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일레스티아는 월시를 ‘애덤 윌리’라고 불렀고, 그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과거에나 있어 마땅한 일이었다.
혹시 여섯 번째의 일레스티아에게는 지난 5년에 대한 기억이 있고, 그것이 어떤 변수로 작용해 블로썸과의 스캔들에 휘말리지 않게 된 걸까?
어쩌면 모든 것이 우연일 수 있었다. ‘윌리’는 ‘월시’에서 나오기에 완전히 뜬금없지는 않았다. 직전에 거시기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어쩌면 그의 기억이 온전하다고 한들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나는 ‘제4의 벽’으로 인해 반복되는 5학년에 대한 어떤 말도 할 수 없었으므로, 일레스티아도 마찬가지라면 우리가 용이나 할 줄 안다는 전음술에 깨우치기 전까진 각자가 처한 비극을 나누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아무튼 궁금하긴 했다. 이 지옥에 떨어진 것이 나 혼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이 기분을 약간 나아지게 만들기도 했다.
벼랑 위에 핀 꽃처럼 멀기나 했던 학생회장에게 다소의 내적 친밀감이 생겼다. 얼굴 볼 일이 생기면 내가 아는 가장 재미있는 농담을 해 줘야지.
***
오늘은 마과학 수업을 듣지 않는 날이었다. 즉 나의 악우이자 환상의 장난 파트너 카일 빌라드를 만날 수 없는 날이라는 뜻이었다.
대신에, 나는 5학년 학생 중 가장 음악적으로 조예가 풍부한 켈리 라미레즈와 각자에게 배정된 맨드레이크를 아슬아슬하게 뽑아 정신적 충격을 주지 않을 정도의 짧은 소리를 내었다가 집어넣는 식으로 작곡을 시도했다.
“아침에 봤어? 피츠시몬스 타임즈.”
우리가 하는 꼴을 보고 거의 기절할 뻔한 스태포드 교수가 진짜 맨드레이크 화분 대신 합성 소재로 된 장난감 맨드레이크를 안겨 주자, 삽시간에 무료해진 켈리가 문득 말했다.
“그 나돈이 정말로 바람둥이 생활을 청산했대?”
내 물음의 끄트머리에는 ‘벌써부터?’가 생략되어 있었다. 다년간의 경험에 따른 판단대로라면 브라이스 로즈마리 나돈은 매년 블로썸의 마음을 얻기 위하여 숭고한 희생을 감수해 왔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켈리는 그와 같은 나돈 왕국 출신이었으므로 브라이스 나돈과 약간의 친분이 있었다. 그녀가 소리 죽여 답했다.
“며칠 전부터 여기저기서 뺨 맞고 다니느라 꼴이 말이 아니야.”
“뺨을 맞아?”
“몰라. 진정한 사랑을 깨달아서 더 이상 놀이는 못 하겠다나. 재미 봤던 사람들 죄다 찾아가서 한 대 치고 끝내자고 하고 다녔나 봐. 멍청한 짓이지. 딜레이니 우드랑도 만나 놓고.”
와. 나는 처음으로 듣는 흥미진진한 소식에 감탄을 감출 수 없었다. 딜레이니 우드는 4학년의 그리폰 크리켓 선수로, 작년 수확의 달 연회에서 팔씨름으로 우리 학년까지 제패한 여자애였다.
어쩐지. 그러고 보면 관계를 정리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 때쯤 브라이스 나돈은 필수불가결한 경우가 아니면 기숙사에서 두문불출하곤 했다. 우드에게 맞았으면 턱이 3도는 틀어졌겠는걸.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즈마리 블로썸이.
“정말 대단하네, 블로썸.”
입 밖으로도 내뱉었다.
“대단하지. 걔한테 맛이 간 게 나돈만은 아니니까.”
“스펜서, 볼턴, 라모스, 일레스티아?”
당연한 이름들을 나열했더니 켈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웬 학생회? 내 말은, 카일 빌라드 말이야. 네 소꿉친구.”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났다. 복잡한 심경을 안고 도착한 보조마법 실습실에서 나는 아주 익숙한 턱주가리를 발견했다.
“뭐야, 그 꼴은?”
“오, 아리엘, 너였구나. 보다시피 내가 지금 앞이 잘 안 보여서.”
왜 ‘턱주가리’냐면, 그가 잘게 땋은 머리카락을 죄다 늘어뜨려 시야를 가린 우스꽝스러운 형상의 가발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밖으로 드러난 것은 콧대와 하관이 전부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콧대와 하관이 카일 빌라드의 것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봐 온 세월이 어지간했어야지.
“노먼 케이시가 출석 대신 해 줄 때마다 훈련 제외시켜 준댔거든.”
노먼 케이시는 그리폰 크리켓 부의 주장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의 헤어스타일이 카일이 쓴 가발과 비슷했던 것 같기도 했다. 비록 얼굴의 반을 머리카락으로 가리진 않았지만.
“걔 머리는 이것보다 멋있었던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어. 내 얼굴은 너무 잘생겨서 노먼이 아니라는 게 금방 들켜 버리니까.”
“그렇구나….”
나의 의욕 없는 대꾸에 카일이 한참을 낄낄거리다가 말했다.
“그래도 좋지 않아? 이렇게 또 가장 사랑하는 친구끼리 실습도 하고.”
“하나도 안 좋아.”
무릇 남자가 간직한 비밀이란 연인일 때에는 신비로운 매력의 한 종류가 될는지 모르겠지만 친구일 때에는 전혀 아니기 마련이었다.
나는 뚱하니 입술을 내밀고 카일이 있는 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실습 테이블에 놓인 거북이에게 가속 주문을 걸기 위해 노력했다.
켈리는 카일이 블로썸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하루에도 몇 번씩 블로썸을 만나기 위해 수업을 빼먹는다고 말했다.
그로 인하여 쌓인 벌점이 임계치를 넘어, 주말을 전부 투자해 온 건물의 화장실을 혼자 청소해야 할 판이라고도 했다.
내가 기억하는 카일은 지금껏 한 번도 스스로를 망쳐 가면서까지 블로썸에게 헌신한 적이 없었다.
이것도 여섯 번째 일레스티아의 변화가 불러온 나비 효과일까?
“아리, 왜 그래?”
내 상태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카일이 귀에다 대고 속달댔다.
나는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온 그의 머리통을 가속 주문에 실패한 대신 강화 주문이 걸린 거북이로 밀어냈다. 거북이는 버둥거리며 물갈퀴가 달린 축축한 손으로 카일의 코를 쓰다듬었다.
“너 나한테 말할 거 없어?”
결국 참지 못하고 화를 내고 말았다. 카일은 거북이의 나름대로 뾰족한 손톱을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다 말고 불현듯 진지해졌다.
“어디서 무슨 헛소문을 듣고 온 거야?”
“그냥….”
그냥, 나는, 네가 솔직해졌음 좋겠어. 네가 나를 정말 소중한 친구로 여긴다면 부디 혼자 고민하고 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 줬으면 해.
네 눈에 무엇이 보이는지 알고 싶어. 네 진짜 마음이 어떤지 궁금해. 내가 너의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서 전해 듣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밀물처럼 차오른 것들 중에 겨우 한마디만을 뱉어 낼 수 있었다. 잘 모르는 남자애가 화장실을 갔다 온다고 나갔다 와서는 카일에게 ‘네가 빌라드야? 블로썸이 불러.’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블로썸이 불러. 마법 주문과도 같은 여섯 글자에 카일은 나중에 얘기하자는, 어떤 것도 약속하지 않는 말만 남기고 실습실을 떴다.
황량한 보조마법 실습실에 나와 함께 버려진 거북이는 엉망진창으로 꼬인 주문 탓에 거대해졌다. 마녀의 거울처럼 까맣게 닦인 눈에 잔뜩 짜증이 난 아리엘 달튼이 비쳤다.
***
나를 잘 알고, 나도 잘 안다고 생각했던 소꿉친구는 나에게 너무 많은 것을 숨기려고 했다. 항상 나의 편이 되어 줬던 룸메이트는 수십 개의 계절을 지나 결국 또 나를 증오하게 되었고.
더구나 최초의 5학년으로부터 약 46개월이 지난 지금에도 반복되는 시간에 대한 일말의 실마리조차 잡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머리 쓰는 데에는 영 젬병이었지만, 그놈의 ‘벽’ 때문에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불안정한 주문으로 키운 거북이만큼 커다란 절망이 부지불식간에 나를 덮쳤다. 월시를 닮은 더미라도 두들겨 패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을 듯해서, 나는 수업이 없는 시간임에도 검술 훈련장을 찾았다.
훈련장에는 스스로 기사입네 하길 좋아하는 학생들이 각고의 노력으로 익힌 자신만의 필살기를 더미에 펼치거나, 드워프의 키를 재는 대련을 하고 있었다.
수업에서 본 듯한 얼굴들에게 적당히 아는 체를 하고 그늘에 묻힌 구석자리를 찾았다. 볼턴과의 대련 이후로 내게 성기사의 검에 대해서 묻기 위해 귀찮게 구는 부류가 생겼기 때문이다.
“요새 자주 보네.”
가볍게 준비운동을 하고 목검을 집어 드는데, 그늘 속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너 내 스토커야?”
“하하.”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장난스럽게 묻자 일레스티아가 짧게 웃었다. 학생회장님은 웃음소리마저 반듯하네. 심상한 감상이 들었다.
볼턴만큼은 아니어도 쓸 만한 검사임이 익히 알려진 일레스티아지만, 이번엔 딱히 검을 휘두르는 데에 목적을 두고 훈련장에 온 것은 아닌 듯했다.
그는 내가 더미와 마주 보고 있는 왼편의 벽에 기대 책을 읽고 있었다. 일전의 두껍고 낡은 책이었다.
“왜 도서관이 아니라 여기서 그러고 있어?”
“도서관은 책 읽는 곳이잖아.”
뭔 소리래. 나는 혀를 차며 목검을 고쳐 잡고 더미를 가로 베었다. 가만 보면 얘도 참 애가 정신이 온전하지만은 않았다. 블로썸과 천생연분인 게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달튼, 자세가 되게 좋은데. 멋있어.”
“고마워. 혹시 반했어?”
“응.”
황당해져서 쳐다보자, 일레스티아는 입술만 움직여 ‘왜?’ 했다.
왜는 무슨 왜야.
어디 가서 그러고 다니면 큰일 난다고 말해 줄까 했지만 곧 죄다 귀찮아졌다. 어차피 일레스티아는 블로썸의 연인이 될 거고 그의 이런 면으로 인해 속 썩이게 되는 건 블로썸이지 내가 아니었다.
잠깐 실없는 대화를 나눈 것 외에 우리는 일말의 교류도 않고 각자의 용건에 집중했다. 나는 몸을 혹사하여 잡념을 날렸고, 일레스티아는 책장을 아주 조금 넘겼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훈련장의 중앙에서 대련 중이던 학생들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듣자하니 부상자가 나온 모양이었다.
허둥거리던 무리 중 하나가 용케 일레스티아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일레스티아는 읽던 책을 연습용 목검 거치대에 얹어 두고 우아한 걸음걸이로 그쪽을 향했다.
1할의 우연과 9할의 약화 주문으로 내가 쥐고 있던 목검이 부러졌다. 하릴없이, 나는 목검을 교체하기 위해 연습용 목검 거치대와 겸사겸사 일레스티아의 책을 찾았다.
생각했던 대로, 너덜거리는 가죽 커버에 감싸인 책은 나로서는 퍽 생경한 문자로 가득한 고서였다. 별로 위로가 되지는 않았지만, 일레스티아도 나처럼 독서에 어려움을 느낀 것 같았다. 종이를 메운 문자 패턴을 분석하여 책의 내용을 알아보기 위함이었는지 여기저기에 끼워 놓은 메모지가 빼곡했다.
개중 커버에 붙은 한 장이 비교적 뻣뻣했다. 최근에야 겨우 제목을 번역해 낸 모양이었다.
패치 노트
그답게 가지런한 글씨로, 일레스티아는 이렇게 눌러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