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5학년 1학기의 브리아나 모슬리는 나와 전 남친을 공유하는 사이였다. 정확히, 지금 브리에게 현 남친인 애덤 월시가 나의 전 남친이었던 것이다.
가진 거라고는 반반한 상판뿐인 월시 그 개자식은 나와의 3년짜리 연애가 순탄치 않게 끝날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4학년 2학기부터 슬슬 브리에게 발을 뻗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브리는 나와의 연애 기간과 월시가 그녀를 간본 기간이 겹친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미 끝난 연인에게 구질구질하게 군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나 또한 월시가 일단은 아직 내 남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되도 않는 수작질에 홀라당 넘어간, 그런 줄만 알았던 브리아나 모슬리에게 과히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5학년 1학기가 되어 우리가 기숙사 개편으로 같은 방을 쓰게 되기까지 이어져 왔다.
브리와 본격적으로 친해지기 시작한 것은 여름 방학쯤부터였다. 브리아나 모슬리는 일레스티아에서 성스럽기로 제법 이름이 난 신관의 사생아로, 어머니로부터 (진짜) 협박을 당한 아버지가 아카데미에 쑤셔 박은 처지였다. 고향에 돌아가 봐야 적뿐이니 그녀는 황금 같은 여름 방학에 아카데미에서 체류하는 것을 택했다. 그리고 그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여름 방학 동안, 애덤 월시 그 개자식은 바람이 나서 돌아왔다.
공공의 적이 있으면 뭉치기 마련이었다. 우리는 금방 누구도 떼어 놓을 수 없는 단짝이 되었다.
아무튼 5학년 1학기의 아리엘 달튼은 브리아나 모슬리의 절친이 아니었다. 나는 머쓱한 듯이 뒷머리를 긁고 다시금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브리아나는 악몽이라도 꿨냐고 물었다. 로즈마리 블로썸의 초점이 나간 눈동자가 떠올랐다. 거기서 밑바닥 없는 공포가 느껴졌었다. 그러고 나니까 9개월 전이었지. 나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그건 정말로 악몽이었던 걸까? 그 9개월은, 그러니까 블로썸이 전학을 와서 학생회의 공주님이 되고, 월시가 바람이 나는 바람에 브리와 절친이 되고….
낙제점으로 인한 유급을 면하기 위해 마과학 교수에게 매달려도 보고, 사랑의 달 연회에서 드레스를 찢어먹어서 피츠시몬스 타임즈에 이름이 오르고, 또 카일과 바보 같은 장난을 치며 돌아다니던 그 9개월은 전부 그냥 허상에 불과했던가?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로즈마리 블로썸에게 직접 물어볼까 생각도 해 봤지만 그녀는 아직 입학하기 이전일뿐더러 그 단단한 5중 방패를 뚫을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만약 진짜 모든 것이 내가 만들어 낸 허상이었다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현실에서 로즈마리 블로썸이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애덤 월시가 지고지순하게 브리아나만 바라볼 수도 있고, 사랑의 달 연회의 내 드레스는 무사할 수도 있었다.
아직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나는 편한 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브리아나와 좀 더 일찍 친해져 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마과학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하거나.
하지만 로즈마리 블로썸은 그날 오후가 되어 전학을 왔다. 2주 뒤에 학생회 서기가 되었고, 그보다 2주 뒤에는 다시금 학생회의 공주님이 되었다.
여름 방학에 애덤 월시는 아니나 다를까 바람이 났다. 나는 브리아나와 협력하여 그 개자식의 궁둥이를 제대로 까 주었다. 우리가 월시의 얼굴에 돼지의 몸통을 합성하여 만든 가상의 캐릭터는 피츠시몬스 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불러일으켰다.
마과학을 포함하여, 낙제 과목은 하나도 없었다. 사랑의 달 드레스는 아주 견고했다. 카일과는 예전만큼 붙어 다니지 않았고 각자 멍청한 재미를 보고 다녔는데, 졸업 연회에서의 블로썸의 눈을 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졸업 연회 날이 되었다. 이번에 로즈마리 블로썸을 차지한 것은 켈란 일레스티아가 아니라 그의 부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로썸은 또 카일에게 다가가 무엇인가를 따졌다. 나는 술이 들어간 펀치를 너무 많이 마셔 버린 까닭에 먼 벽에 기대어 있었으므로 그들의 이야기가 들리지 않았다.
어느 순간 나는 바닥에 볼을 대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3월의 어느 날이 되었다.
***
세 번째 3월에 나는 브리에게 내가 사실은 예지 능력이 있으며 오늘 오후에 전학 오는 특례 입학생에게 학생회 전원이 목을 맨다고 말했다.
브리는 아리엘 달튼이 제정신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며, 피츠시몬스 타임즈에 제보해 공공연한 창피를 당하게 하겠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정말 로즈마리 블로썸이 전학을 왔기 때문이다.
2주 뒤에 브리아나 모슬리는 나를 신봉하게 되었다. 나는 애덤 월시의 지랄 같은 면모에 대해 낱낱이 말했고 브리는 그와 퍽 더럽지 않게 헤어졌다. 우리의 반인반수 캐릭터는 탄생하지 못했다.
또 로즈마리 블로썸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가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녀에게 말을 걸어 보려고 근처에만 가도 열 개의 눈이 나를 찢어 버릴 것만 같았던 까닭이었다.
카일과는 다시 친해지기로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가 없는 9개월이 엄청 재미있지는 않았다.
그러다 보니 새삼 깨닫게 된 사실인데, 그에게는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카일은 가끔 사람들의 머리 위를 보고 다녔다. 거기에 뭐가 있냐고 물으면 생전 양보한 적이 없던 피츠시몬스 아카데미 매점의 명물, 슬라임 푸딩을 내 주둥이에 쑤셔 넣어 말을 막곤 했다. 나는 가끔 슬라임 푸딩이 먹고 싶을 때면 그것을 이용해 먹었다.
그리고 로즈마리 블로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주기적으로 단둘이서 만남을 가졌다.
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하냐면, 블로썸의 부름에 꼬박꼬박 응하면서도 만나기 직전까지 끔찍해 죽겠다는 표정을 짓기 때문이다.
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하냐면, 막상 블로썸을 만나면 정말 마음에 드는 여자를 꼬실 때나 쓰는 목소리 톤을 내기 때문이다.
입가엔 미소가 걸렸고, 눈에서는 꿀이 떨어졌다. 그의 몸속에서 ‘사랑’을 담당하는 기관의 스위치라도 켜진 것 같았다. 참 헷갈리는 자식이었다.
어쨌든 로즈마리 블로썸이 보는 카일은 그런 모습이었다. 그래서 세 번째 졸업 연회에서 그녀는 쌍둥이를 양팔에 끼고 과일 펀치를 엎으며 깽판을 쳤다. 이번엔 성공한 줄 알았다고 했다.
내 얼굴에 술과 탄산수와 과일 쪼가리가 끼얹어졌다.
나는 졸업하지 못했다.
***
이제 더 이상 장난이 아니었다. 나는 졸업이 하고 싶었다. 그래서 쥐 죽은 듯 살았다. 브리와의 오해를 풀 생각일랑 하지 않았고, 카일을 피해 다녔다.
성적은 졸업이 간당간당한 정도를 유지했다. 눈에 띄지 않아야 했으므로 낙제를 할 수는 없었다. 휴스턴 교수는 바지를 딱 맞게 입는 편이었기 때문에, 바짓가랑이를 붙들기 어렵다는 이유도 있었다.
졸업 연회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텅 빈 기숙사 방에 쪼그려 앉아 졸업하게 되면 할 것들을 생각했다.
쓸모없는 생각이었다.
***
나는 공포에 사로잡혀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 브리아나는 룸메이트가 미쳤다며 아카데미 측에 방을 바꿔 줄 것을 요구했다.
이윽고 부모님의 귀에 나의 이런 상황이 들어갔다. 나는 로즈마리 블로썸이 학생회의 공주님이 되기 전에 도망치듯 아카데미를 빠져나갔다.
아카데미를 벗어나니 나에게도 안정이 찾아왔다.
고향에서는 달튼 상단의 후계자로서 개인적으로 교육을 받았다. 아카데미 생활을 10년이나 하면 아무리 사칙 연산을 손가락 꼽아 하던 둔재여도 셈에 익숙해지기 마련이었다.
모든 것을 그럭저럭 나쁘지 않게 해냈다. 아카데미를 자퇴할 때까지만 해도 걱정이 많던 부모님은 내가 교육을 잘 따라가자 마음이 놓인 듯했다.
밀루아의 영웅이 속한 학생회와 블로썸은 어느 곳에서든 유명했기 때문에, 나는 샌크릭 깡촌에서도 종종 그들의 소식을 접했다. 여전히 로맨스 소설 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가끔 그 소식에는 카일이 껴 있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로즈마리 블로썸과 그녀를 둘러싼 기현상에 어떤 식으로든 관계되어 있는 것이 분명한 카일을 버려 두고 혼자 떠났다는 것에 극심한 죄책감을 느꼈다. 외동딸보다 외동딸의 소꿉친구를 더 예뻐하는 부모님이 밥상머리마다 그의 이름을 꺼내다 보니 더욱 그랬다.
그래서 마침내, 카일이 일레스티아의 황태자를 구타하고 징계를 받았다는(반대가 아니라!) 이야기를 듣게 되자, 나는 불가항력으로 펜을 들었다.
카일에게 편지를 썼다. 지난 몇 개월의 무시와 무례를 사과하고 안부를 묻는 내용이었다.
사실 진짜로 묻고 싶은 게 따로 있기는 했다. 사람들의 머리 위로 무엇을 보고 있는지. 로즈마리 블로썸과는 도대체 무슨 인연인 건지. 블로썸을 사랑하는지, 증오하는지, 어떠한 감정이 있기나 한지.
그녀를 보는 눈이, 흘리는 목소리가 그렇게 달콤함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그녀를 몇 번이나 거절하는 건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건지.
혹시 그도 다섯 번째의 3월을 맞이했는지.
편지는 전달되지 않았다. 여섯 번째 3월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
“달튼, 일어나.”
정겨운 브리아나의 쌀쌀맞은 목소리였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무슨 일이야, 모슬리?”
“내 가방이 네 가방 밑에 있어.”
이 당시의 브리는 나를 끔찍하게 싫어해서 내 물건에 손이 닿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나는 퀭한 얼굴로 침대에서 일어나 브리가 가리키는 내 가방을 집어 들었다.
“웬일로 말을 잘 듣네. 해가 서쪽에서 떴니?”
브리가 톡 쏘아붙이고는 가방을 열어 <마법진의 이해>라고 쓰여 있는 공책을 꺼내 들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브리아나 모슬리는 이번 학기에 마법진의 이해를 듣지 않았다.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자, 브리는 이마 꼭대기까지 새빨개져서 황급히 공책을 뒤로 숨겼다.
“월시 필기를 대신 해 주는 거야?”
“네 알 바 아니니까 신경 꺼.”
맙소사, 애덤 월시. 매일매일이 새로운 쓰레기 자식. 브리아나 모슬리는 5학년의 일레스티아 학생 중 네 번째로 공부를 잘했다. 이렇다 할 뒷배가 없는 야매 귀족이기도 했다.
내 시야에서 월시의 공책이 최대한 안 보이게끔 고쳐 들고 허둥지둥 방을 나서는 브리의 뒤통수에다 대고, 나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지껄였다.
“모슬리, 월시는 네가 그럴 만한 자격이 되지 않는 자식이야.”
브리는 돌아보지 않고 손가락 욕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