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내가 다시 5학년 1학기의 아리엘 달튼이 되고 보름가량이 흘렀다. 말인즉슨, 로즈마리 블로썸이 전학을 온 지 보름이 지났다는 뜻이었다. 지난 5학년 1학기에, 블로썸은 이때쯤 항상 학생회 서기가 되어 뭇 학생들의 부러움과 질투를 한 몸에 받았더랬다.
오늘자 피츠시몬스 타임즈에는, 그러나 블로썸과 관련된 어떠한 기사도 실리지 않았다.
혹시 내 기억보다 신문부가 학생회에 가지는 관심이 적었나 싶어 모든 면을 꼼꼼히 읽어 보았다. 일레스티아가 1학년 시절 황족이던 버릇을 덜 고쳐서 식사 시간마다 누군가 기미하기를 기다리며 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볼턴에게는 중요한 날마다 특정 색상의 속옷을 입는 징크스가 있어서, 스펜서와 시범 대련할 때면 항상 속옷 색이 짙은 빨강이라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스펜서가 최근에 용 사육장에서 새끼 용과 사탕 한 알을 두고 다툰 것도, 브라이스 나돈이 드디어 딜레이니 우드에게 턱을 맞은 것도, 에드가 라모스가 피니건 거리에서 점술 시간 강사와 밀회하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신문부는 변함없이 학생회에게 과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긴 그들의 이름이 한 줄이라도 실리면 판매 부수의 자릿수가 달라지니 알 만은 했다.
하지만 여전히, 블로썸이 학생회 서기가 되었다는 기사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브라이스 나돈이 블로썸과 함께하는 시간을 1초도 줄이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재수 없는 안경남 마르퀴즈 볼턴도 슬슬 블로썸에게만은 재수를 챙기고 있다고 했다. 라모스는 형제의 결정을 굳이 반대하지 않을 것이고, 스펜서의 의견은 없는 것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블로썸이 학생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은 단 하나였다. 켈란 일레스티아.
요즘에는 모든 의문의 끄트머리에 일레스티아가 있었다. 아카데미 생활 10년을 돌이켜 보았을 때 이렇게 일레스티아의 생각을 많이 해 본 적이 없었다. 기분이 묘했다.
아무튼 이번 5학년 1학기는 정말 여러모로 이전과 달랐다. 어안이 벙벙하여 신문을 접어 침대가에 두자, 브리가 냉큼 읽어도 되냐고 물었다.
브리아나와 그녀의 어머니는 존재하지 않는 듯이 사는 대신 무한한 금전적 지원을 받았으므로, 딱히 신문값이 아까워서는 아니고 사러 나가기가 싫은 듯했다. 악성 곱슬 중의 악성 곱슬인 브리아나 모슬리는 매일 아침 머리의 모든 부분에 구겨진 옷이나 종이를 펴는 주문을 걸었는데 그러지 않고서는 창문조차 열지 않았다.
“소독해야 되는 거 아니야?”
내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브리아나는 눈을 세모꼴로 떴지만 그 이상 뭐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것도 나름의 진전인 걸까. 괜히 가슴이 벅차올랐다.
***
스태포드 교수의 약초학은 오늘 휴강이었다. 지난 주 그녀가 목숨처럼 아끼는 온실에 침입한 간 큰 누군가 때문이다. 그녀는 어제부터 작은 유리병에 온실에서 잡은 픽시 한 마리를 넣어 들고 다녔는데, 모든 학생의 얼굴을 대조하여 범인을 찾기 전까지 수색을 멈추지 않을 거라고 했다. 나는 잠옷 차림의 나와 교복 차림의 내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약초학 수업이 휴강이라는 사실은 교실에 도착해서야 알았다. 아무도 내게 알려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족한 사회성의 폐해가 여기서도 나타났다.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처지인 모양인지, 내가 칠판에 쓰인 휴강 공지에 얼이 빠져 있는 동안 켈리 라미레즈가 문 앞을 기웃거렸다. 그녀는 내가 혼자 교실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서 있는 것을 한번 보고, 칠판을 한번 보고는 이내 엄지를 치켜세웠다.
“아리엘, 너도 친구 없구나?”
“노력하자, 우리.”
힘없이 말하자 켈리는 시끄럽게 웃더니 가슴속의 고통을 음악으로 승화시켜야 하겠다며 어깨에 걸린 밴조를 고쳐 메고 어딘가로 갔다.
나는 텅 빈 교실의 아무 자리에나 터덜터덜 앉았다. 다음 수업이 가까워서 굳이 기숙사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또한 나는 부활동도 하지 않았고, 교내의 어떤 사조직에도 속하지 않았으므로 켈리처럼 시간을 때울 만한 장소를 찾기가 애매했다.
혹시 그때처럼 월시를 만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도서관도 영 땡기질 않았다. 기지개를 길게 켜고 책상 위로 뻗은 팔에 볼을 대었다. 잠이나 자야겠다.
“달튼, 마법 회로 설계에 자신이 있기 때문에 잠이 오는 건가?”
“헉, 교수님, 잘못했어요!”
막 잠에 들려는 순간, 난데없이 휴스턴 교수의 불호령이 귀에 꽂혔다.
나는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이어지는 웃음소리에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샌가 옆자리에 카일이 앉아 있었다.
“야, 카일 빌라드!”
“내가 너 때문에 휴스턴 교수 성대모사를 못 끊는다니까.”
내 반응이 울 정도로 웃겼는지, 카일이 눈물을 찍어 내며 말했다.
“아까 복도에서 라미레즈를 만났는데, 네가 쓸쓸히 여기 있다길래 왔어.”
“고마워 죽겠네, 켈리 라미레즈.”
내가 빈정거리자 카일은 또 숨넘어가게 웃었다. 일주일 전과, 그리고 지난 십구 년 하고 사십육 개월과 정확히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폰을 타고 스태포드 교수의 온실에 다녀왔던 적 따위 없었던 것처럼, 카일은 완전히 평소대로였다. 마과학 교실의 의자 쿠션 밑에서 방귀 소리가 나는 마도구를 꺼냈을 때에는 잠시 지난밤의 기억이 꿈이었나 생각했었다. 스태포드 교수가 비명을 지르며 뛰어다니기에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어쨌든 그건 나에게 아주 고마운 일이었다. 나의 좁은 머릿속은 내게 닥친 비극만으로도 가득했고 십구 년 하고 사십육 개월 동안 단 한 번도 없었던 카일과의 갈등은 거기에 더하기에는 너무나 컸던 탓이었다.
우리가 저 때문에 싸웠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블로썸은 변함없이 시시때때로 카일을 불러냈다. 그때에 내가 있었던 적도 있었고, 없었던 적도 있었지만 어쩐지 전처럼 그게 거슬리지는 않았다.
자신을 믿어 달라고 하는 카일의 목소리는 아주 절박하게 들렸다. 또 나는 미우나 고우나 계속 얼굴을 봐 왔고, 앞으로도 마땅히 그래야 할 소꿉친구와 더 이상 어색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가 무언가 말하려고 했을 때 부자연스럽게 흐른 코피가 뇌리를 떠나지 않기도 했다. 어쩌면 그도 나와 비슷한 금제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부끄러웠다. 그의 말마따나 우리는 친구, 그것도 아주 친한 친구인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휘둘린 내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방귀 소리가 나는 마도구를 카일에게 집어 던져, 그의 왼쪽 볼로 하여금 최고의 방귀를 뀌게 함으로써 우리의 사이에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알렸다. 덕분에 안 그래도 아리엘 달튼이라면 질색을 하는(내 눈이 그의 이름만 들어도 감기기 때문이다.) 휴스턴 교수가 내게 조금의 증오를 더 품게 되었지만 뭐.
“아리엘, 잘 거야?”
“잘 거야, 건들지 마…. 어제도 네 시 넘어서 잤어.”
나는 아직도 와이번이 둥지를 찾아가게 할 수 없었다. 오늘은 동이 터 오는 하늘을 바라보며 도대체 나의 어떤 부분이 잘못되었는지를 고민해야 했다.
“그래, 그럼. 잘 자.”
“안 갈 거야? 여기서 뭐 하려고?”
“글쎄. 네 자는 얼굴이라도 그려서 달튼 영지에 보낼까.”
“우리 부모님은 네 얼굴을 그려 보내면 더 좋아할걸.”
좋아하는 게 뭐야, 당장 비싼 액자에 넣어서 중앙 홀에서 가장 잘 보이는 위치의 벽에 걸어 둘 것이었다.
“아무튼 그리지 마. 너는 그림 실력은 나쁘지 않은데, 얼굴 특징을 좀 열받게 잡는 버릇이 있더라.”
“네가 그렇게 생긴 걸 왜 내 탓을 해?”
“말을 말자.”
나는 어깨를 찔러 오는 카일의 손가락을 쳐내며 엎드렸다. 얼굴은 당연히 그의 반대쪽을 향한 채였다.
***
희미하게 정신이 들었다. 마치 물속에 잠겨서 듣는 것처럼 먹먹한 소리가 귀를 울렸다. 여자와 남자가 대화하는 소리 같았다.
여자는 잔뜩 화가 난 듯했다. 확신할 수 없었지만, 나는 막연히 그녀가 블로썸일 거라고 생각했다.
“뭔가 잘못됐어. 어떻게 해도 □□의 □□□가 채워지지 않아!”
“그러니까 내가 □□는 적당히 쓰라고 말했잖아.”
남자 쪽의 목소리는 정확히 알았다. 카일이었다. ‘사랑하는 남자’ 스위치에 불이 들어왔을 때, 혹은 달튼 자작 부부와 빌라드 백작 부부가 지켜보는 식사 자리에서 포도 주스를 고블렛에 따르고 멋있는 척 건배사를 읊을 때 깔아 내는 저음.
그들이 쓰는 단어 중 일부는 부자연스럽게 뭉개져서 잘 들리지 않았는데, 조금이라도 집중하면 의식이 더 멀어졌다. 마치 의도적으로 내가 그것들에 대해 곱씹을 수 없도록 막는 것 같았다.
“□□□는 내일 저녁 늦게 별관 2층 복도에서 □□□야. □□ □□ □□□니까 놓치지 말도록 해.”
“고마워, 카일. 이번에는 정말 나를 도와주려는 모양이네.”
“당연하지. 나는 이 □□의 □□ □□□인걸. 널 위해 존재하는.”
카일이 하는 말을 반도 알아듣기 힘들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귀를 기울였다가, 급격하게 졸음이 밀려오는 통에 다른 것들을 떠올려 내기 위해 노력했다. 스펜서의 사탕과 볼턴의 빨간 속옷, 나돈의 부어오른 턱 같은 것을, 부단히도.
하지만 깨달은 시점에서는 이미 너무 늦어서, 가느다랗게 이어지던 나의 얕은 의식은 결국 수마에 발목이 잡혀 깊은 암흑으로 끌려 들어가고 말았다.
다시금 눈이 뜨였을 때, 카일은 여전히 내 곁에 있었다. 로즈마리 블로썸을 위해 존재하지만 아리엘 달튼의 곁에.
“너 침 흘리더라.”
“…….”
“왜 그렇게 봐? 너무 잘생겼어?”
“응, 너 잘생겼어. 너무까진 아니고 적당히.”
기왕 선심을 써서 그렇게 말해 주었더니, 카일은 구레나룻을 만지는 척하면서 손으로 빨개진 귀를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