자세히 보니 그건 우리 나잇대 애들이라면 환장을 해 마땅한 추억의 장난감이었다. ‘맙소사, 당연하지!’ 나는 아주 오랜만에 옛 친구를 만난 사람처럼 날뛰었다.
“아기 그렘린 마니잖아!”
아기 그렘린 마니는 내가 예닐곱 살쯤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장난감이었다. ‘그렘린’이라는 컨셉에 걸맞게 마법 회로 근처에 둘 경우 마력의 흐름이 교란되곤 했는데, 이걸로 얼마나 많은 어른들을 화나게 만들었는지 셀 수조차 없었다.
“오, 아는구나! 그럼 혹시 주제가도 기억나? ‘아기 그렘린 마니, 장난꾸러기 마니…’.”
“‘못된 어른을 개구리로 만드는 늪지 마녀의 친구….’ 미쳤다, 완전 기억나.”
우리가 아기 그렘린 마니를 판매하는 상인들이 부르고 다니던 주제가를 흥얼거리자, 마니는 라모스의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너무 귀여웠다.
“얘도 영원히 어질러진 옷장에 들어 있었어?”
“응, 유니콘 팽이랑 같이.”
“나 유니콘 팽이 대박 고수인데. 그거 줘 봐.”
유니콘 팽이는 말 그대로 유니콘 모양의 팽이로, 뿔 부분을 축으로 하여 돌리며 노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팽이처럼 균형이 잘 맞질 않아서 어지간한 기술이 없으면 다섯 바퀴도 돌리기가 어려웠다.
자신감 가득한 내 말에, 라모스는 코웃음 치며 아기 그렘린 마니를 도로 옷장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유니콘 팽이를 두 개 꺼냈다.
“네가 아무리 유니콘 팽이를 잘 돌려도 나만큼은 아닐걸. 내기할래?”
“뭐 걸고?”
십구 년 하고 사십육 개월 인생에 있어 맹세코, 나는 단 한 번도 걸어 오는 싸움을 회피한 적이 없었다.
“유니콘 팽이 분야의 권위자가 되어 명예 얻기?”
“누가 그렇게 심심한 내기를 해? 거기에 소원 얹어.”
“소원? 좋아. 물리기 없어.”
라모스가 눈을 빛내며 내 제안을 수락했다. 기다렸다는 듯한 태도였다. 약간 말린 것 같기도 해서 찝찝해졌는데 어차피 이기면 되는 거니까 문제는 없었다.
보는 이 아무도 없는 실습용 마도구 보관실, 아마도 새벽에 이루어진 세기의 유니콘 팽이 대결에서 처음으로 승리한 것은 나였다. 내 파랑 유니콘은 라모스의 분홍 유니콘보다 정확히 두 바퀴 반을 더 돌았다.
“내가 졌네. 소원이 뭐야?”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아기 그렘린 마니 주제가 부르기.”
‘너무하네!’ 라모스는 분통을 터트렸다.
“한 번만 봐줘, 나 음치란 말이야….”
“그래? 잘됐네. 3절까지 불러.”
“제발, 달튼. 그거 말고 다른 건 안 될까?”
“너 정말 진지하구나.”
모가지가 빠져라 고개를 끄덕여 대는 라모스 때문에 나는 거의 뒤집어지다시피 하면서 웃었다. 에드가 라모스도 창피한 게 있구나. 하도 온 동네에 사생활을 공개하고 다녀서 아닌 줄 알았는데.
그러고 보면 좋은 방법이 하나 있었다. 나도 라모스도 만족할 만한. 사실 라모스가 만족할지는 모르겠지만. 얘는 언제나 아나이스 오브라이언처럼 인기 많고 예쁜 애의 팔짱을 끼고 나타났었으니까.
“시작의 달 연회 파트너 정해졌어?”
매년 3월 말에 열리는 시작의 달 연회는 전통적으로 ‘국제 교류’가 테마였다. 그래서 학생들은 반드시 다른 나라 출신의 파트너와 동반해야 했다.
내 인간관계는 지극히 좁았으므로, 나는 이맘때마다 항상 고민에 빠졌다. 1학년 때는 켈리 라미레즈의 지금은 졸업한 오빠와 함께했었고, 2학년부터 4학년까지는 끔찍스러운 애덤 월시가 내 파트너였다. 5학년의 연회에는, 하지만 개똥 같은 월시도 약에 쓰려면 없었다. 보통 이런 때 제일 만만한 건 카일 빌라드인데, 걔는 하필 나랑 같은 밀루아 출신이었다.
다섯 번째의 아리엘 달튼은 시작의 달 연회가 열리기 전에 자퇴를 했다. 그 전에는 혼자 참석했고, 그 전에는 브리와 함께였다(그녀가 이미 월시와 헤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최초의 두 번은 그럭저럭 친한 트레버 기븐스의 에스코트를 받았었다. 그것을 뭔가의 신호라고 착각한 모양인지, 그가 두 번째 아리엘 달튼에게 공개 고백을 했기 때문에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기로 했다.
에드가 라모스는 적어도 공개 고백을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가 왕족이고 미남이라는 점도 고려할 만했다. 내 말의 의도를 깨달았는지, 라모스는 잘생긴 얼굴에서 방금까지의 절망을 걷어 내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원하신다면야.”
그가 내 손등에 입 맞추는 시늉을 했다. ‘야, 이런 건 하지 마.’ 어쩐지 부끄러워져서 손을 빼내자 작게 킥킥거리는 소리가 났다.
***
치열한 접전 끝에 두 번째 대결에서 승리한 것은 라모스였다. 나는 그의 넘치는 마력이 부정하게 쓰이지는 않았는지 의심스러웠는데, 그가 하도 억울해해서 봐주기로 했다.
“좋아. 필요한 걸 말해 봐.”
나는 아기 그렘린 마니 주제가를 3절까지 열창할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라모스가 요구한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네 얘기를 해 봐.”
“내 얘기?”
“아무거나, 사소한 거라도. 어린 시절 얘기라든지… 궁금해서 그래. 네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할 것도 많다.”
“사교의 기본이잖아, 미스 달튼.”
라모스가 한심하다는 듯이 핀잔을 던졌다. 내가 사교의 기본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친구가 없었고, 친구가 없어서 라모스와 연회에 가려는 건 맞았으니까 가만히 있기로 했다.
“음, 나는 밀루아 출신이야.”
“그건 알아. 부모님이 상단 하신다며?”
“젠장, 방금 그 얘기 하려고 했는데… 어, 그리고, 카일 빌라드랑은 소꿉친구야.”
“그것도 알아. 같은 욕조도 들어갔다면서.”
아, 브리아나 모슬리. 나는 나의 룸메이트를 사랑했지만 그녀의 가벼운 입은 도무지 사랑할 수가 없었다.
“이건 모르겠지. 난 다섯 살에 나무에서 떨어진 적이 있어.”
“혹시 감탕나무? 열매 따다 그랬어?”
“뭐야, 어떻게 거기까지 알아?”
아리엘 달튼이 감탕나무 열매를 따려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고소 공포증이 생긴 건 브리아나 모슬리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또래 사이에서 퍽 영특하단 소리를 듣던 나의 지능이 그날 이후로 다소 지지부진한 향상 곡선을 보였으므로, 부모님은 애가 나무에서 떨어지더니 멍청해졌다고 한탄을 금치 못했더랬다.
설마 카일이 소문 내고 다녔나? 걔가 그럴 리는 없는데. 내가 소꿉친구와의 우정을 의심하는 동안 라모스는 소름이 끼친다는 듯이 팔뚝을 문질러 댔다.
“허. 내 주변에 다섯 살에 감탕나무에서 떨어진 사람이 셋이나 될 줄은 몰랐네.”
“누가 또 그랬대?”
“아나이스, 메이브 그리고 너.”
메이브는 점술 시간 강사인 미스 프록터의 이름이었다. 피니건 거리 목격담이 진짜였잖아. 나는 경악에 차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놀랄 만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상하지 않아?”
엄청 이상했다. 라모스가 아무리 많은 여자를 만나고 다녔다 한들 대륙의 모든 사람을 만나 본 것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대륙의 모든 사람 중 세 사람의 어릴 적 추억에 비슷한 장면이 있다면 그건 그다지 문제 될 것은 아니었다. 세상에는 나와 완전히 같은 사람이 세 사람은 있다고들 하니까. 하지만 피츠시몬스 아카데미의 많아 봐야 오백여 명 중 세 사람이라면 말이 달라졌다.
나와 라모스는 잠시 동안 서로 마주 보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뭔가 생각하던 그가 문득 입을 연 순간이었다. 머리 위에서 날카로운 것이 유리를 긁는 소리가 났다. 우리의 고개가 동시에 창문을 향했다.
“클레이!”
“맙소사, 클레이!”
바라마지 않던 구조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