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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11화 (11/178)

11화

다음 날, 나는 정확히 카일이 말한 시간대, 카일이 말한 별관 2층 복도에 서 있었다. 그가 나에게 기다려 달라고 말하긴 했지만, 가만히 기다려 달라고 말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건지 블로썸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는데, 대신 정처 없이 배회하는 에드가 라모스를 발견했다.

“이런 데서 보네, 달튼.”

라모스는 나를 보자마자 머리를 정돈하고 셔츠의 단추를 풀어 조금 더 나돈처럼 보이게끔 한 뒤에 손을 흔들었다. 잠깐 속아 넘어가 줄까 했지만, 너무 기대하는 표정이어서 청개구리 심보가 일었다.

“라모스, 네가 그런다고 해서 내가 너희를 헷갈리는 일은 없을 거야. 전에도 말했다시피 나는 눈썰미가 너무 좋으니까.”

“아, 그래, 뭐, 어련하시겠어. 위습도 구별하신다는데.”

명백히 김이 샌 듯한 라모스가 셔츠 단추를 도로 채웠다. 나돈인 특유의 건강한 구리색에, 얼핏 봐도 탄탄한 가슴팍이 하얀 셔츠 깃 아래로 모습을 감췄다. 나는 라모스가 작은 헛기침으로 주의를 환기하기까지 내가 그것을 홀린 듯이 보고 있었음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맙소사.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였다. 월시와의 구질구질한 이별 이후 졸업에 성공하는 그날까지 남자에 눈 돌아가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굳게 다짐했건만. 확실히 주색잡기로 아카데미의 정상에 오른 남자는 달라도 뭔가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 풀어 줄까? 아쉬운 것 같은데.”

“물러가라, 악마야.”

나는 진심을 담아 손을 휘저어 라모스를 쫓았다. 얼른 블로썸을 찾아서 카일이 말한 것들에 대한 실마리를 잡아야 했기 때문에, 나에게 그와 노닥거릴 여유 따위는 없었다.

나 못지않은 청개구리 심보를 지닌 것이 분명한 라모스는 노골적인 축객령에도 실실거리며 따라붙었다. 마침 만나기로 한 사람이 방과 후 보충 수업에 불려가는 바람에 한가해진 참이라고 했다.

나는 잠시 그의 ‘만나기로 한 사람’이 보충 수업을 하는 쪽일지, 받는 쪽일지 생각했다. 피츠시몬스 타임즈에 따르면 근래 그의 마수에 걸려든 사람은 점술 시간 강사였다.

솔직히 안 궁금하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만나기로 한 사람이 점술 시간 강사냐’고 묻는 대신 ‘보충 수업이 혹시 점술이냐’고 묻기로 했다. 두 질문에는 별 차이가 없었지만, 귀족이라는 족속은 다들 점잔 빼길 좋아해서 그랬다.

“저기, 라모스.”

“아리엘 달튼? 커닝엄 교수가 내일 보조마법 실습에서 사용할 마법 옷장 좀 갖다 달래.”

그런데, 내가 운을 떼기도 전에 누군가 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름은 가물가물하지만 어디서 본 것은 같았고, 아마도 일레스티아 출신의 5학년 남학생이었다.

“영원히 어질러진 옷장?”

영원히 어질러진 옷장은 정리정돈 주문을 연습하기 위해 고안된 마도구로, 어떻게 정리하든 문을 한번 닫았다 열면 처음의 혼란스러운 상태로 돌아가는 마법 옷장이었다.

내 기억에 이 시기에 배우는 보조마법은 정리정돈 주문이 아니라 복잡한 매듭을 푸는 주문이었다. 조금 수상했다. 커닝엄 교수가 성적이 좋거나 수업 태도가 좋은 학생도 아닌 나를 콕 집어 심부름을 시키는 것도 말이 안 됐고.

“응. 최대한 빨리 부탁한다고 하셨어. 그럼 나는 이만.”

그러나 할 말을 마친 남학생이 잽싸게 자리를 피했으므로, 나는 그에게 내가 품은 어떤 의문도 따질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별관 꼭대기에 위치한 실습용 마도구 보관실로 향했다. 커닝엄 교수는 성격이 엄청나게 급했고, 벌점에 매우 후했기 때문이다.

나는 마법 전반에 약했으므로 보조마법 실습 과목의 성취도 내세울 만한 게 못 됐다. 즉 벌점 하나가 매우 소중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한 편으론 유급할 성적이든 수석으로 졸업할 성적이든 어차피 엎어지지 않나 싶기도 했다. 근데 혹시 모르는 거니까. 여섯 번째 5학년 1학기에 생긴 다소의 변화는 내 마음 어느 구석에 자리 잡아 계속해서 나를 고문하는 희망이었다.

“너 진짜 한가한가 보네.”

문득 등 뒤로 느긋한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에드가 라모스였다.

“무겁잖아, 영원히 어질러진 옷장. 같이 가 줘야지.”

“참 고맙네. 다음번에 한 번 나돈인 줄 안 척해 줄게.”

“속아주겠다고 미리 얘기하면 무슨 재미가 있어? 사람 바보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라모스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내가 말한 걸 까먹을 때쯤에 해 줄 테니까 걱정 마. 이래봬도 난 그런 부분에선 철저하거든.”

“참 고맙네.”

내 말을 따라하며 빈정거리는 라모스를 적당히 무시하고, 남학생에게서 받은 열쇠로 실습용 마도구 보관실의 문을 열었다. 곧 엄청난 양의 먼지가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장소인 것 같았다.

“앗, 따가워!”

콧속에 들어간 먼지 때문에 한참을 콜록대는데, 갑자기 손아귀에서 굉장한 열기가 느껴졌다. 무심코 손을 털어 내자, 방금 전까지 열쇠였던 것이 불꽃에 휩싸여 떨어지더니 곧 완전히 녹아 바닥에 검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달튼, 괜찮아?!”

뜬금없는 커닝엄 교수의 심부름. 어디서 본 것 같은 5학년 남학생. 사람들이 찾지 않는 별관 꼭대기의 실습용 마도구 보관실. 그리고 가짜 열쇠.

느낌이 좋지 않았다. 빨갛게 달아오른 내 손바닥을 살피는 라모스의 뒤로 새어들어오는 빛줄기가 점점 좁아지는 것이 아주 느리게 보였다.

마침내 무거운 돌문이 꽉 맞물려 닫히고 불길한 '철컥' 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제서야 뭐가 어떻게 된 건지가 파악이 되었는지, 라모스가 나를 보았다. 사정없이 흔들리는 진한 적자색 눈동자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엿 됐다.‘

***

나는 내 입으로 말하긴 그랬지만 적응이 빠른 편이었다. 어디 가도 굶어 죽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제법 들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일을 5번이나 겪다 보니까 더 그렇게 됐다.

라모스도 다행히 패닉에는 빠지지 않은 것 같았다. 오히려 아주 침착하게 우리가 처한 상황과 문짝의 내구성, 건물의 위치 등을 고려했을 때 탈출이나 성공적 구조 요청의 가능성이 얼마나 있는지를 가늠했다.

생각해 보면 그는 왕자의 쌍둥이 형제였다. 나는 그쪽 동네에 대해서는 창작물로밖에 접하지 못했지만 위협받을 일이 많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힘들겠네.”

“마법으로 어떻게 안 될까?”

나돈은 영토의 마나 함유율이 높아 마법이 발달한 나라였다. 쓸 만한 마법사도 그만큼 많았다. 브라이스 나돈과 에드가 라모스도 마탑이 호시탐탐 노리는 인재라고들 들었다.

내가 묻자, 라모스는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난 공격마법 전문이라… 보조마법 수업은 네가 듣잖아.”

“커닝엄 교수님이 무슨 꼴을 보겠다고 학생들한테 문 따는 주문을 가르쳐 주겠어? 차라리 부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구워져서 나가고 싶으면 시도해 볼게.”

그건 마탑이 노리는 인재에게서 듣기에는 사뭇 놀라운 변명이었다.

“조절이 안 돼?”

“마나라는 게 막 쓸 만큼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그러니까, 너무 강한 마법사라 오히려 문제가 된다고? 내가 할 말을 잃자, 라모스는 조금 민망한 듯이 콧등을 긁었다.

“브라이스는 할 수도 있겠지만. 걔는 마력 조절 훈련을 받았거든.”

“너는 안 받고?”

“음,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

라모스가 영원히 어질러진 옷장에서 이불 한 채를 꺼내 펼치며 말했다.

나는 냉큼 라모스가 깔아 놓은 이부자리에 엉덩이를 댔다. 누우려고 했던 모양인지, 베개를 두드려 모양을 잡던 라모스가 잠깐 당황하더니 내게서 약간 떨어진 곳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까, 달튼. 너 클리블랜드한테는 무슨 원한을 산 거야?”

“클리블랜드?”

“커닝엄 교수님을 팔아서 우리를 여기로 유인한 자식 말이야. 마누엘 클리블랜드. 이상한 변장을 하긴 했지만.”

라모스가 입에 올린 이름에 문득 어떠한 깨달음이 섬광처럼 나를 관통했다. 마누엘 클리블랜드. 눈썹이 유달리 짙고 앞니가 툭 튀어나온 일레스티아 출신 남학생.

‘후회하게 될 거야.’ 지랄 같은 전 남친의 음산한 저주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마누엘 클리블랜드는 애덤 월시의 친한 친구 중 하나였다. 왜 지금까지 잊고 있었을까. 이가 절로 악물렸다.

“내일 아침에는 나갈 수 있겠지? 누굴 좀 죽여야 할 것 같아서.”

잇새로 말하자 라모스가 꾸물거리며 조금 더 멀어졌다.

“어쩌면 그 전에 구출될 수도 있지. 네 룸메이트 좀 성실한 타입 아냐?”

나의 착한 친구 브리아나를 떠올려 보았다. 확실히 그녀라면 내가 통금인 열 시까지 돌아오지 않는다면 일말의 지체도 않고 여자 기숙사 사감인 레이디 에드워즈에게 달려갈 것이었다.

“나만 룸메이트가 있는 건 아닐 텐데.”

“어… 랭카스터는 신고 안 할 거야.”

“왜? 네가 통금을 어기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어서?”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라모스가 어깨를 으쓱여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고 나서는 한참 동안 침묵이었다. 애초에 그와는 그다지 친하지 않은 사이였던 탓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놀이용 마도구라도 가져올걸. 집중하기 딱 좋았을 텐데. 대화를 이어 나가기 어려운, 사람과 빛이라고는 내가 라모스의 무등을 타도 닿지 않을 높이에 있는 창문에서 새어 들어오는 것이 전부인 곳에 갇힌 상황이었다. 어쩌면 와이번이 드디어 제 새끼와 눈물의 상봉을 할 수도 있었을는지 몰랐다.

“그, 안 궁금해?”

라모스가 대뜸 말했다. 나는 ‘영원히 어질러진 옷장’에서 깃펜을 꺼내어 손끝에 웃긴 얼굴을 그리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뭐가?”

“내가 왜 마력 조절을 할 수 없는지?”

“훈련을 안 받았다며? 사정이 있어서?”

“그러니까,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말이야.”

“네가 얘기 안 했잖아.”

“그건 그렇지.”

라모스는 허탈한 듯 중얼거렸다. ‘아무튼 안 궁금하다 이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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