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
1화
연회장 곳곳에서 술 냄새가 진동했다. 어떤 미친놈이 기어코 연회용 무알콜 과일 펀치에다가 술을 탄 모양이었다. 이미 대부분의 학생들이 비틀거리고 앉았는 형국에, 교수들은 눈에 불을 켜고 범인을 찾아 돌아다녔다.
“네 짓이지?”
“뭐가?”
“모르는 척하지 마. 교내 연회에서 술 한번 마셔 보는 게 꿈이라고 했잖아.”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카일에게 묻자, 그는 뻔뻔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졸업하면 개짓거리 못 해서 어떡하냐.”
“글쎄, 사회인이라고 장난 조금 못 칠까.”
“너 탤론 시청 마도구 관리 부서로 간다고 하지 않았어?”
마도구 관리 부서는 규율이 빡빡한 것으로 유명한 탤론 시청에서도 규율이 빡빡한 것으로 유명했다.
“황무지에 꽃 한번 피워 봐야지.”
“로맨틱하다, 야.”
내 영혼 없는 칭찬에, 카일이 부끄럽다는 듯이 몸을 배배 꼬았다. 진짜 한 대만 갈기고 싶다.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주먹을 들었는데, 문득 저 멀리서 무(과거에는 그랬다.)알콜 과일 펀치 과음으로 코가 빨개진 브리아나 모슬리가 나와 카일을 발견하고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카일 빌라드!”
“브리, 세상에,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걱정 고마워, 아리엘. 어느 똑똑한 놈이 술에 펀치를 타 놨지 뭐야.”
“천만에.”
카일이 과장스럽게 감사를 표했다.
“아무튼, 로즈마리 블로썸이 널 애타게 찾던데.”
“나를?”
“그래. 대체 학생회 공주님하고는 무슨 사이야? 궁금해서 여길 떠날 수가 있어야지.”
로즈마리 블로썸의 이야기가 나오자, 카일의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녀는 올해 초 전학 온 학생으로, 평민임에도 불구하고 귀족만이 재학 가능한 피츠시몬스 아카데미에 특례 입학하여 일약 유명 인사가 되었다.
듣기로는 성적 우수자라고 하는데, 입학 이후 성적을 보면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았기 때문에 그보다는 재작년 교수 채용 비리로 곤욕을 겪은 아카데미가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불러들였다는 이야기가 더욱 정설처럼 돌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녀의 이름을 드높인 점은 따로 있었다.
학생회의 공주님. 전학 와서 채 한 달이 지나기도 전에 그녀에게 붙은 이명이었다.
피츠시몬스 아카데미는 여러 국가가 국경을 맞대고 함께 통치하는, 말하자면 도시 국가였다. 딱히 어느 나라의 법을 적용하기도 애매했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규칙을 만들어 굴러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세가 강한 귀족이든 그렇지 않은 귀족이든, 강대국의 황족이든 망하기 직전인 나라의 황족이든 차별 않고 한 명의 학생으로서 대우하자는 분위기가 생겼고, 그렇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와중에도 계급 사회에서 십여 년 동안 특혜를 받고 살아온 삶을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시간이 지나며 알음알음 학생들 사이에서 격차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정점에 오른 것이 학생회였다.
일레스티아의 황태자이자 아카데미의 학생회장, 무지하게 길어서 차마 암기조차 어려운 이름을 지닌 켈란 어쩌고 일레스티아와 그의 부관 마르퀴즈 볼턴.
나돈 왕국의 양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금지옥엽이라는 막내 왕자 브라이스 로즈마리(놀랍게도 블로썸의 이름은 왕자의 미들네임이자 어머니의 이름과 일치했다!) 나돈과 그의 쌍둥이 형제 에드가 라모스 공작.
밀루아의 용기사 제이든 스펜서.
다섯 사람이 소속된 학생회는 그야말로 귀족 중의 귀족으로 구성되어 수많은 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그들 스스로도 그것을 아는 모양인지 쉽사리 인원을 충원하는 일이 없었다.
로즈마리 블로썸이 입학하기 전까지는.
블로썸은 정확히 2주 만에 학생회 서기 자리를 꿰찼다. 대체 무슨 수를 썼길래 난공불락의 학생회를 뚫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다만, 학생회 멤버들이 그녀의 매력에 푹 빠졌다는 소문만이 알음알음 퍼질 뿐이었다.
소문은 곧 현실이 되었다. 로즈마리 블로썸이 몇 개의 복도에서 켈란 일레스티아의 손을 잡았다는 목격담이 속출했다. 또 냉혈인간으로 잘 알려진 마르퀴즈 볼턴이 학생 식당에서 그녀의 의자를 빼 주고 눈웃음을 쳤다고 했다.
나돈의 쌍둥이는 그녀의 생일에 마력선을 대여해 연회를 열었다(나는 그 연회에 꼽사리를 껴서 카일을 도와 펀치에 술을 타려다 휴스턴 교수에게 현행범으로 검거되었다.).
귀족이 아닌 블로썸을 공공연하게 비난하고 다닌 페드로 캔트렐은 검술 실기 수업에서 제이든 스펜서의 목검에 시험을 빙자해 늘씬하게 얻어맞고 한동안 그의 악몽을 꿨다고 했다.
누가 봐도 알았다. 로즈마리 블로썸은 학생회의 명실상부한 공주님이었다.
근데 그런 로즈마리 블로썸이 카일을 찾는다? 그것도 애타게? 난생처음 듣는, 하지만 흥미롭기 그지없는 소식이었다.
“카일 빌라드, 너 나 몰래 호박씨 깠어?”
“호박씨는 무슨.”
카일이 성가시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그러자 브리아나가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이 뒤쪽을 가리켰다.
“근데 쟤는 왜 저래?”
브리아나의 쭉 뻗은 손가락 끝에 소문의 로즈마리 블로썸이 있었다. 이름값이라도 하듯 분홍색 드레스에 꽃과 보석으로 장식한 티아라를 쓴 모습이었다.
애매한 갈색 머리에 피부 톤이 밝지 않은 내가 저런 차림을 한다면 피츠시몬스 타임즈에 두고두고 박제될 것이었으나, 블로썸의 반짝거리는 금발과 프릴이 많은 드레스, 과한 장식은 기가 막히게도 잘 어울렸다.
그것들이 감싸고 있는 자그마한 얼굴이 울상만 아니었다면, 그야말로 꽃의 여신이라 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었다.
브리아나의 삿대질과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듯한 목소리 덕분에 드디어 우리가 있는 위치를 알게 된 모양인지, 블로썸이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시종일관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다섯 명의 잘생긴 들러리도 함께였다.
오랜만에 눈호강을 하겠구만. 나는 명백히 곤란해 보이는 카일을 곁눈질하며, 깜짝 놀라 자리를 피하는 브리아나를 고갯짓으로만 배웅했다.
“안녕, 카일.”
“안녕, 블로썸.”
블로썸은 카일을 이름으로 불렀지만, 카일은 그러지 않았다.
“오늘은 졸업식이야. 너도 알지?”
“알지. 이거 받았잖아.”
카일이 당연한 이야기를 한다는 듯 한 팔에 끼고 있던 졸업장을 집어 들어 보였다. 우리 부모님의 선물도 함께였다. 듣기로는 고급 마도구라고 했다.
딸에게는 편지 한 장이 없으면서. 아무리 마도구 한 짝이 아니라 상단을 통째로 물려받을 예정이래도 그렇지.
“그런데, 나한테 줄 거 없어?”
“없는데.”
날이 잘 갈린 대꾸였다. 카일답지 않은.
거기에 실린 기세를 눈치챘는지, 용기사의 눈이 흉흉해졌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무언가 하지는 않았는데, 그간 그가 보인 행적을 돌이켜 보면 약간 이상했다.
그는 팔짱을 끼고 블로썸과 카일에게서 한 걸음을 물리고 있었다. 마치 그곳이 자신이 나설 장소가 아니라는 것처럼. 누구 하나 잡아 죽일 표정이면서.
그뿐만이 아니었다. 졸업만 하면 득달같이 본국으로 돌아가 로즈마리 블로썸과의 결혼을 허락받겠다던 켈란 일레스티아도, 황태자의 부관이자 일레스티아의 성기사로서 신성 모독을 감수하며 로즈마리 블로썸을 숭배하고자 했다던 마르퀴즈 볼턴도, 블로썸을 위해 오랜 난봉꾼 생활을 청산한 나돈의 쌍둥이도, 블로썸의 곁에 있되 그녀를 방해하지 않는 것이 자신이 부여받은 역할이기라도 한듯 멍청하게 서 있기나 했다. 그들의 공주님이 눈물을 흘리고 있음에도.
그 가운데서 로즈마리 블로썸은, 카일에게서 기대했던 반응을 얻지 못했는지, 문득 입술을 깨물고 비명 같은 외침을 올렸다.
“왜, 왜? 뭐가 문제야? 꽂을 만한 플래그는 다 꽂았는데?”
플래그가 뭐야? 물음은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블로썸의 남자들에게 옮기라도 했는지, 어느새 나 역시도 그녀와 카일이 만든 무대에서 한 뼘 정도 떨어진 위치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지 카일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어떠한 저주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중얼거리는 소리가 블로썸의 예쁜 입술에서 새어 나왔다. 목소리는 아주 낮고 또 음산했다.
“1학기에 마과학하고 2학기에 마도구 운용 이론, 들었지. 성적도 B 이상이었고. 혹시 몰라서 다른 캐릭터 공략도 9월까지 완료했어. 호감도 확인 횟수도 채웠고… 선물도 충분히 줬을 텐데….”
“…….”
“말도 안 돼. 이건 아니야. 버그인가? 난이도가 이렇게 높을 리 없는데. 너는 그냥 서브 캐릭터잖아. 카일 빌라드는, 메인이 아니라고.”
“…….”
“아니면, 혹시, 저거 때문이야?”
블로썸의 고개가 기이한 각도로 꺾였다. 짙은 보랏빛 눈동자는 정확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 내가 왜?
의문이 머리를 강타한 순간, 나는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3월의 어느 날이었다. 로즈마리 블로썸이 입학한 날짜였다.
***
깨어나자마자 그만 넋을 놓을 뻔했다. 시간이 되돌아온 건 그렇다 치고, 졸업의 꿈이 물거품이 되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과음으로 나자빠진 나를 카일이나 누가 기숙사에 옮겨 놓은 줄 알았다. 근데 그랬다면 창을 열었을 때 보이는 게 여행 가방을 끌고 이동하는 학생들이거나 빛나는 순록 장식이어야 했다. ‘기회와 희망, 진실과 믿음, 피츠시몬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쓰인 현수막이 아니라.
매년 3월에 아카데미는 순진한 1학년 애들하고 학부모를 안심시키기 위해 ‘기회와 희망’ 운운하는 현수막을 정문에 내걸곤 했다. ‘진실과 믿음’ 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문구가 추가된 거는 올해부터였다. 재작년의 교수 채용 비리로 작년 신입생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던 탓이었다.
나는 내가 5학년 1학기의 3월에 떨어졌음을 금방 깨달았다. 그리고 절망했다.
나의 부모님은 밀루아에서 소소한 규모의 상단을 하고 있었다. 소소하다고는 해도 그들의 외동딸이 사람 몇 명을 두고 놀고먹으면서 살아가기에 모자람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명색이 상단주가 학위 하나 없어도 되겠니’라는 협박 아닌 협박에 떠밀려 피츠시몬스에 입학하게 된 그날부터 졸업만을 손꼽아 왔다.
아카데미는 아리엘 달튼과 같은 자유분방한 영혼을 가두기에 마땅한 곳이 아니야. 비슷한 견해를 가진 소꿉친구 카일 빌라드에게 습관처럼 내뱉던 푸념이었다.
마찬가지로 영혼이 자유로운 카일은 공부가 적성에 맞기라도 했지(탤론 시청은 모든 공시생들이 1순위로 꼽는 발령처였다.), 나는 기를 써서 전교 중위권을 겨우 유지하고 있을 만큼 공부에는 뜻이 없었으므로 졸업에의 열망은 그야말로 피츠시몬스에서 나를 움직이게끔 하는 원동력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졸업을 코앞에 두고 다시 1학기로 돌아와?
“악, 깜짝이야! 달튼, 악몽이라도 꿨어? 왜 아침부터 소리를 지르고 그래.”
“미안, 브리. 깼어?”
“그럼 안 깨게 생겼니?”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쓰는 브리아나가 새침한 표정을 짓고 나를 흘겨봤다.
“그리고 너 왜 나를 ‘브리’라고 불러? 우리 그런 사이 아니잖아. 갑자기 개과천선이라도 한 거야?”
아, 맞다. 둘도 없는 절친의 낯선 짜증에 잠깐 벙쪘다가, 곧 내가 학기 초에는 그녀와 그다지 친하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