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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3화 (3/178)

3화

내 기분이 어떻든 간에 여섯 번째의 3월에도 피츠시몬스 아카데미는 참 아름다웠다. 나는 조금도 감흥이 없는 눈으로 사계절의 꽃과 나무가 모두 심어진 중정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거기에서 익숙한 인물을 발견했다.

켈란 일레스티아가 여러 색의 나뭇잎이 떨어지는 사이에 앉아 있었다. 고귀한 외모와 자세 때문인지 귀퉁이가 썩어 들어가는 나무 벤치가 벨벳 천이 덮인 소파처럼 보였다.

그 역시도 나만큼 꿈도 희망도 없는 눈을 하고 있었는데, 저럴 거면 뭐하러 저기서 저러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한편으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는 생각도 했다.

켈란 일레스티아는 너무도 완벽한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인지 사는 게 질려서 죽겠다는 듯한 표정을 자주 지었다.

학생회장이라는 직책이 있는 만큼 학생들을 대할 때는 사무적인 매너와 정을 능숙하게 섞었지만 모두가 그것이 진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정도였다.

로맨스 소설을 많이 읽은 부류가 그의 얼어붙은 심장을 녹여 보겠다며 달려드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자신만이 그의 가면 같은 상냥함을 깨달은 유일한 사람이자 구원자라는 착각에 빠져든 애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한 다스만 아니었으면, 먹힐 수 있었을는지도 몰랐다. 클리셰에는 이유가 있었으니까.

아무튼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일레스티아는 여전히 지루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니까, 로즈마리 블로썸을 만나기 전까지는 확실히 그랬다. 다시금 그녀의 신통방통한 재주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블로썸이 전학 오고 나서는 본 적이 없는 권태였다. 나는 블로썸의 전학을 다섯 번 겪었으니까, 5년 동안 본 적이 없다고 여겨도 되었다.

어깨에 대충 멘 가방을 뒤져 마과학 교재의 귀퉁이를 조금 찢었다. ‘거기서 뭐해?’ 몇 글자를 끄적이고는 창밖으로 집어 던졌다.

가벼운 쪽지는 꽃잎처럼 날아 그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형편없이 추락했다. 다행히, 용케도 일레스티아는 그걸 목격했다.

블로썸이 전학 오기 전에, 일레스티아와는 아주 가끔 실없는 대화를 나누던 사이였다. 그가 카일과 제법 친했고, 나와 카일이 소꿉친구였기 때문이다.

쪽지의 내용을 확인한 일레스티아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발견했다. 입가에 양손을 대고 뭐라고 말했는데, 거리 때문인지 들리지가 않았다.

나는 그가 한 것처럼 양손을 들어 귀에다가 댔다. 일레스티아는 헛기침을 한번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기다리고 있었어!”

뭘 기다려? 쪽지를 하나 더 쓸까 했지만, 이미 씹던 껌을 감싸 버리기 위해 너무 많은 귀퉁이를 찢어 댄 터라 마과학 교재에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나는 다시 멍한 표정이 되기 시작한 일레스티아에게 대충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

마과학 교실에서는 카일이 내 자리를 맡아 두고 있다가 뒷문을 열자마자 나를 불렀다. 휴스턴 교수는 눈에 띄는 사람들에게 주로 질문을 던지는 편이었으므로 최대한 구석 자리에 앉는 것이 좋았다.

나는 의자에 앉기 전에 재빨리 쿠션 밑에서 방귀 소리가 나는 마도구를 꺼내었다. 이 짓도 여섯 번째인데, 카일 빌라드는 도무지 질리는 법이 없었다.

“예리한데, 아리엘 달튼.”

“지겹다, 카일 빌라드.”

카일이 낄낄거리며 나의 진심을 비웃었다.

“아까 일레스티아가 중정에서 멍 때리고 있더라.”

나는 휴스턴 교수가 칠판에 그리는, 거의 미술 작품처럼 보일 정도로 복잡한 수식을 옮겨 그리다가 포기했다. 얼핏 카일의 공책을 보니 복사해 붙여넣기라도 한듯 완벽한 모양새였다. 지긋지긋한 재능충.

“그 자식 취미잖아, 그거.”

“누구 기다리고 있었대.”

카일의 펜이 멈추었다. 그는 아주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누구를?”

“내가 어떻게 알아? 걔랑 친한 게 너지, 나냐.”

‘그건 그렇지. 그러니까 친구 좀 사귀지 그랬어.’ 카일이 한심하다는 듯 대꾸했다. 나는 카일이 나를 비난하기 위해 한눈을 판 사이 그가 그리던 수식의 기호 몇 개를 몰래 바꿔 두었다. 카일은 10년 내내 좋은 성적을 받았으니 1년쯤은 엿을 먹어 봐도 괜찮을 것이었다.

“빌라드, 떠드는 걸 보면 완벽하게 이해한 모양인데, 나와서 설명 좀 해 보거라.”

휴스턴 교수가 나의 모자란 사회성을 주제로 노래를 지어 부르던 카일을 발견하고 말했다. 카일은 순식간에 청결 주문에 당한 우리집 고양이 릴루처럼 시무룩해져서 교단으로 향했다.

꼴좋다. 나는 브리가 아침에 선보인 손가락 욕을 휴스턴 교수의 사각지대에서 마음껏 날렸다.

울며 겨자 먹기로 나온 것치고는 의외로 술술 설명을 이어 나가는 카일의 얼굴을 보다가, 문득 미래이지만 과거이기도 한 며칠 전에 부치지 못한 편지가 떠올랐다.

그때에 카일은 일레스티아를 구타하여 징계를 받았다. 말이 구타지, 기세만은 거의 죽이려고 든 것에 가까웠다고 했다. 일레스티아가 단련한 무인이었기 때문에 목숨을 부지했던 거라고.

아카데미 밖에서 벌어진 일이었다면 곧장 일레스티아로 끌려가 형장의 이슬이 되었을 대사건이었다.

암만 외국인이라고는 해도 카일은 소국인 밀루아의 한낱 귀족, 그것도 백작가의 차남이었고 켈란 일레스티아는 대 신성 일레스티아 제국의 황태자였기 때문이다.

다만 아카데미가 어느 국가의 영토에도 속하지 않아 일레스티아나 밀루아의 법을 들이대기에 어려움이 있었고, 피해자의 상처가 그다지 깊지 않았으며, 강력하게 선처를 요구하고 있었으므로 징계 선에서 마무리가 되었다고 했다.

내가 아카데미를 떠난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카일과 이야기를 해 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오후 늦게 로즈마리 블로썸이 전학 올 것이다. 카일과 다섯 남자는 그녀와 지독하게 엮여 바빠질 예정이었으니 기회가 많이 없었다.

나는 약 팔듯 화려한 설명을 마치고 돌아오는 카일에게 점심을 같이 먹자고 제안했다. 내가 쿠션 밑에 집어넣은 방귀 소리가 나는 마도구를 꺼내며, 카일이 흔쾌히 수락했다.

***

피츠시몬스 아카데미의 점심시간은 각자의 스케줄에 따라 유동적이었다. 조리와 서빙을 모두 마법 인형이 도맡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학생들 입장에서도 마법 인형의 채용은 환영할 만했다. 요리의 질과 양에 기복이 없다는 점은 한창 때인 10대들에게 아주 중요했다.

카일이 나와 점심시간을 맞추기 위해서는 참여 중인 운동부 훈련을 미뤄야 했기에, 그는 마과학 수업이 끝나자마자 식당에서 만나자는 말만 남겨 놓고 사라졌다.

그리폰을 타고 공중에서 즐기는 그리폰 크리켓 부는 예비 선수 없이 단 11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마 빠져나오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식당을 향해 최대한 느릿느릿 걸었다. 평소 같았으면 오늘의 메뉴를 확인하기 위해 중앙 게시판으로 달려갔겠지만, 이미 오늘의 메뉴는 물론 다음 주의 메뉴까지 알고 있었으므로 그럴 필요가 없었다.

오늘 부식은 모든 피츠시몬스 학생들이 환장을 하는 슬라임 푸딩이었다. 평소에는 매점에서나 그것도 조금씩 파는 건데, 가끔 학생 복지 차원에서 부식으로 나올 때가 있었다.

식당 앞에 와글와글 모여든 인파가 슬라임 푸딩의 인기를 증명했다. 그래도 학생회랍시고, 나돈의 쌍둥이 중 동생이 중구난방 움직여 대는 학생들을 통솔해 줄을 세우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 아카데미는 별 쓸모없는 데에까지 마력을 쓰고 있으면서 왜 이런 것은 마법으로 처리하지 않을까.

카일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므로 줄을 설 필요는 없었다. 나는 적당히 앉을 자리를 눈으로 살피며 에드가 라모스를 방해하지 않게끔 줄을 빙 돌아갔다.

라모스 쪽을 스쳐 지나갈 때에, 그가 눈짓으로 겨우 인사를 건넸다.

“안녕, 달튼. 너까지 이 아비규환에 낄 마음은 없어 보여서 다행이야.”

“낄 마음으로 가득하니까 걱정 마, 라모스. 카일 빌라드를 기다리는 거야.”

그러자, 그가 놀란 눈을 하고 나를 쳐다봤다. 마치 못 들을 걸 듣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왜 그래?”

내가 묻자, 라모스는 뭔가 굉장히 할 말이 많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윽고 고개를 저었다. 줄의 중간쯤에서 1학년 학생들이 드잡이질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

“슬라임 푸딩이 진짜 슬라임으로 만들어진 거 알고 있어?”

“아주 입만 열면 거짓말이지.”

“아냐, 진짜야. 너는 상단주 딸이면서 왜 그런 것도 몰라?”

카일이 진지한 표정으로 타박했다. 웩. 나는 입맛이 뚝 떨어져서 디저트 스푼을 내려놓고 그를 노려봤다.

그러자, 그 틈을 타 카일은 반 정도 먹은 내 푸딩을 제 주둥이에 쏠랑 털어 넣었다.

“이제 별로 안 먹고 싶지? 네 거 내가 먹는다.”

“벌써 먹었네, 개자식아. 일부러 그랬지?”

딴청을 피우는 카일을 세게 때리고 싶었다. 우리의 대화를 듣고 금 같은 슬라임 푸딩을 버리고 돌아온 주변의 학생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래서 무슨 대단한 용건이 있어 소인에게 점심시간을 할애하셨나이까?”

나의 분노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카일이 말했다.

“섭섭하다, 카일 빌라드. 우리가 용건이 있어야만 밥을 먹는 사이니?”

“용건 없어도 밥 먹는 사이 되고 싶었으면 진작에 고백을 했어야지. 설마 오늘이 그날인가?”

“네가 그 모양이니까 작년에 저주를 당한 거야.”

카일은 작년, 그러니까 나에게는 6년 전이 되는 4학년 1학기에 ‘흑마법과 주술’ 수업을 듣는 후배의 저주 대상이 된 적이 있었다.

그녀의 아주 친한 친구가 카일을 짝사랑했는데(카일은 퍽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그 마음을 가지고 놀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해당 분야에 대한 연구만 19년째인 카일 빌라드 전문가 아리엘 달튼이 보기에 그가 정말로 후배의 마음을 가지고 놀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후배가 마음이 있었는지 어쨌는지도 몰랐을 것이었다.

그는 원래가 장난에 스스럼이 없고 개인 공간이 좁은 사람으로, 소위 말하는 죄를 짓는 타입이었다. 밀루아에 있을 때에도 그의 그러한 태도에 헛된 마음을 품는 이들이 남녀노소 다양하게 많았다.

정말 부끄러운 사실이고 죽어도 카일에게 알릴 수 없는 비밀이지만, 나도 그런 적이 있었더랬다.

경험을 반석으로 삼아 지금은 세상이 멸망하고 단둘만 알몸으로 남아도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 망정이지.

결과적으로, 나는 카일과 매점에서 선데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사 들고 식당을 나올 때까지 로즈마리 블로썸이나 다섯 번의 시간 여행에 대해 운도 떼지 못했다.

혹시 카일이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고 있을 경우 브리가 그랬던 것처럼 미쳤다고 할 것이 걱정되어서는 아니었다(카일이 보기에 정말 흐뭇한 짓을 했을 때 그는 나를 ‘정신 나간 아리’라고 불렀으므로, 나는 카일에게 미친 사람 취급받는 데에는 아주 익숙했다.).

말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 주제에 관해서는, 도무지.

심정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신체적인 문제였다. 최초의 졸업 파티에서 느꼈던 감각과 동일한 것이 나의 온몸을 지배했다. 블로썸이 플래그네 뭐네 영문을 알 수 없는 단어들을 나열했을 때, 밧줄로 묶이기라도 한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었던.

마치 나는 그런 것을 입에 담을 수 없는 사람인 것만 같았다. 꾸역꾸역 말하려고 하면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왔고, 아교로 딱 붙인 마냥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으며, 단지 하나의 생각만이 나의 뇌를 관통했다.

아리엘 달튼은 ‘제4의 벽’을 넘지 못하도록 설정되어 있다.

제4의 벽이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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