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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9화 (9/178)

9화

온실의 모든 면이 다채로운 형광빛으로 발광하는 마법 식물로 빼곡했다. 미적 감각이 뛰어난 스태포드 교수답게 색색의 꽃과 녹색 잎사귀의 조화가 완벽했다.

천장을 가득 메운 넝쿨에는 군데군데 주먹만 한 빛무리가 있었다. 거기서 반짝거리는 가루 같은 것이 작은 폭포처럼 쏟아졌다. 꽃과 춤과 장난을 좋아하는 픽시들이었다. 그것들은 우리가 온실에 들어서자 혼비백산하여 사방팔방으로 흩어졌지만, 너무 빛이 나는 바람에 어디 숨었는지 다 보였다.

개중 용감한 픽시 몇 마리는 나와 카일의 가까이까지 왔다. 나는 그것이 바쁘게 날갯짓하는 아래로 손을 모아 최대한 많은 요정의 가루를 받아 보려 했다. 입자가 너무 고왔기 때문인지 남는 게 없었다.

“너무 예뻐.”

속삭이듯 말했다. 눈이 뱅글뱅글 돌아갔다.

“이제 나 월시 아니야?”

“아니야. 넌 켈란 일레스티아야.”

일레스티아는 내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잘난 사람이었으므로, 이는 가히 엄청난 칭찬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근데 그렇게 말하자, 카일은 어쩐지 기분이 별로 좋아지지 않은 것 같았다.

“왜 하필 켈란이야?”

“응?”

“언제부터 걔를 그렇게 좋아했어? 전에는 너무 잘나서 재수 없다면서.”

“카일 빌라드, 뭐가 문제야? 나는 일레스티아랑 밥도 못 먹어?”

언제부터 일레스티아를 좋아했냐고? 그런 걸 따지자면 나도 할 말이 많았다. 우리 사이에 흐르는 험악한 기류를 느꼈는지, 슬쩍슬쩍 모여들던 픽시들이 확 흩어졌다.

“너야말로,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뭘?”

“블로썸 말이야, 너 걔랑 잘되어 가고 있다며. 내가 그걸 켈리 라미레즈한테 들어야 해?”

“뭐?!”

카일이 경악하여 소리쳤다.

“나 올해 들어 라미레즈랑 마주친 적 한 번도 없어! 걔는 대체 뭘 알고 그렇게 말하고 다니는 거야?”

“켈리만 그러는 것도 아냐. 리즈랑 브레넌도 알고, 브리, 모슬리도 알고, 심지어는 월시도 안다더라! 네가 블로썸이랑 데이트하느라 수업을 하도 빼먹어서 징계받은 거!”

“아리엘, 그건….”

“나만 몰랐어! 너를 제일 친한 친구로 생각했던 나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

카일은 내 눈을 피해 온실의 구석을 봤다. 말을 고르는 모양새였다. 그의 의도가 어땠든 간에 나에게 그건 자신에게 걸린 모든 의혹을 인정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블로썸을 사랑하는 것도, 그녀로 인해 벌점의 홍수에 빠지게 된 것도, 모든 정황을 숨긴 것도 변명의 여지가 없지만 나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마음속 단어 사전에서 최대한 둥그런 단어를 찾는. 열받게.

“카일 다미앙 빌라드, 똑바로 말해.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사랑하는 사람 생기면 털어놓기로 했잖아, 서로.”

“아냐, 블로썸은… 나한테….”

“잘 안 들리는데.”

내가 비꼬아 던진 말에 카일은 아주 고통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순간 죄책감이 들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지만 곧 이겨 냈다. 잘못한 쪽은 카일이었다. 십구 년, 아니 십구 년에 사십육 개월을 더한 우정을 헌신짝처럼 내다 버린.

“아리, 나는….”

마침내 그가 뭔가 결심한 듯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난데없이 그의 코 밑으로 검붉은 핏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카일, 너 피 나!”

나는 허둥지둥 주머니를 뒤져 손수건을 찾았지만 잠옷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씨발.’ 카일은 거칠게 욕을 뱉으며 손등으로 코를 문질렀다. 핏자국이 그의 손등과 인중에 넓게 퍼졌다.

“이만 돌아가자.”

약간의 침묵이 흐르고 그가 대뜸 말했다. 엄청나게 피곤한 목소리였다.

도로 라일라의 등에 올라타 내 방 창문가에 당도하기까지,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카일과 함께하는 침묵은 대개 아주 편했지만 지금은 그러지가 않았다.

“아리엘.”

창문을 닫기 전에, 그가 문득 나를 불렀다. 목이 잔뜩 메어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 줘. 나를 믿어 줘. 절대 너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을 거야. 너를 슬프게 하지도 않을 거고.”

“…….”

“부탁이야.”

“…….”

“네 말대로, 우리는 친구잖아.”

달이 하필이면 카일의 등 뒤를 밝히고 있어서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그가 울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숨이 턱 막혔다.

소심하게 손을 흔들어 그를 배웅했다. 내 나름대로 그건 화해의 제스처였는데, 카일에게도 그렇게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

일레스티아의 ‘제이든 스펜서를 통해 일정을 전달하겠다’는 이야기가 무슨 뜻이었는지는, 오래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모슬리, 거기서 뭐 해?”

일과를 마치고 방에 돌아왔을 때, 브리아나가 창가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내가 카일과 오밤중에 나갔다 온 시간 동안 열려 있던 창 때문에 브리는 감기에 단단히 걸렸다. 그래서 당분간 바람은 부채질도 사양이라던 그녀였는데, 희한한 일이었다.

“달튼, 이리 와 봐. 얘가 뭘 가지고 있는데, 절대 안 주려고 하는 거 있지.”

창밖의 무언가를 손짓하는 브리의 어깨 너머로 기웃거려 보았다.

“헉, 귀여워!”

거기엔 자그마한 용이 날아다니고 있었는데, 까만 비늘이 반질거리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새끼인 듯했다. 목에는 돌돌 말린 종이 같은 것을 매달고 있었다.

새끼 용은 종이를 낚아채려는 브리의 손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움직였다. 빼앗기지 않으려는 의지가 확고했다.

“우리 게 아닌가 보지.”

“그치만 아까부터 여길 떠나질 않는걸.”

브리아나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새끼 용은 그런 그녀를 놀리기라도 하듯이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도는 세리머니를 선보였다. 그러더니 브리 뒤쪽에 선 나를 빤히 봤다. 눈이 아주 투명하고 동그란 것이 어릴 적 갖고 놀던 유리구슬 같았다.

“널 찾는 건가?”

브리가 창가에서 몸을 물리고는 나를 대신 끌어다 놓았다. 그러자 새끼 용은 가까이 다가와서 배를 들이밀고 날갯짓하기 시작했다. 어서 목에 걸린 것을 가져가라는 듯한 태도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새끼 용의 목걸이에서 말린 종이를 뜯어냈다. 이내 ‘톡’ 하는 소리와 함께 종이가 떨어지고, 거기에 가려져 있던 깜찍한 하트 모양의 펜던트가 드러났다.

“고마워, 클레이.”

펜던트에 새겨져 있던 것이 이름이 맞았던 모양이었다. 날개를 빠르게 파닥거리며 좋아하는 새끼 용이 퍽 귀여웠다. 나는 교복 재킷 주머니에서 사탕 두어 개를 꺼내 용에게 건넸다.

클레이를 보낸 사람이 내가 생각하는 사람과 같다면 그에게도 선물이 될 것이었고, 그렇지 않아도 클레이가 잘 먹을 것이었다.

작년에 내가 들은 수업 중 하나는 ‘용의 부화와 사육’이었는데, 사육장의 용들 중 사탕을 싫어하는 녀석은 한 마리도 없었다.

할 일을 마친 새끼 용은 몸뚱이에 비해 사뭇 두툼한 꼬리로 사탕 봉지를 겨우 휘어 감고는 멀리 날아갔다. 나는 브리아나의 채근에 말린 종이를 풀어 보았다.

“‘토요일 16시 마도구 제작 실습실?’ 너 누구랑 비밀 연애하니?”

“독서 모임 공지야.”

호들갑을 떠는 룸메이트에게 적당히 둘러대고 종이를 구겨 버렸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

‘아리엘 선배.’ 4학년 켄드라 브래들리가 더미의 목을 날리기 위해 목검을 바짝 잡고 자세를 취했다가, 이내 풀어내고는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제이든 스펜서 님이 선배한테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요.”

“왜 나는 ‘선배’고 스펜서는 ‘님’이야, 켄드라?”

“선배, 용 탈 줄 아세요?”

“넌 가만 보면 깍듯한 건지 깍듯하게 버릇없는 건지 모르겠어.”

켄드라가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의 말마따나, 멀리서 제이든 스펜서가 누가 봐도 명백하게 이쪽을 향해 서 있었다.

그의 덩치는 너무나도 거대했으므로 쳐다보지 않기가 힘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스펜서는 성큼성큼 망설임 없는 걸음걸이로 가까워졌다. 어찌나 힘차고 딱 떨어지는 동작으로 걷는지, 지나가는 길목에 바람이 쌩쌩 부는 것 같았다.

‘대박.’ 켄드라가 중얼거렸다. 밀루아 출신의 그녀는 스펜서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용에 탄 스펜서의 모습이 표현된 목각 인형도 가지고 있다고 했다(참고로, 우리 상단에서도 그거의 짝퉁을 싼 가격에 팔았는데, 아주 잘 나갔다.).

스펜서는 전쟁 영웅은 아니었지만, 밀루아는 물론 나돈과 일레스티아를 통틀어 유일하다는 ‘용의 감응자’였다. 그는 아카데미 1학년이던 열다섯 살에 이미 대륙 내 모든 용을 길들였다.

용은 그 강함과 포악함으로 언제나 대륙에 절망을 불러일으킬 준비가 된 존재였다. 용과 대화할 수 있고, 길들일 수 있다는 것은 그를 영웅이라 부르기 충분한 요소였다.

게다가 공작가의 적자인데다, 잘생기기까지 했다? 끝이지. 듣기로는 밀루아 중앙 사교계에서 그를 흠모해 보지 않은 그 나잇대 귀족이 없다고 했다.

나는, 그가 대단하다고는 생각했지만, 흠모할 정도까진 아니었다. 켄드라와 달리 한미한 자작가의 딸인 내가 수도에서 열리는 연회에 참여해 본 것은 데뷔탕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달튼. 브래들리.”

“어, 응. 스펜서, 안녕.”

아무튼 요새 블로썸의 남자들과 왜 이렇게 엮일 일이 많은 건지 모르겠다. 나는 떨떠름하게 스펜서의 인사를 받았다. 켄드라는 엄청 괴상한 ‘히이이익!’ 소리를 냈는데, 아마 ‘제이든 스펜서 님이 나를 알고 계시다니!’를 대체하는 비명인 듯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스펜서도 학생회였다. 전교생의 이름을 미들네임 단위까지 꿰고 있는 일레스티아가 아니더라도, 같은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이름 정도는 충분히 알아둘 만했다.

“고마워.”

스펜서가 작게 고개를 숙였다. 일레스티아에게 지 맘대로 말하는 버릇이 있다면, 스펜서에게는 머리와 꼬리를 떼고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아마 클레이에게 쥐여 준 사탕 얘기겠지.

“네 취향이야?”

“맛있었어.”

“다음에 또 줄게.”

그렇게 말하자, 스펜서는 아까보다 약간 밝은 무표정이 되어 돌아갔다. 밀루아의 용기사가 고작 사탕 하나 가지고 자작가 영애에게 감사라니, 정말 성실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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