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주말을 맞이한 피츠시몬스 학생의 반 이상은 피니건 거리에서 만날 수 있었다. 거기가 학생 수준의 공간이동 주문만으로 충분히 도달 가능한 거리에 있는 유일한 번화가였던 탓이다.
나는 남친의 전 여친과 어울리는 사람이 어디에 있냐고 황당해하는 브리아나의 다리에 반 시간이나 매달려 함께 나왔다.
브리는 머리가 좋은 만큼 고집이 아주 셌다. 내가 브리더러 월시와 당장 헤어지라고 말한다면, 그녀는 내가 틀리고 자신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꾸역꾸역 월시와 함께할 것이었다.
세 번째 3월에 내가 브리를 예정보다 빠르게 월시와 헤어지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웃기지도 않는 예언가 시늉을 했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헛똑똑이 브리아나 모슬리는 나를 그녀의 영혼의 멘토로 삼았는데, 나는 그게 너무 싫었다.
나는 브리와 우정을 나누고 싶었다. 일방적인 숭배를 받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래서 매달렸다. 브리는 정에 약했다. 가랑비에 옷 젖듯 파고 들어가는 것이 여섯 번째 아리엘 달튼의 계획이었다.
“쟤는 또 저러고 있네.”
본관과 별관을 잇는 다리를 통해 중정을 건널 때 브리아나가 말했다. 그 말에 밖을 내다보았더니, 일레스티아가 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자주 있는 일이야?”
“너는 좀 늦게 나가는 편이니까 많이 못 봤을 수도 있겠다. 일곱 시쯤에 지나가면 매일 저러고 있어. 뭐 하는 건지 모르겠네.”
브리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그제야 남친의 전 여친과 평범하게 대화했다는 것을 의식했는지, 뭐 씹은 표정을 지었다.
***
“모슬리, 혹시 ‘패치 노트’가 무슨 뜻인지 알아?”
“‘패치 노트?’”
브리아나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깊은 고민에 빠질 때의 버릇이었다.
“‘노트’는 알겠는데, ‘패치’가 뭔지 모르겠어서.”
“일랑 풀 중독일 때 쓰는 패치 같은 건가? 왜, 목이나 팔에 붙이는.”
“그러면 ‘노트’랑 이어지지 않잖아.”
그건 그래. 브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의 얼굴이 테이블에 놓인 음료에서 올라오는 김 때문에 흐릿하게 보였다.
저래 보여도 맛은 탄산음료와 똑같다고 했다. 심지어 이가 시릴 정도로 차다나. 끓는 것처럼 보이는 건 마녀의 물약이라는 콘셉트를 지키기 위한 특수 효과가 가미된 결과란다. 하긴 컵이 아니라 솥단지에 나오더라.
“근데 괜찮아, 달튼?”
“뭐가?”
“블로썸 말이야. 너희 썸 타는 거 아니었어? 너랑 빌라드랑.”
내가? 카일이랑? 너무 놀라서 입이 쩍 벌어졌다.
“누가 그래?”
“누가 그런다기보단… 아니야?”
“아니야! 걔랑은 그냥 친구야! 엄청 친한!”
“아… 그래?”
브리아나는 조금 김이 샜다는 듯 국자 모양의 빨대로 음료를 휘저었다. 그러자 음료가 담긴 솥단지에서 갑자기 ‘이히히!’ 하며 찢어지는 웃음소리가 났는데, 마치 나를 놀리는 것 같았다.
나는 카일과 내가 바로 이웃한 영지에서 태어나 걸음마도 채 못 뗐을 무렵부터 같이 있었고, 알몸으로 한 욕조에도 들어갔을 만큼 스스럼없는 사이라고 허둥지둥 둘러댔다.
말하고 보니 욕조 얘기는 오버인 것 같아서 거기까지만 했다.
“그런데 블로썸이 왜?”
“역시 신경 쓰이는구나?”
“아니거든.”
“그럼 너 설마 아직도….”
“그것도 아냐! 샐러맨더의 무지개 비늘에 걸고!”
이번에 깔깔거린 것은 솥단지가 아니라 브리였다. 그녀는 맞은편에 앉은 내게 목젖이 보일 정도로 크게 웃었는데, 나를 놀리는 게 맞았지만 봐주기로 했다.
그렇게 폭소하는 브리는 정말 오랜만이어서 마치 우리가 즐겁게 지내던 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잠시 동안.
피츠시몬스 아카데미행 공간이동 마법진으로 향하는 길에, 나와 브리는 나돈의 쌍둥이가 로즈마리 블로썸과 놀러 나온 것을 목격했다.
브라이스 나돈은, 피츠시몬스 타임즈가 묘사한 대로, 블로썸의 곁에 딱 붙어 이미 온갖 먹거리와 선물로 가득한 그녀의 손아귀에 하나라도 더 쥐여 주기 위해 안달을 하고 있었다.
그의 미끈하게 빠진 턱은 의외로 멀쩡해 보였다. 채프먼 교수의 치료술이 내 기억보다 굉장하거나, 아직 딜레이니 우드에게 맞지 않았거나. 내 감으론 후자였다.
에드가 라모스는 그런 쌍둥이 형의 두 발짝 정도 뒤에서 따라가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블로썸보다 마도구를 판매하는 노점에 더 관심이 많아 보였다.
몇 가지 마법 수식을 자동으로 그려 주는 깃펜을 신중하게 살피던 라모스의 눈이 문득 노점의 알록달록한 차양 너머 나에게 닿았다.
“달튼! 모슬리!”
우리를 알아본 라모스가 신나게 손을 흔들었다. 뜻밖의 장소에서 만났다고 해서 반가울 사이는 별로 아닌 것 같아서, 나는 영혼 없이 고갯짓으로 답해 주었다.
나의 착한 룸메이트 브리아나 모슬리는 그러지 않았다.
“안녕, 그러니까, 나돈?”
“라모스야.”
“라모스.”
나와 라모스가 동시에 말했다.
“역시 바로 구별하네. 나한테 마음 있어?”
“미안한데, 나는 눈썰미가 너무 좋아서 모나한 교수의 애완 위습도 전부 구별 가능해.”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내가 나돈의 쌍둥이를 구별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을 10년 동안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평생 인기 많은 남자로 살아왔을 라모스의 쓸데없이 높은 자존감에 보탬이 되고 싶지도 않았고.
“위습을 어떻게 구별해? 이목구비가 없잖아!”
브리아나가 경악했다.
“밝기가 조금씩 다르거든.”
뻔뻔하게 대꾸하니, 라모스는 갑자기 나타난 모나한 교수가 고블린의 거시기라도 들이댄 마냥 질려 하고는 일행을 쫓아 사라졌다.
***
브리아나의 말대로 일레스티아는 아침마다 중정에 앉아 있었다. 거기에 붓으로 그려 놓기라도 한 것처럼 첫날 내가 본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중정으로 가려면 내 방에서 거의 건물 한 채를 돌아야 했기 때문에, 나는 또 마과학 교재를 이용해 그에게 내 의사를 전했다. 점심 이후에 잠깐 보자는 내용이었다.
항간에 일레스티아는 분 단위로 스케줄이 짜여 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돌았으므로, 그와 우연이 아닌 방식으로 만나려면 선수를 쳐야 했다.
쪽지를 펼친 일레스티아가 고개를 꺾어 위를 봤다. 나는 까치발을 하고 손을 흔들어 내 위치를 알렸다.
“괜찮아?”
입모양만 크게 하여 물었더니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듯했다.
“오전 수업 마치고 마과학 교실로 갈게!”
“점심을 먹자는 게 아니라… 됐다.”
최근에 몇 번 대화하면서 깨달은 건데, 얘는 남의 말도 지 맘대로 듣고 자기 말도 지 맘대로 하는 경향이 있었다.
되게 잘생겼고 황태자여서 참 다행이었다. 얼굴과 지위로 상대의 분노를 조절할 수 있을 테니까.
분 단위 스케줄이 짜인 사람답게, 일레스티아는 휴스턴 교수가 수업을 마치고 삼십 초가 채 지나지 않았을 때 후광과 함께 나타났다.
“달튼, 데리러 왔어.”
교재를 챙기던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나는 어쩐지 골이 아파오는 기분에 일레스티아의 팔뚝을 잡아끌었다.
“나가서 기다려, 나가서.”
“뭐야, 켈란? 네가 왜 아리를 데리러 와?”
어느샌가 근처에 카일이 와 있었다. 카일은 내 목덜미로 팔을 둘러 안듯이 했는데, 가두기라도 하듯 강한 힘이었다. 그를 따라 블로썸이 반걸음 뒤에 섰다.
퍽 수상한 구도였다. 이제 복도를 지나가던 학생들도 우리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민망해서 죽을 것 같았다.
바로 보이는 카일의 옆구리를 세게 찔러 밀어내 보았다. 꿈쩍도 하지 않을뿐더러 애초에 내 손가락은 그의 단단한 몸에 어떤 자극도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건 꽤나 이상한 느낌이었다.
칠삭둥이로 태어난 카일은 잔병치레가 많아서, 어렸을 땐 키도 내가 더 크고 덩치도 컸었다.
빌라드 백작부인은 그녀의 작은 아들이 어디 가서 맞고 다닐 것이 걱정되어 장난감 검조차 들지 못할 나이에 검술을 가르쳤는데, 그마저도 꼽사리로 배운 내가 훨씬 뛰어났을 정도이니 어지간했다(부인께는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나는 나에게 그런 재능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언제 이렇게 컸지, 도토리만 하던 게.
아무튼 나는 카일에게 아직 골이 나 있었으므로, 수업 내내 그 쪽은 쳐다도 보지 않았더랬다. 카일을 사이에 두고 내 반대편에 블로썸이 앉아 있어서 더 그랬다.
“안녕, 달튼. 교재를 챙기는 걸 잊어버려서, 카일이 같이 보자고 했어.”
블로썸은 이렇게 말했다.
“얘랑 친한 미케일라 메이나드가 양호실에 갔거든.”
카일이 재빨리 덧붙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달튼’과 ‘카일’이라는 두 가지 호칭에서 느껴지는 사뭇 다른 거리감에 신경이 쓰였다.
하긴 나는 블로썸과 통성명도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카일은, 소문에 의하면, 바람둥이 대마왕 브라이스 나돈의 손아귀에서 로즈마리 블로썸 공주를 구출하기 위해 그리폰을 탄 왕자였고.
“맘대로 해.”
그래서 나는 멋있게 말했다.
“굳이 내게 설명할 필요는 없잖아.”
웃기게도, 그러자 카일은 엄청 안절부절못했다. 의자를 끌어 이쪽에 바짝 붙어 앉고는 내 마과학 교재 위로 펜을 놀려 필담을 시도했다. 구구절절한 변명이 쓰였다. 마치 자신의 의지로 블로썸과 함께하는 게 아니라는 것처럼.
근데 그건 솔직히 나에게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가 카일에게 골이 난 건 그가 나에게 자꾸 무언가를 숨겨서지, 블로썸을 사랑해서가 아니었다.
비록 그녀가 내 졸업을 막는 주체일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네가 무슨 상관이야?”
그래서 이렇게 말했더니, 카일은 부지불식간에 엄청 상처받은 표정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