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마침내 피할 수 없는 오후가 왔다. 고블린의 생식기에 대한 모나한 교수의 열띤 강의에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어서, 나는 점심을 잘못 먹은 듯하니 양호실에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나한 교수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는지 나를 무시하려고 했지만, 당장 나올 것 같다며 간절하게 호소하자 끝내는 나가 보라고 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양호실 입구에서 마법 인형이 건네주는 명부에 이름을 적고, 나는 눈에 보이는 아무 침대에나 누웠다. 내 무게를 감지한 침대가 짧게 진동하며 왼편에 매달린 화상기에 나의 상태를 기록했다. 거기에 따르면 나는 82.4퍼센트의 확률로 꾀병이었다. 17.6퍼센트는 우울증이었다. 징그럽게 똑똑한 자식.
꾀병이라는 글자가 보고 싶지 않아 오른쪽으로 돌아누웠더니 마침 그쪽 침대에 앉아 다리에 부목을 대고 어설프게 붕대를 감던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아, 하필.
“스펜서, 다리 다쳤어?”
예의상 아는 척은 해 주기로 했다. 검술 수업을 같이 듣기 때문이다.
“금 갔어. 그리폰에서 떨어졌거든.”
“넌 용도 타고 다니잖아.”
“용을 타고 크리켓을 하지는 않지.”
제이든 스펜서가 무뚝뚝한 얼굴로 성실하게 대답했다. 스펜서는 카일과 같은 그리폰 크리켓 부의 부원이었다. 용기사라는 멋들어진 별명이 없는 카일과는 노움과 오우거만큼의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랬다.
새삼 용 크리켓이라는 스포츠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채프먼 교수님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치료 주문은 걸었어. 하루 정도 대고 있으면 회복될 거래.”
내 허리통만 한 종아리에 처참하게 매달린 부목을 내보이며, 스펜서가 말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보다가 이윽고 이불을 목까지 추켜 덮었다.
블로썸 같았으면 상냥하게 웃으며 고쳐 감아 줬겠지. 하지만 나는 로즈마리 블로썸이 아니라 아리엘 달튼이었고, 상냥하게 웃는 법도 금 간 다리에 깁스를 하는 법도 잘 몰랐다.
문득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눈을 떴다.
“뭐야?”
“아프면 이거 먹어, 달튼.”
눈앞에 손톱만 한 캐러멜이 놓였다. 나는 어쩐지 민망한 기분이 되어, 이불을 두툼하게 끌어 올려서 82.4퍼센트의 확률로 꾀병이라고 쓰인 화상기를 그의 시야에서 차단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산만한 덩치와는 끔찍하게 안 어울리는 캐러멜을 바지 주머니에서 꺼내 먹으며, 스펜서는 절뚝절뚝 양호실을 나갔다.
***
폭풍의 전학생에 대한 소문이 식당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나는 잠시 동안 전학생이 남자이고, 학생회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내가 무사히 졸업하는 상상을 했다.
“오는 길에 봤는데 엄청나게 예쁘더라.”
그리고 그 상상은 엘리자베스 맥카시가 그녀의 불같은 연애 상대인 브레넌 스톡스에게서 식판을 받아 들며 입을 엶과 동시에 무너졌다.
“우리 자기, 많이 먹어.”
“내가 너희들하고 식사 안 하는 이유가 이거야.”
나는 토하는 시늉을 했다. 리즈가 다 들리게 브레넌에게 속삭였다. ‘쟤가 남자 친구랑 헤어진 지 얼마 안 되어서 좀 예민해.’
“저녁은 학생회장이랑 먹는대. 일레스티아가 언제부터 그렇게 전학생을 챙겼대? 막 첫눈에 반한 거 아냐?”
“걔는 원래 모든 사람을 챙기면서 아무도 안 챙기잖아.”
브레넌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의외로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역시 귀족은 못 되네.’ 불현듯 우리와 마찬가지로 블로썸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던 것이 분명한 뒤 테이블의 누군가가 지껄였다.
블로썸이 일레스티아의 에스코트를 받아 식당에 발을 들이고 있었다. 꿀타래 같은 금발과 너무 반짝거려서 은발처럼 보이는 백금발의 남녀는 마치 어떤 황녀가 어릴 적에 가질 법한 도자기 인형 세트 같았다. 브레넌의 툭 떨어진 턱을 리즈가 스푼으로 쳐 올렸다.
블로썸이 나타나자 학생들은 아까의 두 배보다 더 술렁거렸다. 나는 올해도 졸업하긴 글렀다는 생각에서 오는 우울감을 떨쳐 내기 위해 스테이크를 잘게 자르는 행위에 집중했으므로 일레스티아와 블로썸이 바로 근처에 앉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오늘 안내 고마워. 정말 아름다운 곳이더라.”
블로썸의 낭랑한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나는 우리가 아주 가까이 있음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일레스티아는 예의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는데, 광장을 기어 다니는 개미에게도 내놓을 법한 종류였다. 아직 블로썸에게 매료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차피 시간 문제였다. 지난 5년 동안 일레스티아는 단 한 번도 블로썸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까.
“내일도 부탁할 수 있을까? 부끄러운 얘기지만, 교실 위치가 아직 헷갈려서.”
“기숙사로 팸플릿을 보내 둘게.”
부드러운 거절이었다. 그런 반응을 염두에 두지는 않았는지, 블로썸은 찰나 당황한 것 같았다. 하지만 금방 기세를 회복해 애교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말 안 될까?”
재차 물으며, 블로썸은 손을 들어 허공을 두어 번 두드렸다. 저게 뭐야? 그 동작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에 골몰하는데, 갑자기 일레스티아의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었다.
일정 각도 이상으로 올라가는 법이 없는 그의 완벽한 입꼬리가 약간 더 당겨졌다. 호박색 눈동자에 찬란한 빛이 돌았다. 목소리는 반 톤이 낮아졌다. 언젠가의 카일처럼, 스위치라도 켜진 듯이 그는 단숨에 사랑하는 남자가 되었다.
“농담이야. 내일 아홉 시까지 네 방으로 갈게.”
사뭇 유혹적인 말투였다. ‘진짜 첫눈에 반한 거 아냐?’ 리즈가 내 팔뚝을 쳐 대며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에 팔뚝을 쓰다듬으며 리즈와 브레넌을 보았다. 두 사람은 지극히 평소와 같아서 그만 정신이 혼미해졌다.
방금 블로썸이 허공을 두드리던 건 못 봤나? 그렇게 대놓고 움직였는데? 일레스티아가 부자연스럽게 변한 것에 대해서도, 인식하지 못했을까? 아무도?
아무튼 어떤 의문일랑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빌어먹을 제4의 벽이란 것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나는 관자놀이를 찔러 오는 통증에 괴로워하며 말 대신 스테이크를 짓씹어 넘겼다.
***
검술 훈련장에 모인 오십여 명의 학생들 중에서 내 눈에 익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5학년 여학생 중에 이번 학기에 검술을 듣는 것은 내가 유일했고, 남학생 중 내가 얼굴과 이름을 매치시킬 수 있는 것은 하도 유명해서 전교생이 아는 제이든 스펜서와 마르퀴즈 볼턴이 전부였던 것이다. 나는 삼삼오오 모인 후배 애들 사이에서 뻘쭘하게 준비 운동을 시작했다. 이렇게 보면 카일의 말도 틀린 것이 없었다. 친구 좀 사귀어 둘 걸.
소꿉친구인 카일만이 알고 있던 점이었지만, 나는 검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는 편이었다. 적어도 평범한 귀족 아가씨 수준은 아니었고, 달튼 영지에서는 준기사 취급을 받았다. 근데 왜 졸업반이 되도록 검술로 학점을 딸 생각을 않았냐 하면 약간 쪽팔리지만 이미지를 바꿔 연애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항상 바지를 입고 검이나 휘두르는 왈가닥에게 반할 남자는 거의 없을 거라고 나를 꾸짖었다. 카일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데 있어 그런 부분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으며, 내게 남자 친구가 생기지 않는 이유는 다른 데에 있다고 말했다. 그 다른 데가 어디인지를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까지 찾을 수가 없었으므로, 나는 검을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니까 놀랍게도, 마법처럼 인생 최초의 남자 친구가 나를 찾아왔다.
빌어먹을 애덤 월시. 내가 5학년이 되어서야 모든 욕심을 버리고 달튼의 말괄량이로 회귀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그 개자식의 탓이었다. 그 비열한 자식은 덩치만큼 마음도 작아서, 내가 검에 일가견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가랑이를 부여잡고 도망칠 것이 분명했다. 나는 월시와 죽도록 싸운 겨울 방학 동안 지옥의 봉화처럼 계속해서 타오르는 분노에 사로잡혔고, 마침내 수강 정정 기간에 검술을 시간표에 끼워 넣었다. 어쨌든 결말은 이별이었다.
월시를 생각하니까 머리에 피가 몰렸다. 나는 연습용 목검을 거칠게 휘둘러 더미의 가랑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타격했다.
밀루아의 용기사 제이든 스펜서와 일레스티아의 성기사 마르퀴즈 볼턴은 사실 검술 수업에 참여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의 실력이 무어 교수를 한참 웃돌았던 탓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학생의 역할보단 조교의 역할을 수행했다. 하기는 나 같아도 내 밑에 스펜서와 볼턴이 있었다면 봉사 점수를 퍼 주고라도 어떤 식으로든 써먹었을 거였다.
두 사람은 훈련장을 돌아다니며 학생들이 어영부영 검을 휘두르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 멀리 스펜서가 어떤 학생의 팔꿈치를 짚어 타격 자세를 교정하도록 돕는 것이 눈에 띄었다. 이제 3학년쯤이나 되었을까 싶은 여학생의 통통한 볼에 작은 홍조가 떠올랐다. 좋을 때다.
“달튼, 더미의 급소가 완전히 뭉개졌는데, 무슨 짓을 한 거야?”
갑자기 말을 걸어 오기에 그야말로 기함했다. 두 발짝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긴 회색 머리를 하나로 묶고 가는 테의 안경을 쓴 마르퀴즈 볼턴이 코웃음을 쳤다. 한심하다는 투였다.
“올려치기를 연습 중이었어.”
“올려치기는 충분히 한 것 같은데… 그보다 너 검을 쓸 줄 알던가?”
“어디 가서 죽어 나자빠지지 않을 정도는.”
볼턴은 키가 상당히 컸고 자세도 꼿꼿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사람들을 내려다보곤 했다. 모르긴 몰라도 그가 재수 없는 안경남이라는 평가를 받는 데에 이것이 한몫했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