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5화 (5/178)

5화

‘굉장한데.’ 그는 흥미롭다는 듯이 입술에 웃음을 담았다.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쟤는 저런 얼굴이 상대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을 알고나 있는 걸까?

블로썸 생각이 났다. 볼턴은 적어도 그녀에게만은 재수 없는 안경남이 아닐 것이었다. 어쩌면 난봉꾼으로 익히 알려진 나돈의 쌍둥이보다 더 느끼해질는지 모를 일이었다.

문득 그 꼴이 보고 싶어져서 블로썸이 했던 것처럼 허공을 두드려 보았다. 당연히 로즈마리 블로썸이 아닌 아리엘 달튼의 손끝에서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대신 무어 교수가 소리쳤다. ‘이제 두 사람씩 짝을 지어서 모의 대련을 시작한다!’ 나는 아주 황망해져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누구와도 눈을 맞출 수 없었다.

“볼턴!”

나는 학생들이 맞붙을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앞서 가기 시작한 볼턴을 절박하게 붙잡았다.

“미안한데 나랑 대련 좀 해 줘.”

“진심이야?”

완전히 진심이었다. 후배들의 동정을 한 몸에 받으며 무어 교수로부터 ‘달튼, 같이 할 사람이 없으면 이리 나와라. 내가 상대해 주마.’라는 말을 듣는 것보단 일레스티아의 성기사와 지더라도 잘 싸우는 게 나았다.

볼턴이 황당하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피츠시몬스 아카데미 재학 10년 동안 그가 그렇게 웃긴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무튼 그는 조교의 입장에 있었으므로, 나의 도전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일레스티아의 성기사는 검에 손속을 두는 타입이 아니었다. 나는 언젠가의 페드로 캔트렐처럼 무자비하게 두들겨 맞았다.

하지만 그 비참한 상황에서도 얻은 것이 있었다. 대련이 끝나고 내려오는 내게 여자 후배 한 무리가 다가와 용기와 실력에 감탄했다며 앞으로 수업을 함께 듣기를 제안했다. 나는 멍이 든 것이 분명한 옆구리를 부둥키고 되게 멋있는 선배인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아리엘, 너 마르퀴즈 볼턴한테 깨졌다며?”

“아깝게 패배했다고 해 주라.”

카일이 내 얼굴을 보자마자 시비를 걸어 왔다. 삼십 분도 채 지나지 않은 사건이건만 벌써 말이 닿은 모양이었다. 하기는 피츠시몬스의 소문난 마당발 카일 빌라드는 교내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모르는 것이 없었다.

실은 교내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어도 그만이 알고 있는 것이 있었더랬다. 카일 빌라드는 대체 언제쯤 나에게 그가 숨긴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 줄까. 괜히 서운해져서 입술이 댓 발 나왔다.

“너한테서 약 냄새 엄청 나.”

“그럼 좀 떨어져 앉아.”

“어떻게 네 유일한 친구에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

내 머리카락이나 소매에서 나는 냄새를 맡더니 얼굴을 찌푸리기에, 쏘아붙이니 우는 시늉을 했다. 더 상대해 줄 기운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카일을 한번 노려보고 책상 위로 엎드렸다.

“아리.”

“휴스턴 교수님이 지적하면 네가 나 죽었다고 해 줘야 돼.”

“많이 아파?”

그걸 말이라고.

“네가 20분 내내 일레스티아의 성기사한테 목검 마사지 풀코스로 받아 봐.”

교차한 팔 위로 이마를 대고 꿍얼거렸다. 맹렬한 졸음이 밀려들었기 때문에 뒷말은 거의 입 안으로 먹어 들어갔다. 카일은 아직 치고 싶은 장난이 남았는지 내 이름을 두 번 정도 더 불렀지만 대꾸가 없자 금방 조용해졌다.

곧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주위가 어두워졌다. 카일이 교복 재킷을 벗어 덮어 준 모양이었다. 덕분에 휴스턴 교수가 카일 빌라드의 옆자리에 놓인 수상한 옷더미에 대해서 전혀 주목하지 않고 교실을 나설 때까지 푹 잘 수 있었다.

***

저녁을 대강 먹고 도서관에 갔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 기숙사로 돌아가 쉬고 싶었지만, 주말까지 대륙 남부 마물의 생태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야 했다.

지난 5년 동안, 시험 문제는 매번 달랐지만 과제는 항상 같았다. 벌써 다섯 번째 작성하는 보고서다 보니까 금방 펜이 움직였다. 이러다 열 번째쯤에는 논문을 쓸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면 지금 이렇게 모나한 교수의 변태 성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와이번의 짝짓기 방식에 대해 서술하고 앉았는 행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어차피 도루묵이 될 텐데.

실없는 생각이나 하다가 그만 과제를 할 의욕이 뚝 떨어져, 나는 기지개를 길게 켜고 주변 풍경에서 흥미로운 것을 찾아내기 위해 눈을 굴렸다.

엄청나게 긴 도서관 열람 테이블에는 나와 주인을 잃은 가방 두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잘 보니 그중 하나는 내가 오늘 아침에도 끔찍한 병균이 묻은 아리엘 달튼의 가방으로부터 구해 준 브리아나 모슬리의 가방이었다.

브리 본인이나 브리의 흔적을 도서관에서 발견하는 것은 그다지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피츠시몬스에서 가장 똑똑한 학생을 꼽으라고 하면 양손을 쓰기 전에 이름이 나오는 브리는 대충 일곱 명의 발가락까지 꼽아도 가망이 없는 나와는 다르게 공부를 열심히 했다. 시험 기간에는 거의 도서관에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 가방의 주인은 그렇지 않았다.

“아리, 오랜만이야.”

별안간 아침 식사로 나온 빵에 바를 버터를 목구멍에 처바르기라도 한 듯 느끼한 목소리에 내 이름이 담겼다.

“달튼이라고 불러 줄래, 월시? 귀가 썩을 것 같거든.”

“그렇게 쌀쌀맞을 것까진 없잖아. 우리가 서로한테 어떤 존재였는데.”

“어떤 존재였든 무슨 소용이야? 지금은 아닌데. 넌 나한테 쌀쌀만 맞고 싸대기는 안 맞았다는 거에 감사하며 살아야 돼. 매일 아침 여자 기숙사 쪽으로 물 떠놓고 기도드려. 내가 너 안 죽이게 해 달라고.”

가랑이가 물렁해진 검술 훈련 더미를 떠올려내며 험악하게 쏘아붙이자, 월시가 흠칫 몸을 떨었다. 한심한 자식.

“브, 브리아나 모슬리 때문에 질투 나서 이러는 거 다 알아.”

“…….”

대거리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주춤거리며 가방 두 개를 챙기는 월시 대신에 반 정도 완성된 과제물을 불구대천의 원수나 보듯이 노려봤다.

“전에도 말했듯이 모슬리는 그냥 잠깐 머무르다 지나가는, 정류장 같은 거야. 너는 나한테 돌아갈 고향이고. 그러니까 그만 화 풀고….”

“착각하고 있나 본데, 월시.”

그러나 브리까지 걸고 넘어가며 개짓거리를 하는 마당에는 도무지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내가 화가 난 상대는 네가 아니야. 너 같은 병신을 3년이나 만난 내 자신이지. 너는 나한테 화를 낼 만큼의 가치도 없어. 알아들었어?”

“야, 아리엘….”

“거시기가 작으면 귓구멍도 작니? 달튼이라고 부르랬잖아. 기왕이면 아예 안 불러 주면 더 좋고.”

“…….”

애덤 월시는 귀 끝까지 빨개져서 한껏 씩씩거렸으나, 그 이상으로 나에게 뭔가 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랬다간 검술 훈련 더미 꼴이 났을 테니, 그에게도 그것이 다행이었다.

‘후회하게 될 거야.’ 도서관을 떠나기 직전에, 월시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장식적 동작을 가미하여 더욱 화려해진 손가락 욕설로 그에 화답했다.

월시가 쿵쿵거리는 걸음으로 사라지자, 책장 사이에서 인기척이 났다. 곧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마냥 팔꿈치를 어깨 높이까지 들고 걸어 나오는 사람이 있었다.

한 손아귀에는 아주 두꺼운 책이 들려 있었다. 제목은 잘 읽히지 않았는데, 가죽 커버의 낡은 정도로 판단하자면 고서 같았다.

“일레스티아?”

“미안, 달튼. 몰래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었어.”

확실히 일레스티아는 그런 부류라고 할 수 없었기에 적당히 고개를 저어 아무렇지 않음을 피력해 주었다.

“피츠시몬스 타임즈에 아리엘 달튼이 전 남친의 거시기를 흉보았다는 기사가 실리는 건 아니겠지?”

“물론이지.”

나는 장난으로 한 말인데, 대꾸하는 일레스티아는 아주 엄숙한 태도였다. 잘생긴 입술에 잘생긴 검지가 가 닿았다.

“애덤 윌리의 가슴 아픈 국부 사정은 무덤까지 가져가도록 할게.”

“‘월시’야, 일레스티아. 나는 네가 말하지 않아도 내 이름을 알길래 전교생을 꿰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농담 섞인 타박에, 일레스티아는 수줍게 웃고는 들고 있던 책과 함께 자리를 떴다.

그 빛나는 미소에 정말로 눈이 부시는 듯한 기분이 들어 눈두덩이에 주먹을 대고 있다가, 문득 머리를 강타하는 어떤 사실에 나는 작은 비명을 손바닥 두 개로 겨우 삼켰다.

‘애덤 윌리’는 내가 두 번째로 5학년이 되었을 때 브리와 함께 만든, 월시의 얼굴을 한 돼지 캐릭터의 이름이었다. 여섯 번째의 일레스티아가 알 리가 없는.

***

[R♡, 나돈의 사막에도 꽃은 피는가.]

지난 3일, 암운이 드리운 피츠시몬스 아카데미에 한 줄기 빛으로 내려온 천사가 있었습니다. R-할렐루야-블로썸이었죠.

장미의 이름을 가졌지만 제비꽃과도 같은 청초함을 지닌 이 특례 입학생은 콧대 높은 피츠시몬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습니다.

항간에는 얼어붙은 심장의 귀공자가 드디어 마음을 녹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희 취재팀이 보기에 그 말은 아직 시기상조였습니다(물론 곧 그렇지 않게 될지도 모르지만요!). 오히려, 그녀의 마법 같은 매력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은 따로 있었죠.

뜨거운 정열의 나라에서 자라 불꽃같이 타오르는 눈동자로 많은 학생과 심지어 교직원의 마음까지 불사지르던 바로 그 남자, B.나돈입니다.

(중략)

익명을 요구한 학생회 관계자는 취재팀에 ‘그녀를 위해 모든 지저분한 인연의 실을 끊어내려고 한다’며 ‘당당하고,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이 그녀에게 있음을 밝혔다’고 전했습니다.

“저 거지같은 하트는 뭐야.”

브리아나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동감이었다.

신문부의 글렌 차베즈가 꼭두새벽부터 온 기숙사를 돌아다니며 ‘호외요!’를 부르짖기에 브리 것까지 두 부를 받아 왔다. 블로썸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다고 했다.

이는 다른 다섯 번의 3월에도 꾸준히 있어 왔던 일이었으므로 조금도 놀랍지 않았다. 정확히는, 놀랍지 않았었다.

브라이스 나돈이라고? 켈란 일레스티아가 아니라?

졸음 때문에 잘못 읽었나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마찬가지였다. 피츠시몬스 타임즈 특유의 열받는 필력으로 블로썸과 함께 이름이 오른 사람은 나돈의 막내 왕자이자 에드가 라모스의 쌍둥이 형, 브라이스 나돈이었다.

다른 다섯 번의 3월에는 한 번도 일레스티아가 아닌 사람이 기사의 주인공이 된 적이 없었으므로, 이것은 정말이지 이례적인 경우였다.

이번엔 뭐가 달라진 거지?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문득 도서관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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